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바둑

[펌譯] 人生無答, 조훈현 조치훈의 경우 (蕭蕭風,새물결체육)


棋事 :人生無答, 조훈현 조치훈의 경우

 

 


 

출처 :소소풍(蕭蕭風) 새물결체육(新浪體育) 2015.07.28

 

 

 


 

726, 오랫동안의 대대적 홍보 끝에 한국현대바둑 70주년 특별대국’, 조치훈 vs조훈현 대결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두 전설의 인생 황혼에 또 한 번의 대결은, 조치훈의 시간패라는 희극적인 결말로 성대한 잔치를 마쳤다.

 

이 판은, 어쩌면 그 결과가 중요하다기보다는 단지 한국바둑계의 여럿 기념활동 중의 우스개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다만 이 두 사람 한국바둑의 대표인물, 서로 다른 인생 궤적이 바둑판 위의 충돌로 펼쳐 보인 득과 실은 여전히 의미심장하다.

 

 

방울방울 집념이 강물이 되다

 

현재 한국바둑의 대표인물을 말하자면,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인물은 자연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이다. 조치훈으로 치자면 그는 일본바둑의 대표 아닌가!

 

다만 이는 당연 이 시대바둑의 개념으로서, 만약에 현대를 말하자면, 이왕에 한국현대바둑 70주년 기념이니, 더 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한국바둑이 그리 강하지 않던 시절에, 조치훈은 한국 재일동포 棋士라는 신분으로 바둑 왕국을 호령하여 한국바둑계에 흥분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훗날 曺李李의 세계대회 걸출한 활약으로 만든 韓流의 세계에 전혀 손색이 없다.

 

조치훈과 조훈현은 사실 원래는 비슷한 길을 걸을 뻔 했다. 단지 운명의 곡절로 그들 앞에 다른 하늘이 펼쳐지게 된다.

  

나이로는 조치훈이 조훈현보다 세 살이 적은데, 일본 유학은 조치훈이 일 년 빨랐다. 둘 다 당시 척박했던 한국바둑이 학수고대하던 천재소년으로서, 진흥의 희망과 집안과 국가의 중대한 사명을 짊어졌다. 어린 그들에겐 꿈의 실현이 요구되었는데, 이 꿈은 어른들의 꿈으로서, 한국바둑 오랫동안의 굴욕과 눈물로 응집된 꿈이었다. 이는 조치훈 조훈현의 꿈이 아니었다. 애들이 절대로 그렇게 심각한 꿈을 꿀 순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木刀竹劍이요 잠자리나 나비였다. 흑돌 백돌에 반하긴 했지만, 꿈속의 색깔은 그래도 일곱 빛깔 무지개였다.

 

그리하여, 여섯 살의 조치훈 열 살의 조훈현이 현해탄을 건넜고, 일생에 걸친 고된 여정을 시작했다. 우린 그들의 일생을 소재로 한 편의 훌륭한 傳記(전기)를 써서 바둑 배우는 청년을 격려할 수도 있다. 다만 인생승리자의 관점을 제쳐두었을 때, 그들은 그때의 어쩔 수 없는 선택에 정말로 아무 원망도 없을까?

  

기타니(木谷實) 문하에 들어간 조치훈은 열한 살에 일본기원 최연소 프로棋士가 되며 당시의 기록을 세웠다. 세고에(瀨越憲作)의 눈에 들은 조훈현은, 도일하기 전에 이미 한국기원 프로 단이었지만, 오만한 일본기원의 승인을 얻지 못했고, 단지 4급으로 인정받았다. 이게 바로 바둑 왕국과 바둑 미개지 간의 격차였다. 조훈현이 일본기원 프로 초단이 된 때는 4년 후로서, 4년 세월이 당시 한국바둑과 일본바둑 간의 메울 수 없는 간격인 셈이었다.

  

숫자 기록만 보자면, 조치훈과 조훈현은 둘 다 천재라는 이름에 걸맞았다. 두 소년의 성취는 일본 본토의 영재들을 진땀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타국에서 온 나그네, 그 누가 이들의 마음속 풍파를 제대로 알 수 있었겠는가.

