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바둑

090800 [펌譯] 중국의 權도장을 꿈꾸는 아마추어 5단, 葛玉宏 (북경청년보)


‘기예도둑’이 聶馬도장으로부터 떨쳐 일어나 문호 자립하니 葛玉宏 식 마귀훈련으로 하루 밤만에 폭발한다


원작: 北京靑年報,  2009年08月04日 Tom.com으로 轉載 ()




금년도 입단 시합에서 아마추어 棋士인 갈옥굉이 경영하는 도장道場이 크나큰 이변을 일으켜 입단 정원 20명 중 14개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 중 여자 정원 3개는 모두 葛도장의 차지였다. 명성이 오래인 섭위평 도장은 고작 1개, 마효춘 도장은 5개를 차지하였다. 생긴 지 채 일 년이 못 된 일개 ‘초가집 도장’이 어떻게 하룻밤에 폭발할 수 있었을까? 갈옥굉은 어떠한 사람인가? 어떻게 감히 聶馬도장에 도전하였을까?



●감숙省 다섯 바둑소년을 데리고 북경에 오다


갈옥굉은 감숙省 玉門의 油田으로부터 왔고 금년 38세이다. 많이 마른 체격이며 말을 할 때는 조리가 분명하다. 기자 앞에서는 온화하고 학생 앞에서는 엄하다.


2004년 이전에 감숙省 소년 張念祺(장념기)가 부모 동행 하에 북경 어느 유명도장에 와서 바둑을 배웠다. 일 년 반 이상을 배웠으나 효과가 없었다. 결국 감숙省 고향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張씨 집안과 갈옥굉은 비교적 친숙한 사이여서 張씨는 葛선생의 인품과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장념기의 아버지는 지금까지 퍽이나 만족스럽다 생각한다.“나는 다른 넷 아이의 가장을 찾아서, 함께 葛선생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전권을 당신에게 위임하겠으니 일을 맡아 달라, 우리의 다섯 아이를 데리고 북경으로 가서 바둑 공부를 하도록 해 달라 청했지요.”


葛선생은 가장들의 간절한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승낙을 한다. 헌데 이 북경 행이 뜻밖에도 그의 인생 전체를 바꾸어버릴 줄이야. “우리들은 그 당시 葛선생에게 보수를 겨우 월 1500元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葛선생이란 양반은 퍽이나 소박해서 지금껏 우리들은 그와 조건(보수 등의)을 의논할 때면 민망스럽습니다. 애들을 그에게 건네면 그는 우리들 부모가 하는 것보다 더 성심을 다합니다. 그에게 느낀 감격은 진실로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장념기의 아버지가 말했다. (장념기는 금년 입단시합에서 시작부터 9연승으로, 몇 판을 남긴 채 입단을 확정시켰다.) 



●어미닭이 병아리를 돌보듯


북경에 도착하여 葛선생과 다섯 아이들은 중국기원 부근 가옥 내에 방을 임대하였다. 아이들의 생활과 바둑 공부 일체는 관리가 필요하다. 힘든 나날이 지나갔다. 어떤 때는 보모保姆를 청해도 오지를 않아서 葛선생은 집에 있는 아내를 불러다 애들에게 밥을 해먹이기도 했다. 서안(西安)의 세 아이들의 가장들이 또 葛선생이 맘에 들어서 다짜고짜 애들을 보내왔다. 葛선생은 여덟 아이들의 보호자가 되었다.


