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은 독하지. 독하다는 건 뭘까. 간단히 말하기 쉽지 않은데, 하나 확실한 건 독하기 위해선 에너지가 필요해. 독해지려면 어느 순간 에너지를 쥐어짜야 한다고. 선천적으로 독종이라고 해도 이 점에선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해. 이세돌이 선천적 독종인 건 인정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그런 이세돌도 그 지독함을 지속하기 위해선 에너지가 필요한 거지.
문제는 그런 에너지가 그냥 펌프에 물 쏟아지듯이 쏟아질 수는 없잖아. 내가 보기엔 이세돌 본인도 그걸 알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기만해. 무슨 말이냐면 스스로에게 숨 쉴 구멍을 준다는 거지. 숨 쉴 구멍이란 패배에 대한 변명, 합리화이지. 독하게 달려들었는데 실패했을 경우를 생각해봐. 타격이 매우 크지. 이세돌은 그런 충격을 감당하기 버거웠던 거야. 사람은 그런 버거움을 벗어날 숨 쉴 구멍을 찾아야 한다고. 그는 자기 자신을 기만함으로써 찾는 거지. 그런 방법이 뭐냐, 바로 버리는 거야. 그런 식으로 초창기 이세돌은 번기 안에서 판을 버렸어. 이세돌 초창기에 번기에서 이세돌이 1국을 이기고 2국을 버린 예가 많아. 그런 2국은 도대체가 이세돌답지 않은 판이 대부분이지. 그런 태도가 극명하게 드러난 예가 2004년 삼성배 준결승 고력(古力) 상대 3번기 2국이지. 1국을 쾌승했으면 2국에서 끝낼 생각을 갖는 게 인지상정인데도 이세돌은 고력이와 투닥투닥 돌나르기를 하면서 2국을 버렸지. 화살이 두 개면 두 번을 과녁에 겨냥해봐야지 왜 굳이 화살 하나를 땅바닥에 팽개치냐고. 당시 난 그런 태도를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런 식의 조절이 이세돌만의 부담 조절이란 걸,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 부연하자면 2국에서 맘먹고 달려들었다가 실패했을 경우 그 충격을 안고 3국에서 또 달려들어야 하는데, 그런 식의 에너지 분산을 이세돌은 감당할 수 없었던 거지. 상대는 강적이거든. 그래서 나름 선택과 집중을 하는 거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렇게 고력을 이기고 올라간 결승에선 2국을 버리지 않았어(물론 1국 이겼지). "2국에서 끝내겠다" 말하고 실제로 끝냈지. 왜 그랬냐. 상대가 만만했단 거지. 큰 에너지가 필요한 상대가 아니란 얘기거든. 그런 이세돌이, 이세돌. 이런 든든한 것 같으니라고 ㅋ
09년 고력과의 LG배 결승 3번기, 그 패배를 내가 이해하기로는, 緣由(연유)를 알 순 없지만 이세돌은 패배의 불안감 비슷한 감정에 휩싸였어. 이세돌은 포효했지, 실상은 안절부절, 마치 우리 안의 맹수가 그런 불안감에 우리를 빙빙 돌듯. 한밤의 택시 사건. 이세돌의 내면을 누구도 알 순 없는 거고. 그 자신조차 알까? 어쨌든 외부로 드러난 모습은 일생일대의 적수를 앞에 두고 마음 다스림에 실패한 모습이었어. 좌충우돌. 한국기원이 아무리 미워도 자기 발등을 찍어대는 짓(출전 거부)은 일생일대의 적수를 맞이하는 모습에선 승부사로선 실격이지. 독한 사람이 왜 그랬을까? '4천년之爭', 기자는 기자 임무로 썼겠지만, 자기 스스로에 대한 부담 및 상대인 고력과의 상호 간 부담에다가, 외부에서 쬐끔 더 얹어준 '4000년의 부담'까지, 이세돌은 이 모든 걸 다 짊어져야 했지(톱 승부사의 숙명이지). 이세돌은 무서웠던 거지. 독한 사람도 두려움 앞에선 커다란 에너지가 필요해. 이세돌은 그거 극복에 실패한 거고. -지금 하는 이야기지만 이세돌이 이후 그 패배를 극복 못했다면 앞으로 4000년 동안 '4000년之爭' 소리 들을 뻔했다고. 대략 2,3년 지겹게 들었다. 이젠 조용해졌지. 얼마나 다행이니.