  

만약 (이번에) 입단하지 못한다면 집으로 돌아간다...” 19681월 엄동설한, 조치훈의 형 조상연 입에서 나온 말은 나직하면서도 차가웠다. 조치훈의 말 :“평생 그 무서웠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때는 그의 입단 전날이었다. 고작 열한 살의 아이가 타국 땅 차가운 거리 위에 서 있었다, 코는 빨갛고 입으론 하얀 김을 호호 불며. 그 순간, 그는 너무나도 집으로 돌아가서 식구들의 더운 품에 안겨 온갖 억울함과 아픔을 펑펑 울며 하소연하고 싶지 않았을까?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조치훈은 자기가 바둑의 길에 들어선 데 대해, “행복하다, 불행하다 말하기 쉽지 않다. 최소한 무슨 행복감은 없다.” 이건 아마도, 바둑을 뜨겁게 사랑한다 허세 부리는 우리가 이해하기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바둑으로 더할 나위 없는 영예를 얻지 않았는가, 만약 바둑이 없었다면 당신은 지금 어느 구석에 묻혀 있을지 모르잖나. 어째서 바둑을 선택해서 불행하다고 말하나?

  

이거야말로 조치훈이다. 진실한 조치훈이다. 조치훈의 매력이다. 그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기 마음의 느낌을 존중한다.

 

감성적인 조치훈에 비해, 조훈현이 우리에게 남긴 인상은 훨씬 剛勁(강경)해 보인다. 다만 그건 어쩌면 엄혹한 현실을 마주하는 그의 가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는 바둑을 져도 사람들을 앞에선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며, 주위에 知己 하나 없이 홀로 조용히 상처를 핥아야 했다.

  

그들의 긴긴 프로 생애에 그건 출발점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믿기로, 어린 시절에 새겨진 날인은 평생을 관통한다. 설령 나중에 大河를 이루게 된다 하더라고 발원지의 몇 가닥 개울물이 여전히 만 길 파도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언덕을 넘었더랬다, 머린 이미 白髮(백발)이다만

 

(역주 :두 소제목, 방울방울 집념이 강물이 되다/언덕을 넘었더랬다, 머린 이미 백발이지만 -유명 대중가요 산언덕(山丘)의 가사 중 일부임)

 

기왕에 기념이라면, 기왕에 대표한다면, 대중의 첫째 관심은 두 대가의 성취이다.

  

군말 필요 없이, 조치훈은 74관왕에다 칠번기 대마왕이다. 조훈현의 전관왕 및 세계대회 9개 우승... 바둑계 전체를 훑어본다 해도 이 둘의 성취와 비교할 만한 棋士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사실 두 대가의 마음속에선, 서로 간의 비교야말로 회피 불가능한 건널목이다.

  

바둑계 일생의 라이벌을 말하자면, 제일 유명한 것이 자연 조치훈과 고바야시(小林光一), 조훈현으로선 서봉수와 수십 년 동안 벌인 조서대전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현대바둑의 발전 궤적을 살펴보게 되면, 조치훈과 조훈현이야말로 진정한 일생의 라이벌이다.

 

한국바둑계든 세계바둑계든, 겉으로든 그리고 속으로든 줄곧 조치훈관 조훈현을 비교했다. 병역 때문에 귀국한 이후 조훈현은 조치훈처럼 일본바둑의 名人이 된다는 꿈을 지속할 수 없었다. 고국에서 척박한 땅을 일군 끝에, ‘야만국 왕의 신분으로 쪼그마한 나라의 臣民이 올리는 仆伏(부복)의 예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야심은 그 정도에 그치지 않았으니, 일본바둑에 대한 집념을 절대로 내려놓을 수 없는 그였다.

  

1980년 조훈현은 한국에서 전관왕 위업을 달성한다. 그러나 그 열 몇 개의 우승컵도 조치훈이 쟁취한 일본 名人타이틀 앞에선 전혀 빛이 나지 않았다. 금의환향한 조치훈은 민족영웅이 되었고, 한국에선 바둑 열기가 타올랐다. 조치훈과 벌인 두 판 기념대국에서 완패한 후, 조훈현은 난 거의 잊혔다고 한숨을 쉬었다. 바둑 왕국을 뒤흔드는 조치훈의 활약은 한국바둑계의 雄志(웅지)를 격발했고, ‘야만국 왕또한 겉으론 대중과 마찬가지로 흥분을 표하긴 했지만, 실제 내심은 당혹과 동경으로 가득했다.