葛선생은 바둑 두는데 있어 신체를 중요시한다. 매일 아침 언제나 그는 직접 아이들을 데리고 운동장에 트랙을 도는데, 비바람을 아랑곳 않는다. 400미터의 트랙을 반드시 8~14바퀴를 돈다. 그리고선 체육장 경비를 거둔다. 한 무더기의 아이들은 곧바로 葛선생을 따라 대로를 달린다. 이 때 葛선생이 아이들을 이끄는 것이 마치 어미닭이 병아리를 돌보는 듯하다. 아침을 먹고 아이들을 인솔하여 섭위평 도장으로 간다. 아이들이 바둑을 둘 때 그는 주위를 맴돈다. 정오에 다시 아이들을 데리고 숙소로 돌아와 밥을 먹고, 휴식을 하고, 오후에 바둑 학습을 보내고, 저녁에 돌아와 밥을 먹고, 복기 자습을 하게 한다. 葛선생이 지도하는 아이들 중에 빗나가는 아이는 하나도 없다. 모든 아이들은 그의 눈에는 똑같이 중요하다. 어디로 가든 그는 아이들을 데려고 간다. 한시도 아이들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일찍이 葛선생이 규정을 만들었다. 평소 간식을 먹으면 안 되고 만약 위반 시에는 벌을 받아야 한다. 주말에는 슈퍼에 쇼핑을 가는데 반드시 단체행동을 해야 하고 규정 시간에 돌아와야 한다. 산 물건의 가격이 규정 금액을 넘으면 살 수 없다. 葛선생 지도 덕분에 아이들이 철이 드는 구나, 가장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2008년 당시, 馬도장에서 공부하던 감숙省 출신 및 서안 출신 즉, 西北 출신의 아이들. 이들 대부분이 나중에 葛도장으로 따라온다.     사진:Tom.com


●‘棋藝기예도둑’이 聶馬도장으로부터 떨쳐 일어나 문호 자립하다


聶도장에서 바둑을 배우는 생활이 일 년 너머 지났을 때 마효춘 도장이 생겼다. 새로운 도장은 입단 지망생들의 학비를 감면해주고 숙소 조건을 개선하는 등 일련의 우대조치를 해 주었다. 가장들은 말한다. “어디가 되었든 葛선생께서 좋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옮기시지요. 우리들의 아이들은 당신을 따라갑니다.”


곧 아이들은 馬도장으로 옮겼다. 葛선생은 권유를 받아 馬도장 관리 선생 직을 반 년 동안 맡았다. 장념기의 아버지는 葛선생을 찾아가 말한다. “2004년 저는 선생을 번쩍 들어 북경에 가져다놓았습니다. 현재 선생께선 적지 않은 아이들은 맡고 계십니다. 사람의 정력이란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결국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이 모자라게 될 것입니다.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우리들은 매우 걱정됩니다.”


진지한 고려 끝에,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고 해서 葛선생은 결국 馬도장의 관리 선생 자리 및 관리 선생으로서 애써 보살피던 아이들을 포기한다. 馬도장에서 西北 출신의 아이들은 2,3년을 배웠는데, 작년 9월에야 葛도장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동시에 아이들 전부가 葛선생을 따라 옮겨갔다. 자신의 도장이 생기기 전에 葛선생을 따르던 아이들은 삼,사십에 달했다.



●이기면 차를 타고 지면 아파트를 세 시간 돌고


작년 여름 이후 葛선생은 아이들을 데리고 셋집을 방장(方莊;건축물 이름 또는 地名)으로 옮겼다. 이곳은 석류원에 있는 聶도장에 대항전 하러 가기 적합한 곳으로, 聶도장까지 걸어서 40분 거리일 뿐이다. 葛도장의 규칙에 의하면 바둑을 이기는 아이는 차에 앉아서 돌아올 수 있고 패배한 아이는 꼬박 서너 시간을 걸어서 돌아와야 한다. 이것은 葛선생이 아이들을 다루는 ‘체벌’의 일종이라 생각된다. 葛선생은 기자와 이 부분에 대한 얘기를 피하지 않았다.


“확실히 제가 이런 식으로 합니다. 한두 번도 아닙니다. 우리들은 석류원에서 걸어서 천교(天橋)까지 갑니다. 더 걸어서 서단(西單), 동단(東單)까지 더 가고, 숭문문(崇文門)으로 돌아옵니다. 마지막으로 방장(方莊)에 도착하면 이미 밤 여덟,아홉시인데 그때서야 밥을 먹습니다. 아이들은 한편 걸으면서 한편 조잘거립니다. 패배의 아픔은 차츰 발산됩니다. 저는 아이들과 같이 걷습니다만, 이런 식으로 아이들은 어느 정도 평상심으로 돌아옵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가장이 숙소에 와서 아이들을 보았는데, 당시 몇몇 아이들이 복식루(復式樓)를 계단 난간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다. 가장은 매우 괴상했다. 아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최근에 자주 졌어요. 엄청 걸었어요. 다리에 알이 박혀서 계단 내려오기가 힘들어요. 난간 타고 내려오는 게 편해요.”



