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위평 棋才 뛰어나 - 본래 더 멀리 갈 수 있었다
출처 :사경 용일(思瓊 容逸) 棋事-새물결체육(新浪체육) 2015.05.15. ☜
***棋事란 새물결체육 內 바둑을 취급하는 일종의 팀인 듯하다. 棋事는 근래 일 년이 채 못 되는 시간 동안 수십 건의 바둑 관련 인물 인터뷰를 게재해왔다. 이번 인터뷰도 마찬가지이다.
들어가는말: 그에게 찬란한 시절이 있었다, 다만 그는 기껍게 자신의 눈부신 빛발을 거두어들였다. 사실 우리 세대는, 앞선 세대가 마치 붉게 달군 인두로 파란만장 세월에 새겨 남긴 듯한 흔적과, 시대를 가름하는 얘기들을 평가할 자격이 없다. 그러한 휘황, 일찍이 존재했던 그 꿈들은, 이제 다만 하나하나 모이어 하늘에 펼쳐진 흑백 바둑판 위 빛나는 별이 되어 이 시대 棋士 각각의 앞길을 내리비춘다. 당년에 섭위평(聶衛平)과 공상명(孔祥明), 한 쌍 玉(의 결합)은 확실히 바둑계의 一大 慶事(경사)였다. 그들은 원래, 각자가 정상으로 향하는 길을 달리는 중이었다. (둘의 결합으로 인하여) 누가 누구를 밀고 이끌었는지를 말할 순 없음이고, 다만 각자의 선택 모두가 바둑 두는 자 심사숙고 후의 (최선의) 일착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단지, 좋았던 만남은 그 좋았던 대로, 갈라섬은 그 갈라섬대로, 그저 그랬을 뿐, 여인으로서 말한다면, 공상명은 말한다, 영원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응당 自我認定(자아인정)과 自己完成(자기완성)이라고. 그는 당시를 후회하지도 않음과 동시에, 젊은이들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기를 바란다. 紅塵(홍진)은 마치 바둑판 같은 바, (행위의 결과로서 드러나는) 득과 실은 억지로 구할 수 없음이 언제나 그러하다. 일체를 자연 그대로에 순응함이 좋다.
공상명, 1955년 9월生. 사천(四川) 성도(成都) 출신. 중국바둑 제1호 프로 八단.
1978, 1979, 1984년 전국바둑개인전 여자부 우승 3회. 동 대회 첫 우승자.
1981, 1984년 國手전 5위, 6위.
1974년 중국팀 일원으로 일본 방문. 7명의 일본 일류 여자 棋士와 겨루어 7전 전승.
1978년, 일본 여자바둑 우승자 고바야시(小林千壽) 五단과 두 나라 여자 첫 정식 대결. 3전 전승.
1980년, 일본 九단 棋士 미나미(南善已)에게 승리. 중국 여자 棋士로서 일본 九단에게 거둔 첫 승리. 일본 ‘명예본인방’ 사카다(坂田榮男), ‘중국의 여자 오청원’이라고 평가.
2012년 제1회전국여자국수전에서 57세 공상명이 27년 만에 우승. 세상을 놀라게 하다!
오로지 내 앞가림
棋事(이하, 問) :한동안 소식이 없었다. 님의 근황을 말해준다면?
공상명(이하, 孔) :내 나이 올해 耳順(이순;예순)이다. 때문에 생활이야 단순하다. 호호 즐겁게 사는 할머니에 불과하다. 남들은 나를 두고 우스개로,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고들 말한다. 좋게 말하자면 칭찬이고 반대로 보자면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다는 소리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 그리고 가족에게 일정한 책임과 의무가 있다. 더욱이 젊은 시절에는 목표와 이상이 있어야 한다. 현재 나는 이미 그러한 재능과 정력이 없다. 때문에 가족 친지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만들어주기만 해도 나로선 임무를 다한 셈이다. 이런 식으로, 설령 내가 사회의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주위에서 내 일을 처리해준다. 아무 능력도 없는 때에는 자기 앞가림이라도 잘해야 한다.