  

프로 세계대회의 창설 때가 되어서야 조훈현은 조치훈을 제대로 추격할 발판을 마련한다. 1989년 결승에서 중국의 섭위평(聶衛平)을 넘어뜨리고 응씨배를 들어 올리며, 조훈현은 드디어 한국바둑계의 민족영웅이 된다. 조치훈은 그 응씨배에서 다름 아닌 섭위평에게 져서 탈락했다. 이런 간접비교로도 조훈현은 만족했을까?

 

세계바둑왕이 된 조훈현은 조치훈과의 직접대결에서도 완전히 압도하기 시작한다. 1991, 日韓TV속기왕대결에서 조훈현은 처음으로 조치훈을 무릎 꿇린다. 그들의 이전 대결로부터 딱 십 년 만이었다. 십 년. 조훈현은 선망, 심지어는 질투로 자신을 연마했다. 어처면 그가 격파한 상대는 가장 격파하고 싶었던 바로 그 상대였다.

  

이후 조훈현은 세계대회에서 조치훈에게 7연승을 거둔다. 그중 LG배는 두 사람의 숙명의 전장이 되었다. 초창기 일곱 번의 LG배에서 두 사람은 다섯 번을 만났고, 전부 조훈현이 이긴다. ‘부드러운 바람 빠른 창으로 크게 일가를 이룬 조훈현 앞에서, 조치훈은 번번이 길을 잃는다. 실력 부족이라기보단 훈현과 만나면 대체 어떻게 둬야 하냐고라는 심리적 막막함 때문이었다 할까?

 

조치훈 역시 조훈현의 성취를 선망한 적이 있었을까? 설령 조훈현이 세계대회 우승자기 되기 전에도? 그의 말 :“조훈현이 얼마나 세냐면, 몇 판을 그를 이겼던 간에 내가 그를 이겨봤다는 자각이 안 든다.” 어쩌면, 진짜로 조훈현의 심정을 이해하는 사람은 조치훈뿐일지도 모른다.

 

2003, 8회 삼성배 8강전에서 조치훈은 드디어 하락세를 멈춘. 조훈현에게 화살 한 대를 먹임과 동시에 우승까지 차지한다. 당시 조치훈은 이미 누구나 무서워하던 마귀가 아니었다. 심지어 일본 국내에서도 지배력을 상실했다. 부담이 없어진 그가 心魔(심마)를 푸는 순간, 눈앞의 조훈현이 보통의 적이 되었다.

 

어느 한쪽도 저쪽에게 빚졌다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양대 영웅 수십 년 동안의 대결은 실력에 성취에 그치지 않고, 서로 간의 미묘한 심리에까지 걸친다.

  

이번 기념대국. 한쪽은 만판 더벅머리, 또 한쪽은 백발이 성성. 둘 다 전성기 시절 모습이 아니다. 天山萬水(천산만수), 겪어온 무수한 풍경, 그들이 내려놓은 건 또 한 번 高下를 다퉈보고자 하는 욕구일까?

 

 

영웅들의 길, 벗으로? 적으로?

 

나는 늘 조치훈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았다. 비록 그의 棋風(기풍)을 흉내 낼 순 없지만. 그리고 조치훈의 놀라운 전적, 그의 진솔함은 사람들의 흠모를 자아낼 수밖에 없다, , 한 가지 더... 연민.

  

조훈현에 대해선 좀 다르다. 감정의 요철이 있다. 그가 섭위평의 어깨를 밟고 바둑계 정상에 등극할 때, 그 후 또 각종 대회에서 계속하여 섭위평의 천적이 되었을 때, 거기다 여러 世代에 걸쳐 여타 중국 棋士들을 제압할 때, 우승컵을 들고 자못 기고만장하여 목청껏 웃어젖힐 때, 중국바둑팬으로서, 이를 악다물지 않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헌데 이창호가 빠르게 솟아올라 자기 스승을 꼼짝 못하게 억눌러옴에, 결국은 그 어디로도 숨을 곳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조훈현 또한 이해가 되고 그 기분을 알 듯해졌다. 일단 승부의 세계를 선택하는 순간, 전력을 다하여 상대를 쓰러뜨려야 한다. 우리가 인생의 잔혹함을 안다지만 누구도 그 잔혹함을 피할 수 없다. 조훈현이 50살이 되고서도 상호(常昊) 왕뢰(王磊)를 격파하고 삼성배를 연속 제패할 때, 그에게 남은 감정은 다만 존경이었다.