아주 옛날에 ‘작은 아씨들’이란 소설을 읽었어. ‘작은 아씨들’이란 딸 넷이고 그 딸들을 키우는 어느 자애롭고 현명한 어머니가 주인공인 이야기였어. 어느 날 딸들 중에 막내가 엄마에게 물어. 구체적으로는 기억이 안 나는데 대충 이래.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항상 감정을 잘 다스려요?’애가 엄마가 흥분하는 모습을 도통 본 적이 없거든. 그래서 엄마 대답이, ‘아니란다, 겉으론 드러나지 않을 뿐이란다. 속은 그렇지가 않아’,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지. 딸이 더 캐물어서 나온 말인지도 모르겠어. ‘사십 살이 되니까 표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어. 표정을 다스릴 수 있으니까 행동도 어느 정도 조절이 되더구나’, ‘훗날 팔십이 되면 마음도 다스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걸 읽으면서 생각했어. 나도 사십이 되면 그런 경지가 될 수 있을까... 사십 넘은 지 한참 지났지만 아직 어림도 없지. 팔십이나 되면 이 훌륭한 어머니의 사십 나이를 흉내 낼 수나 있을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런 사십 나이 팔십 나이를 아예 타고난 거야. 그런 사람이 누구냐면 바로 이창호지. 25년 전에 이창호 초창기에 많이 들었던 소리가 바로 80 노인이란 소리였어. 이 사람은 도대체가 어떤 상황에서도 미동도 없거든. 표정도 그렇고 반응도 그렇고. 石佛이란 소리가 괜히 붙은 게 아니란 말이지. 다른 말로 無心(무심). 그 내면은 전혀 안 그렇겠지만, 겉으로 보면 이창호는 속이 없어. 걍 無心해 보여.
사람이 자기 모습 그대로 있는 게 더 힘들겠어? 무언가 모습을 변화시키는 게 더 힘들겠어? 두 말 할 필요도 없지. 그러므로 독해지기 위해선 에너지가 필요하고 無心한 사람은 걍 無心한 거야. 별도로 에너지가 필요 없어. 이세돌은 독해서 독하고 이창호는 無心해서 독해. 독함은 뒷면은 여림인데, 無心은 뒷면도 걍 無心이야. 그래서 최고의 독함은 無心이야. 이창호 바둑은 단순히 棋譜로만 접했을 때는 진면목을 못 느낀다고, 직접 둬봐야 실체가 다가온다고 하지. 유명한 말이 있잖아. 조훈현이 조치훈에게 말한, “둬보라고, 둬보면 안다고.” 이창호란 인간의 에너지는 대면했을 때만 느낀다는 말이거든. 이세돌은 棋譜에서 즉각 그 독랄함이 다가오지. 어떻게 보면 이세돌은 그의 바둑 스타일 때문에 인간됨의 독함이 증대 평가되는 측면이 있지. 물론 이창호는 그 반대고.
박정환 원성진 백홍석 김지석 박문요(朴文垚) 강유걸(江維傑) 시월(時越) 주예양(周睿羊) 범정옥(范廷鈺) 진요엽(陳耀燁) 당위성(唐韋星) 미욱정(羋昱廷) 타가희(柁嘉熹) 가결(柯潔)
세어 봐. 열 넷이야. 최근 세계대회 우승자지. 그리고 다들 일관왕이지. 다음 달이면 2관왕이 나오겠지만, 그렇다 해도 저 열 넷은 고만고만하다고 할 수밖에 없어. 다들 高峯(고봉)인데 아직은 아무도 특출하지 못해. 아직은 그냥 8000미터 급 高峯이야. 이창호 이세돌 그리고 고력까지, 9000미터, 10000미터 가는 마리아나 海溝(해구) 급은 미래는 몰라도 아직은 아니지.
내가 보기에 박정환의 위상은 14좌 중 에베레스트 급이야. 그에게 불만이 있는 사람도 14좌 중에 세 손가락 안에는 넣어줄 거야. 그런데 문제는 에베레스트 정도가 아니잖아. 마리아나가 되어야 하는 게 박정환의 운명이고 의무이거든. 적어도 그들과의 비교만큼은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야. 박정환은 9000미터를 넘을 수 있을까?