●마귀훈련, 고액으로 사범을 청하다


葛도장의 ‘마귀훈련’은 업계에서 유명하다. 매월 여덟 차례의 내부 리그전을 진행하는데 실력에 따라 14개 조로 나눈다. 성적 우수자는 승급, 반대의 경우엔 강급이다. 일찍부터, 8연속 패배하는 경우 리그 강급 뿐만 아니라 머리를 박박 미는 규정이 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장념기 이 녀석이 대항전에서 7연속 패배를 하여 박박머리 되기 일보직전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장념기는 죽어라 최선을 다하여 여덟 번째 판을 두었다. 결국 반집으로 간신히 이겼는데, 이긴 후 그 흥분하는 꼴이란 상호가 응씨배를 먹었을 때의 환희에 개미눈물만큼도 모자라지 않았다.


다른 도장들은 고수를 매일 오게 하지는 못하는 데 반해, 매일 고수들이 운집하는 葛도장은 하나의 색다른 공간이다. 모두 葛선생이 청하여 오게 하는 것인데, 매일 최소한 6명의 프로가 와서 학생들에게 ‘특별식’을 먹인다. 이들 중에는 왕욱휘(王煜輝), 주송력(朱松力), 추준걸(鄒俊杰), 장립(張立), 오신우(吳新宇), 마소빙(馬笑冰), 조철륜(趙哲倫)등이 포함된다. 선생의 단위와 실력에 따라 葛도장은 매 수업(2시간짜리) 당 400원(註:중국 1元 --> 한국 184원)에서 800원에 이르기까지 차이를 두어 수업료를 지급한다. 신용이 좋고 학생이 양질이고 관리가 철저한 까닭으로 프로들은 죄다 이곳에서 강의를 하고 싶어 한다. 



●남자아이들은 손바닥을 맞고 여자아이들은 벌금을 문다.


葛선생에겐 체벌 권한도 부여되는데, 이것은 가장과 아이들의 이심전심으로 동의한 바다. “저는 성격이 급합니다.” 갈옥굉이 말한다. “자로 손바닥을 때리는 일은 자주 있는 일입니다. 그렇긴 해도 한도는 넘지 않습니다. 때리기를 몇 년간 하다 보니 경험이 쌓였습니다. 아이의 성격적 특징과 범한 잘못의 성질에 따라 어떤 식으로 때리느냐가 결정됩니다. 강한 쪽 성격이고 신체가 좋고 잘못 또한 큰 경우라면 힘껏 때립니다. 유약한 성격에다 몸도 건장하지 못하고 겁이 많은 쪽이라면 소리만 나게, 시실은 아프지 않게 때립니다.”    


“여자아이들에게는 이전에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여자아이들은 본래 바둑학습에 딸리는 측면이 있고 자존심은 비교적 강하고 낯가죽은 얇습니다. 나는 여자애들에게 일주일의 목표를 정해주는데, 일주일 당 100개의 사활을 풀게 합니다. 만약 85% 이상 해내지 못하면 벌금 명목으로 50원을 물리고 이를 公金공금화합니다. 주말이 되면 모두가 신선로(
註;火鍋화과=불화로,중국식 샤브샤브) 따위를 먹으러 가는데 이 벌금 물려서 만든 공금을 경비로 씁니다. 이런 식으로 한다 쳐도 벌금 50원 돈은 역시 그 애들에겐 체면이 서지 않는 일입니다.” 


葛선생의 ‘체벌’은 가장들 모두의 지지를 받는다. 한 가장이 기자에게, “아이를 보러 가서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우리 애가 그 조에서 제일 어린데, 그 회차에 사활문제 3개를 못 풀었어요. 규정에 따라 손바닥 아홉 대를 자로 맞아야 했지요. 내가 문에 다가섰을 때 마침 우리 애가 손바닥을 내미는 장면이 눈에 들어옵디다. 葛선생은 ‘짜악짜악짜악’때렸어요. 나는 바로 물러서 나왔지요. 그게 말인즉슨요. 아이를 완전히 맡긴다는 건 누군가에 대한 절대적 신임이 필요하지요. 게다가 葛선생께서는 한도를 넘기는 경우가 없어요. 문제를 만들지 않죠."