  

지금 다시 조치훈과 조훈현의 성취를 비교할 경우, 어쩌면 다수가 조훈현이 더 성공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근래 30년은 결국 세계대회 시대인 바, 조훈현이 획득한 영예가 조치훈보다 한참 많다. 게다가 일본바둑의 風光 또한 옛날 같지 않은 고로, 조치훈의 두 번째 대삼관 및 그 3連覇(연패)의 대단함은 이전보다 한참 못해졌다.

 

그러면 조치훈과 조훈현 두 사람의 내심은 어떠할까? 그들의 비교는 단지 개개 우승컵 비교로만 판가름되는가? 두 사람은 각각 일본과 한국 바둑 역사에서 다승 1, 타이틀 획득 1위이다. 그런데 두 나라의 바둑 환경이 같지 않은 바, 둘을 순전히 숫자만으로 직접 비교할 순 없다. 이는 펠레와 메시를 골 수로만 비교하여 고하를 가릴 수 없음과 비슷하다. 조치훈과 조훈현 둘 다 한국바둑의 발전을 이끈 공신이다. 프로 생활 서로 다른 궤적은 그들을 서로 아끼게 만들까, 아니면 서로를 인정 못하게 만들까?

  

일본 유학 기간에도 두 사람 사이의 교집합은 많지 않았다. 다른 門下, 각자의 바쁘고 고된 수업, 때문에 두 사람이 벗이 될 기회 자체가 많지 않았다. 성공을 이룬 후에도 그들의 내왕에는 어떤 거추장스러운 측면이 있었다. 직접적 간접적 적수로서 본래부터가 의기투합하기가 쉽지 않은 터였다.

 

사실 조치훈과 조훈현뿐만 아니라, 大棋士 간에는, 피차 기본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둔다. 조치훈과 고바야시가 그러하고, 조훈현과 서봉수가 그러하고, 섭위평과 마효춘이 그러하다. 이는 영웅이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고독이다. 자신의 성취가 타인을 능가하길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 , 그런 생각을 경쟁자와 공유할 순 없는 일이다.

 

, 조치훈과 조훈현은 충분히 영혼상의 벗일 수 있다. 설령 서로 간 교류가 많지 않지만 말이다. 정상에 선 자만이, 다른, 정상에 선 사람의 풍경과 적막을 안다. 그들은 한국바둑의 번창을 만들었다. 사실 많은 것이 그들 자신의 성취를 위함이었지만.

 

벗인가? 아니면 적수인가? 이게 문제는 아니다. “한 사람 병사. 전쟁터에서 죽거나,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중국의 화가 황영옥(黃永玉)이 외숙부 심종문(沈從文)를 위해 쓴 墓誌銘(묘지명)이야말로 조치훈과 조훈현 마음속의 글귀이다.

(역주 :감성 깊은 청년이 10대의 나이에 자기 의지에 반하여 병사가 되어야 했으나, 결국 살아남아 문학의 대가로 큰 성취를 이룬다한 사람 병사전쟁터에서 죽거나고향으로 돌아가거나 --- 심종문. 1902~1988. '고향으로 돌아가다'는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는데, 금의환향이라는 해석도 그중 하나이다. 또한 조-조의 '전쟁터'는 바둑판일 수도 있고 타국인 일본일 수도 있고...) 

 

수십 년의 苦鬪(고투), 문예적인 말솜씨. 조치훈과 조훈현 둘 다 인생의 참뜻을 찾아냈다. 그런데 여기 왕가위(王家衛)의 명작 東邪西毒(동사서독) 속의 대사 :“어릴 땐 무엇이든 답이 있다고 생각했지. 근데 나이가 들면 인생에 답이란 놈이 없단 걸 알게 되지. 매일 죽어라 사람들과 부대끼다 보면, 혹 어떤 놈은 벗이 되고, 知己가 되기도 한다고. 그래서 난 부대낄 기회를 절대 내버리지 않아. 어떤 땐 잘못 돼서 내 머리통이 깨질지도 모르지만, 까짓 될 대로 되라지! 좋으면 된 거야.” 그들은 진짜 어떤 답을 찾아야 할까?

 

한국현대바둑 70년 기념, 사실, 내가 더 기념하는 것은 조치훈 조훈현 두 투사의 피투성이 분전을 묵묵히 수행한 (그들의) 청춘이다.   



-人生無答, 조훈현 조치훈의 경우-         

 

 

 

:棋事 특약기자 소소풍 蕭蕭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