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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090324 세돌은 왜 그랬을까


무슨 일이던 감정이입이 되면 괴롭다.(또는 행복하다.)

이번 WBC, 야구팬이 아님을 자처하는 터라 무심히 넘어가고 싶었다. 근데 감정이입이 되어버렸다.(다섯 판이나 해대니 안 넘어가고 배기겠냐?)

속상하다...이젠 당분간 야구뉴스는 못 본다. 일본팬 반응은 더 안 본다.


야구가 그러한데 하물며 바둑은 더하다. 4년 전, 응씨배를 철한이가 놓쳐버렸을 때 후배 녀석은 그랬다. 바둑 볼 맛이 딱 사라져버렸다고...(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兩者가 자랑하는 화려한 戰功과 兩國에서 각자 차지하는 위상에, 경쟁 심리적 자존심에, 그동안 주고받아온 빚까지,.. 온갖 것들이 겹겹이 압축된 상태에서 마련된 이번 쎈力전, (마치 오늘의 5차전 같고 9회, 10회 장면 같으다.)

더하다면 더하다. 며칠 동안 밥맛이 싹 사라질 정도였으니까. 왜 졌지..왜 졌지.

왜 그랬지 왜 그랬지..


세돌은 왜 그랬을까. 왜 쓸 만한 그림(1국)에 획이 이리 저리 비뚤게 나갔으며, 왜 완성직전의 名畵(2국)를 단 한 번의 붓놀림으로 망쳐버렸을까. 불과 며칠 전의 바둑(농심배 최종국)에선 그렇게도 집요했는데.


결국 수읽기이고 결국 실력이란 말인가. 아닐 것이다. 쎈돌은 古力보다 쎄다. 적어도 약한 수읽기는 아니다. 더더구나 중반은 말이다. (1국은 중반에, 2국은 종반에 망했다.)

고력이가 잘 두어서? 아닐 것이다. 자멸한 인상이 짙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傳言에 의하면 세돌은 (지고 난) 국후에 밝은 표정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와중 다행이라 해야겠지만 오랜 승부세월 단련된 덕분에 (겉으로만 억지로) 그랬을 지도 모른다.

내 경우, 나의 패배가 납득되는 패배라면 (쓰게나마) 웃을 수 있다. 납득이 된다는 건 고칠 문제점을 찾았다는 얘기니까. 그걸 고치면 다음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패배라면 웃을 수가 없다. 내가 처한 상황이 무엇을 고쳐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가정해보자, 이것보다 어두운 현실은 없다.


바둑을  두다 보면 반드시 기세가 충돌하는 상황이 온다. 아마추어의 막 두는 바둑은 이런 상황에서 앞뒤 안 재고 갈 길을 가버린다. 비슷한 상황에서 프로도 ‘기세의 길’을 가긴 한다. 단, 즐김이 우선이라 막바둑을 두는 나 같은 사람의 기세는 稚氣치기性 기세, 승부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프로의 기세는 치밀한 (이해득실을 면밀히 수읽기한) 기세란 점이 다르다.  

하지만 프로도 사람인 이상 수읽기를 다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기세를 고집하기도 한다.


어떤 상태에서?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 또는 과도하게 힘이 들어간 상태에서 기세에 의존하기 쉽다. 흔히들 당하는, 두어놓고 아차! 하는 경우이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프로도 이런 처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두 번이나 나온 아차수, 세돌은 아마 둘 당시엔 백88을 기세의 한 수라 보았으리라. 그러나 막바로 아차! 하며 후회했으리라. 조금 더 냉정했더라면, 조금만 더 냉정하였으면...


순리대로 마무리했으면 승리 가능성이 높았던 2국, 계가오류였을까? 그럴 리가.. 그 정도 차이론 불안했을까? 그래서‘한 번 더 ’를 외쳤을까(흑 115)?

그 ‘한 번 더’를 고력이가 잡아챈다. 말하자면 경광등을 번쩍거리며 백차가 떤 셈이고, 이번 판은 카드는 꺽어야 하는 판이 된 셈이다. 근데도 세돌은 폭주해버렸고 일순간의 기분에 올인해버렸다(흑 117). (그리고 망했다.) 왜 ‘빠꾸’를 하지 않았을까? 왜 나머지 판돈을 챙겨 승부를 계속 가져가지 않았을까? 이미 정지선을 넘었기 때문에? 남은 판돈으론 어차피 힘들기 때문에?


잘되면 충신 못되면 역적이라고 지난 일 곱씹어봐야 결과론일 뿐이다. 그런 게 바로 실력이라 말해도 딱히.. 반박이 어렵다. 그렇더라도 아쉬움은 남는다. 평범하게 두었다면 승부 양상은 다르게 전개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이창호의 無心타법이라면 달랐을까? 그럴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2국 117은). 그렇다면 세돌은 기세타법을 무심타법으로 바꾸어야 하나? 다른 말로 무심타법이 우월한가? 그렇진 않다. 생겨먹은 건 생겨먹었을 뿐이다. 사람은 생겨먹은 대로 살아야지, 실패했다고 입맛을 바꾸라고 할 순 없는 일이다. 다만 세돌은 실패를 줄여야 한다. 그 몇 수의 실패, 실수의 범주로 품어 안아야 한다. 

(「세돌은 왜 그랬을까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