 



대화, 葛 :중국 최고 도장을 만들고 싶다


기자 :어떻게 바둑 선생이 되었습니까?


葛 :저는 기껏해야 아마추어 5단입니다. 제 학생들 거의 전부가 저를 이깁니다. 저는 17살에야 바둑을 배웠습니다. 그때 저는 옥문(玉門,西藏서장자치구에 위치) 油田 상의 직업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학우를 따라 바둑을 배웠습니다. 제가 19살인 해에 동종업에 종사하던 장립의 아버지가 저를 찾아와 장립에게 바둑을 가르쳐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매주 장립을 가르치러 갔습니다. 후에 장립의 진전이 유달리 빠름을 알게 되었고 대략 3년을 가르친 후 저는, 때를 놓쳐 남의 아이를 망치지나 않을까 두려워 선생 노릇은 접어두고 대신 장립을 데리고 여기로 저기로 가르침을 찾아 장립이 배우게 했습니다. 3년이 지났고 마침내 장립은 프로가 되었습니다. 저는 각별히 기쁨을 느꼈습니다.      

기자 :자기 일 젖혀두고 뭔 딴 짓이냐는 소리는 없었습니까?


葛 :저는 당시 採油工(채유공)이었는데, 한편으로 단지부(共靑團支部:공산주의청년단 지부) 서기였습니다. 업무를 잘 보았지요. 만일 바둑선생의 길로 가지 않고 다른 일을 하였더라도 잘 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만약 지금이라면 또 다시 바둑 쪽으로 걸어갈 용기가 확실히 있다고는 못합니다. 그때는 어렸고 무서운 것이 없었지요.


기자 :당신은 아이들을 데리고 聶도장으로, 馬도장으로 옮겨다녔고 최후에는 자신의 도장을 세웠습니다. 이런 행태가 동종업자들의 분노를 사지나 않을까 무섭지 않았는지요?


葛 :경쟁은 확실히 있어요. 그들도 결국 유쾌하진 않을 겁니다. 그래도 내 학생들의 미래를 놓고 비교하면 그들의 감정은 큰 문제가 아니에요. 프로 입단은 무척이나 어렵고 가장과 아이들은 좋은 결과를 바라고 큰 출혈을 감수합니다. 아이들의 미래를 담보로 타인의 감정을 희롱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기자 :자신의 도장을 경영할 마음을 먹은 때는 언제였습니까?


葛 :2004년 막 북경에 왔을 당시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머리 속에는 오로지 남의 아이를 잘 보살펴서 장래가 있게 만들겠단 생각뿐이었습니다. 2007년 전후로 몇 개 도장을 거쳤고 아이들은 나를 따르고 싶어 했습니다. 내 일을 하자는 생각이 싹텄습니다.


기자 :지나간 5년 중에 어떤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까?


葛 :작년에 독립하고 올해 입단 시합까지 제일 힘들었습니다. 38세 되도록 살면서 이렇게 힘든 적이 없었습니다. 집을 세 얻고 돈을 마련하고 선생과 얘기하고 가장과 얘기하고 훈련을 시키고 시합을 시키고...일체를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금년 입단 시합 한 달 전 어느 날에는 아침 8시 반부터 저녁 8시 반까지 한 끼도 먹지 못하고 일곱 무리의 가장들을 맞아 응대를 했는데, 가장들이 돌아간 후 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이 제 인생 중에 제일로 힘든 날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기자 :葛도장의 학비는 다른 도장에 비해 약간 비싸다 들었는데, 어떤 학생은 매달 3500원을 낸다는군요. 현재 도장의 경영상태는 어떻습니까?


葛 :지금은 현상유지 상태이고 남는 것은 없습니다. 북경의 임대료는 굉장히 비쌉니다. 우리는 方莊에서 두 칸 합쳐 400여 평방미터를 세를 얻고 있는데 한 달 세가 25000원이 듭니다. 거기다 프로기사를 모셔야 하니 이 두 가지에 나가는 지출이 매우 큽니다. 지금껏 저는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관리를 잘해서 성적을 내는 것이 우선입니다.


기자 ;당신 인생의 이상은 무엇입니까?


葛 :중국 최고의 道場을 만들고, 또한 세계대회 우승자를 키워내고 싶습니다. 조만간 한국의 도장에 가서 그들의 선진 경험을 배울 작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