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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100205 정관장배 餘韻(여운)

 

졌으면 눈길조차 못 돌렸을 텐데, 이겼으니 여운이 남아서 몇 마디 남겨둔다.


박지은의 4판 바둑을 보면 네 판 모두, 시작부터 종국에 이르기까지 ‘결정적으로 불리한 장면’이 출현한 적이 없긴 하다. 그러나 모든 판이 마냥 ‘이겨야 할 판을 이긴’, 그러한 판은 아니었다. 잠시 잠깐씩이지만 위험한 순간이 분명히 있었단 얘기.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박지은이 상대보다 조금이라도 잘 둔 바둑이라고, 세계 바둑계 꼭지점의 위용을 크게 과시한 한마당이었다고 평할 순 있겠다.


葉桂(엽계)는 몇 년 전 同 대회에서 5연승을 한 적도 있다 알고 있는데, 이 엽계와의 바둑이 가장 위험했다. 박지은 본인도 가장 어려웠던 바둑이라고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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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쪽에서는 좋아질 결정적인 장면에서 실착이 나왔다고 안타까워하며 이 장면을 몇 번이나 되집는 중이다.() 장면에서 백2가 패착 '주범'(여러 패착들 중 제일 결정적인 실수), 좌하 A였으면 바로 백승 확정이라고. 즉 별 일 없는 한 백승이란 소리.
그리고 백4는 D가 바른 응수이며, 우상 F로 살리지 않고 E로 작은 두 점을 살린 수도 큰 문제수라고. 하튼 대국 당시 이 국면에서 한국의 인터넷 해설자 이민진도 많이 깝깝해했는데, 그러면서 말을 아끼더라만,...


결정적 장면에서 어이없게 둬버린 이유를 중국 측은, 판수 부족이 불러온 엽계의 실전감각 부족 때문이라 분석.


엽계와의 대국 후 박지은은 잠시 휴식 후 바로 특별대국을 두게 된다.

이 바둑을 두는 박지은의 상태와 마음가짐을 주의 깊게 묘사한 記事(기사)가 여럿 있는데 그중 사예 기자의 묘사를 소개한다.


박지은 하루 두판, 기색을 보니 극히 피로, 국후 唐奕(당혁)이 농담조로 말하길, 박지은이 전 판에 걸쳐 줄곧 '막두더라'. (원문 표현 難下, 下는 둔다는 의미). 하나 확실한 건, 깊은 피로감의 朴은 특별대국에 정력을 과다 소모하여 다음 날 중국 주장 李赫(리혁)과의 대결에 영향이 오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지고 나서 朴은 마치 무거운 짐을 벗어던져 버린 듯, 대국을 마치고 나가더니 뭇 사람들과 웃으며 담소를 즐겼다. 이 바둑 패배의 아픔 따위는 결코 마음에 둔 적 없는 듯했다. 후에 보자면 그의 이 일초는 효과가 있었다.(기자 謝銳, 체단주보體壇周報 )


박지은은 소원대로 컨디션을 그럭저럭 맞추어, 다음 날 그의 내심과 한국 팬들 진심 소망의, 즉 이심전심으로‘총구를 맞춘' 대국을 맞이한다. 상대인 李赫(리혁)은 바로 작년 이 대회에서 3연승으로 대회를 마감시켰으며, 당시 박지은은 그 희생자 중 하나였다. 이름하여 외나무 다리 위 복수전.
우리가 이런 건 찐하게 갚아드려야 하는 뎅~


프로들의 평가에 의하면 최종국은 세계 여자 바둑을 주도하는 두 사람의 대국이라서, 수준이 높은 한판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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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쪽 분석에 의하면 장면도처럼 두었으면 매우 좋았다. 그들은 흑의 저 회심의 수에 ‘신의 손’(원문은 神來之筆 대강의 의미는 ‘신의 붓’ 정도 )이라 이름 붙였다. 아닌 게 아니라 下 중앙 일단의 백 몇 점이 활로가 보이지 않는다.

아 이 맹탕도 눈 밝은 날이라면 저런 수 두어낼 지도 모리는 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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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수가 지났다. 그리고 위 장면에서 승부가 났다. 국후 리혁 본인의 말에 의하면 ‘초반에 축머리 착각이 있었고 이 여파로 시간을 많이 써버렸다. 그래서 나중에 (시간이 없어서) 수읽기가 안 되었다.’


장면을 보면 일단 흑1이 실수이긴 한데 그래도 결정적이진 않다. 백2에 밑으로 치면 별다른 수는 없고 그냥 끝내기 정도일 뿐이니까. 그런데 흑은 돌연 흑3으로 ‘어서 날 잡수’에 가까운 선문답?..아니 동문서답을 해버리는데,


‘그냥 백의 의도대로 당해주어도 이긴다’하는 자신감이 만약 있었다면 저런 돌발수가 나올 리 없다. 즉 리혁은 긴박한 와중에 형세를 비관하다, '아 이거 어쩌면 마지막 찬스' 이러면서 중앙 공격에 올인을 선택하지 않았나...
그게 그런데, ‘그기 그거이 아니었다’는.. 그런, 맹물의 분석이다. 믿거나 말거나. 

이후는 박지은의 독무대.


'화살 3개'를 가진 '배부른' 중국 팀, 이 3명의 출격 순서가 어떻게 될까, 이것도 하나의 ‘조용한 관심사’였다. 그 경위는 이랬다. 중국 국가바둑대 총감독인 兪斌(유빈)과 여자바둑대 감독인 王磊(왕뢰) 둘이 토론 끝에 리혁을 주장으로 결정하였다고. 부연 설명에 의하면 리혁이 아직까지 주장의 압박감을 겪은 바 없다, 때문에 이번에 한 번 체험케 한다는 의지였다고.()


중국의 신경질적인 반응 하나. 이번 쾌거에 한국 매체인 한게임 記事(기사)는 ‘大捷(대첩)’이란 표현을 썼다.()
이에 중국 어느 기자가 이 제목과 기사 내용을 그대로 번역 소개하며 ‘한국 매체의 사람 엄청 놀래키는 제목’이라며, 마뜩찮아하는 속내를 풍겼다.()


기쁨, 환희에 겨운 한국 팬들만큼이나 중국 팬들은 많이 많이 억울하리라. 그래도 나름 냉정한(?) 찬사를 바치는 중국 팬이 있다. ()


중일 슈퍼대항전에서의 섭위평의 쾌거, 응씨배에서의 조훈현의 예상외(중국 棋友(기우) 나름의 표현인데, 이 표현을 보는 '어느 한국 팬'은 이 표현이 무척이나 억울타! 예상외라니 떾!) 쾌거가 한국과 중국 그리고 세계바둑계 전체로 보아 일종의 경사였다. 마찬가지 논리로 박지은의 온힘을 다한 역전 우승은 한국 바둑과 세계바둑계 전체로 보아 경사라 할 수 있다, 해서 박지은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나름 흉금을 털어놓은 이 문장에, 일부 중국 팬들까지 덩달아 흉금을 털어놓으면서 ‘오! 좋은 글이오’ 이러면서 노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