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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100820 [펌譯] 應明皓 '가실 때 先親은 바둑만 가지고 갔다' (謝銳,體壇周報) )

 

應明皓 :선친은 가실 때 바둑만 가지고 갔다/응씨 규칙 연구에 20년을 바쳤다



출처 :謝銳 주간체육계(體壇周報), 

      新浪체육(sports.sina.com.cn)으로  2010.08.20에 轉載  


 



기자謝銳/란주(蘭州)에서보도 8월 18일은 倡棋배 중간 휴식일이었다. 주최 측은 사람들을 란주의 황하大철교, 백탑산(白塔山) 등의 절경을 관광시켰다. 應氏기금회 이사장 應明皓(응명호)는 티셔츠를 입고 샌달을 신고 야구모자를 쓰고 사람들과 함께 나섰다. 거리의 누가 상상했겠는가. 이 사람이 억만장자 大富豪임을.


黃河 연안에 전망대가 있다. 응명호는 자기가 알아서 올라가겠다고 했다. 누군가 위에서 잡아주겠다고 해도 웃으면서, “괜찮아요 괜찮아요. 10년 정도는 혼자 거뜬히 올라갈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응명호는 이미 67살이지만 아직 짱짱하다. 그의 건강관리의 최대 비결은 ‘느긋함’이다. 2005년 초에 常昊(상호)가 豊田(토요타)배 결승에서 지고 인생의 바닥으로 떨어졌을 당시 응명호는 말했다. “이 순간의 인생 좌절은 별 거 아니에요. 내 나이가 예순인데 무슨 일을 못 봤겠어요? 느긋하면 돼요. 상호가 아직 그렇게 젊은데, 기회는 앞으로 많아요.”두 달 후에 상호는 제5회 응씨배 결승에서 최철한 3:1로 이기고 프로 생애 최초 세계대회 우승을 달성했다.


우리들은 양가죽 뗏목을 타고 黃河를 건넜다. 응명호는 제일착으로 뗏목에 올라가서는 제일 앞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물살은 세찼고 뗏목은 흔들거려 사람들은 다소 어지러운 감을 느꼈다. 응명호의 童心(동심)을 목격하기로,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2008년에 만곡(曼谷)에서 열린 응씨배 준결승 기간 동안에 유람나간 일이 있었다. 동물원에서 응명호는 대담하게도 이무기를 목에 걸치고서는 코끼리 등에 앉아서, 누구보다도 즐겁게 놀았다.


응명호는 예전에 미국 생활을 20년을 했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당시의 흔적이 묻어난다. 중국기원의 武力(무력) 선생은, 당년의 응명호가 부친을 모시고 중국기원에 왔을 때를 기억한다. “그 당시 그(응명호)가 아직 젊었을 때였습니다. 표준어를 그다지 제대로 못 했고 영어와 영파(寧波)말만 했지요.”그런데 이 미국화 된 중국인이 부친의 영향을 받아서 돈을 가벼이 보고 생활이 소박하다. 무력의 말, “응명호에게 장점이 있는데, 바깥에서 배가 고프면 그냥 길에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합니다. 그는 맛있게 먹습니다.” 


응명호 일생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그의 부친이다. 그는 말한다. “선친께서는 돈이 아니라 바둑을 사랑했습니다. 당신은 일생동안 적지 않은 돈을 벌었습니다만 거의 모두 바둑에 쏟아 부었습니다. 당신은 매우 유능하셨습니다. 일찍이 대만 중앙은행의 副행장을 맡아 실질상 행장의 직책을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여하한 당파에를 가입하지를 않았기 때문에 正職(정직)을 맡을 수 없었습니다. 행장이 당신의 말을 다 들어주었고 당신 또한 일을 잘 했습니다만 역시 부자유스러워서 스스로 나와 공장을 열고 장사를 했습니다. 벌어들인 돈은 바둑에 썼죠.”


“선친은 고집이 셌습니다. 한 번 정하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바둑 규칙을 연구하기 위해 당신은 20년 세월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직업 棋士들조차도 당신의 연구 성과 보러 오기에 시간을 빼주지 않자 선친은 많이 실망하셨습니다.”


응창기는 평생 열렬히 바둑을 사랑했다. 다만 그는 직업 棋士와 바둑을 둔 적은 거의 없다. 그 원인을 응명호는 이렇게 말한다. “아마추어 棋士와 직업 棋士의 감각은 완전히 다릅니다. 일찍이 선친은 이 점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때문에 선친께서는 직업 高手와 둔 적이 없습니다. 직업 高手들을 곤란케 하지 않으려 하셨죠.”다만 응창기는 (아마추어와) 對局하기를 즐겼다. 응창기는 이전에 재정부장과 국무위원을 지낸 바 있는 張勁夫(장경부)와 수담 한판을 나눈 바 있는데, 시간이 오래되었지만 응명호는 당시의 情景(정경)에 대한 기억이 오히려 새롭다. “그 판은 제 아버지께서 이겼습니다. 장경부는 지기 싫었습니다. 게다가 옆에 있던 唐克(당극) 부장-전 석유부 부장-이 ‘벌써 던졌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장 부장은 계속 두어나갔습니다. 얼굴이 시뻘갰습니다.”


응창기가 세상을 떠나 응명호는 마음속의 支柱(지주)를 잃었다. 응명호는 친히 대북(臺北)에 묘지를 골라서 墓園(묘원)을 설계하였으며, 부친의 棺에는 두 가지 물품을 넣었다. 바로 바둑과 오청원 기보로서, 응창기가 생전에 좋아하던 것이었다. 부친의 묘비 앞에는 특별히 한 벌, 돌로 된 바둑판과 바둑돌을 설치하여 비바람에 영원히 견디도록 하였다. 만약 하늘에 응창기 선생의 영혼이 있다면 이 한 벌 바둑판 앞에서 오청원 기보를 놓아보면서 아들의 정성에 감동하리라.                                               -謝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