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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090325 세돌은 왜 그랬을까 2


(「세돌은 왜 그랬을까」로부터 계속)


상호常昊에게 이런 인상을 받는다. 괜찮은 집에서 외동으로 자란 이미지, 구김살 없는 데다 바르게 배우면서 커온 유형이라 衆人이 좋아하게 생긴 사람됨. 타고난 재주에 주위의 무난한 뒷받침,..뭐 하나 빠지질 않았고 바람대로 쑥쑥 커서 중국 1인자,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과정에 큰 難關난관도 없었다.)


그런데 (다들 알듯이) 불쑥 앞에 나타난 이가 이름 하여 이창호, 상호는 이창호란 마지막 벽 앞에 좌절해야 했다. 좌절로 그쳤으면 그저 좌절이었을 뿐이지만 상호의 사람됨이 좌절 앞에 견디지를 못했다.


약하다기보다, 무르다 낙천적이다 해야 할까. 아무튼 이런 사람일수록 쉽게 휘어진다. 상호의 바둑인생이 막장(인생 막장이 아니라 바둑일 뿐이고, 실력 자체가 아닌 심리적 차원일 뿐이지만)까지 간 이유가 아닐까 한다..


끝없는 침체에 빠졌던 상호, 그래도 결국 되살아났다. 그것도 바둑나이로 상당히 늙었는데 불구, 살아났다. 젤 큰 이유가 탄탄한 기본실력 덕이겠지만, 좌절은 상호에게 일종의 단련이었던 고로, 그가 모진(?) 단련을 견뎌낼 수 있었던 이유가 天性이 좀 무르고 낙천적이었던 덕이 아닐까.

다 결과론이긴 하지만.


최철한에게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이 느낌이 젤 커다랗게 다가온 게 크리스마스 발언이다. 뭐냐면 최철한은 2004년 12월 응씨배 1,2국에 앞서 열린 전야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마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어름으로 기억하는데,


‘빨리 끝내고 크리스마스를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정확한 字句는 모르겠지만 대략 그러한 의미였다.)

당시엔 모르고 지나갔지만(記事가 좀 많나, 정작 이 발언을 제대로 접한 시기도 응씨배 한참 후였다.) 崔가 이후 침체에 빠지면서 상호의 인상과 崔의 인상과 이 크리스마스 발언이 자꾸 겹쳐지곤 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일평생 중대 승부 앞에 순진하기만 했던 사람이 이제는 뒤돌아보는 구나.. 


응씨배를 지긴 했지만 그 해 2005년 저물도록 崔는 세돌과 함께 한국의 투톱이요 맨유의 호날두/루니 격이었다. (사람들은 국내용 국내용 하지만 그건 침체 이후에 나오기 시작한 소리, 당시 국제대회 성적을 확인해보면 최철한의 승률이 세돌 못지않다.)

高原을 유유히 나는 기러기 같던 두 마리 새, 어느 순간 갈고리가 좌악 벌어지듯 한 마리는 더 솟구치고 한 마리는 곤두박질친다. 그런데 그 낙하의 궤적이 참으로 급격하였고 너무 한참 동안이었다.

손수건을 단 코찔질이 최철한, 세돌에게 두 점 연습바둑을 지고 울던 최철한. 순둥이...

상호를 닮은 최철한.


無心한 이창호. 바둑도 그렇지만, 凡事에 無心한 이창호. 이창호는 진폭이 작은 사람이다. 혹시 그가 6연속 준우승을 한다 치자. 그래도 이창호는 묵묵히 무심하게, 열심히 바둑을 둘 사람이다. 좌절에도 무심할 사람.

明度가 진한 사람 이세돌, 이세돌은 단단한 사람, 독한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좌절은 사치, 더구나 한 번의 패배인 바에야,.. 흔한 말로 승패는 兵家의 常事 아닌가.

이세돌이 이번 패배에 무심하리라 믿는다. 무심하여야 하고.. 뒤돌아볼 필요가 없다.


(승부 이후 단계에 관한 얘기였고, 아래는 승부 이전 단계에 대한 얘기이다.)


기벽奇癖이라고도 하고 자유분방이라고도 하고, 馬妖마요 마효춘에 비견되기도 하고... 이세돌에겐 우리가 칭찬해줄 순 없는 성벽性癖이 분명히 있다. 근데 하필 왜 이 시점에서 그게 도졌을까? 누가 보아도 제 발등을 찍는 짓인데.


순전히 짐작으로 하는 얘기지만 그동안 세돌이 흘려온 말의 편린片鱗을 엮어보면 이세돌은, 내가 한국과 한국바둑의 짐을 짊어지고 있다,.. 그런 압박감을 갖는 듯하다. (가상한 일이지만 지나치면 부담이 된다.) 거기다 동갑내기가 주는 부담. 그래서 더욱 질 수 없다는 부담. 이런 부담을 홀로 짊어져야 하는 외로움. 이걸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복수심. 이런 식으로 자꾸만 自縛자박의 상태에 빠져가지 않았나...

이것 말고는 이세돌이 대국 직전에 보여준 괴상한 행동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 멀쩡한 정신에 제 발등을 찍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래, 바둑 외의 것은 무심으로 넘기고 바둑만 생각하자.

다른 접근방법, 세상의 일 중엔 가끔, 거꾸로 접근하면 오히려 나은 경우가 있다. 이런 생각은 어떨까. 져도 좋다는 생각을 해보자. 까짓 거 지면 으때 라고 생각해뿌자, (진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지기밖에 더하나.) 다음에 이기면 되잖아. 여기에 답이, 과감한 이독제독以毒制毒에 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