박정환의 대표적인 사진을 보면 눈매가 날카롭고 독해. 그런데 그의 내면도 그럴까? 나는 아니라고 봐. 뭐 보통 棋士보다야 한참 독하겠지만 내가 비교하는 건 9000미터, 10000미터 급이잖아. 오히려 같은 8000미터 급끼리 중에서도 중간이나 갈까 의심스러워. 응씨배 결승 4국 당일 새벽에 잠 안 온다고 인터넷 들어오고 -이런 건 이세돌 야밤 택시 사건에 버금가는 거야. 평소 인터넷 대국 즐기는 건 좋지만 대국 곁다리로 껌값에 불과한 사이버머니에 집착하는 모습 -그런 식으로 쓸데없이 매를 벌거든. 인터넷에서 패배한 후 분을 삭이지 못하고 연짱 대국 벌이며 분을 풀려 드는 모습들, 그렇게 되면 놀이가 아니라 노동이거든.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란 말이지. -보면 자기 마음을 조절을 못해. on에서나 off에서나. 조절을 못하면 외부에 감추기나 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해(응씨배 종국 후 장면 사진을 봐 -속상하지). 가결도 박정환 만나 두렵다고, 그렇지만 그는 그런 내면을 절대 남에게 보이지 않지. 그런 게 눈에 보이니까 技術(기술) 면에서 딸리는 당위성 같은 애들도 만만히 보고 달려드는 거지. 그런 모습에 一新(일신)이 있어야 해.
14좌를 적었는데 한국 쪽엔 사실 朴,金이 다지. 중국 쪽은 8,9명이고. 그렇다고 한국에 7000미터 급이 많냐, 개뿔~ 7000,6000은 더 딸리지. 타이젬 20초 바둑을 봐. 한국 신예가 중국 신예에게 배당 밀어붙이는 경우가 얼마나 있는지. 한국 棋士가 배당 미는 경우는 박정환 말고는 조한승 박영훈 원성진 최철한 강동윤... 이런 ‘늙은이’밖에 없어. 김승재, 나현이나 안성준이 그나마 반반 배당에 가깝고. 이세돌은 신예 누구누구를 기대한다는데 난 타이젬만 보면 도대체 누굴 기대해야 하는지 답이 안 나와. 利民배지? 작년에 열렸던 신예기전. 그것도 일종의 통합예선을 거쳐 본선명단(총 24명)을 뽑았는데, 통합예선 거쳐 뽑히는 열네댓에 한국은 고작 둘 들어갔지(그것도 1차가 아닌 2차로). 손꼽히는 신예들이 총 출전해서 말이지. 이게 한국바둑의 미래야. 10년 정도 후면 삼성배 LG배 백령배 등 통합예선이 작년 리민배 꼴이 날 거야. 국가 시드는 좀 받겠지만 그때는 그것도 일본 후지쯔배 시드 꼴 나겠지. 국가 시드 왕창. 1,2회전 탈락 와장창. 대략 4강이면 전멸. 그래도 한 가지 의지가 되는 구석은 대표팀이 본격 출발한 게 이제 1년이라는 거. 작년의 그런 ‘대표팀 효과’를 지속적으로 보여만 준다면,... 이게 한국바둑의 운명을 어느 정도나 바꿔줄지...어느 정도는 기대를 해.
절대 그럴 린 없겠지만 설령 박정환이 세계대회 우승 한두 개로 그친다 해도, 한 10년 후면 사람들은 ‘국내용’ 박정환을 그리워하게 될 거야. 아 그때 박정환이 사실은 국제용이었네..... 그러면서. 배가 부른 거지, 지금은. 그나마 욕 먹어가며 4강이라도 가는 박정환마저 없다면 그냥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무서운 침묵만 남겠지.
김지석이야 뭐 나이가 있으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 공걸(孔傑) 정도는 해줄 거라 보지만... 어쨌든 기대할 사람은 박정환밖에 없어. 그러자면 박정환이 각성이 필요해. 技術이 되었든 정신이 되었든 각성해야 하는데, 완성형 바둑이라 技術의 진보는 이미 갈 데까지 간 거 같고 -朴을 상대로 우월한 내용으로 이겨가는 棋士는 이미 거의 없었어. 朴이 패배하는 바둑은 대개가 자멸에 가까웠지- 내면적으로 강해져야 하는데, 그 옛날 오청원은 10번기를 나가며 신변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바둑만 생각하자, 바둑만 생각하자’ 자기암시를 주고 나갔다는데, 명상을 하던 마인드컨트롤을 하든 뭘 하든 박정환도 그런 경지를 지향해야 해. 9000미터, 10000미터 가려면 그런 경지가 필수 아니겠나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