일본 추월
問 :당신은 바둑가문 출신이다. 어린 시절 부지불식간에 바둑에 물들게 된 일화를 얘기한다면?
孔 :아버지는 줄곧 바둑을 가르쳤다. 기억하기로, 학교 들어가기 전 한동안 나는 하루 종일 아버지만 따라다녔다(= 아버지가 바둑 가르치는 광경 하루 종일 구경). 어떤 때는,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서 마치 장난감 놀 듯 바둑돌을 판 위에 늘어놓아보곤 했다. 내가 복기를 할 줄 안다는 얘기를 처음 듣고 아버지는 믿지를 못했다. 후에, 아마도 확인해볼 요량이었겠는데, 아버지가 복잡한 정석 하나를 늘어놓았는데, 내가 단번에 기억할 줄은 생각도 못했을 거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는 (자식의 재능을) 알게 되었는데, 사실 바둑 입문이란 아주 어릴 때 시작되어야 한다.
問 :후에 어떻게 바둑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지?
孔 :내가 바둑을 배우기 시작한 지 채 2년이 못 되어 문혁이 시작됐다. 바둑 학습도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다행히 이전에 어른들의 세례로 얻은 바둑 기본지식은 충분했다. 당시 나이가 어리긴 했지만 이해가 되진 않았는데, 사간이 흘러가면서 원래 이해가 되지 않던 것이 차츰 이해되기 시작했다. 문혁 이후 나의 바둑 실력은 오히려 진보했다.
1972년, 중국은 모든 것이 어지러웠다. 이듬해, 일본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했고, 바둑이 다시 무대 위로 올라온다. 각지에서 바둑 새싹을 뽑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나 또한 다행히 바둑의 길에 정식으로 들어섰다.
당시 陳원수(陳毅진의)가 '바둑 일본 추월'을 제의했다. 우리들 또한 줄곧 이러한 꿈을 품어왔다.
원망도 후회도 없다
問 :후에, 확실히 당신은 그 꿈을 실현했다. 그런 시절에, 당신은 일본의 여자 棋士들을 완전히 제압했고, 또한 일본의 九단 棋士에게도 승리하였고, 여자 바둑에서 당신의 시대를 열었다. 님 생각에 어떤 이유로 당신의 棋力이 폭발했을까?
孔 :당시 나의 그런 성적들은 선배어른들의 도움과 큰 관계가 있다. 진조덕(陳祖德) 선생으로부터 시작해서, 王老(왕여남 王汝南) 華老(화이강 華以剛) 섭위평 이런 수준 높은 棋士들이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남자 棋士들과 같이 훈련하면 자기도 모르게 그들의 棋風(기풍)에 물들게 된다.
問 :당신의 당시 성적을 돌아보자. 느낌이 어떠한지?
孔 :그 시절은 비록 名利(명리)상의 소득은 현재와 비할 바 아니며, 棋士의 성적도 사람들 누구도 알지 못했겠지만, 우리들의 마음은 충만했다. 우리들이 추구한 것은 자기 가슴 속의 꿈이었다. 원망도 후회도 없다.
問 :당시의 여자 棋士로 또 누가 있을까?
孔 :나와 같은 나이로는, 진혜방(陳慧芳)이 있었고, 그 바로 아래로 양휘(楊暉) 예내위(芮乃偉) 화학명(華學明)이 있었다. 어떤 때는 사람들이 자주 나를 예내위와 비교하곤 했다. 예내위가 두각을 드러낼 즈음에 나는 남편과 아이 뒷바라지에 바빴고, 기본적으로 일선에서 전력투구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의 棋才는 나보다 강력하다. 나이로 봐도 그는 나보다 열 살 가까이 어리다. 때문에 다른 년대의 인물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필요가 없다.
遺憾(유감)
問 :때로는, 어떤 문제는 회피할 수 없다. 聶선생 관련 일이다. 聶선생은 中日슈퍼대항전에서 바둑계를 뒤흔들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그 시대의 영웅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신은 그가 더 높은 고도에 이를 수 있었다고 여긴다. 왜 이렇게 말하는지?
孔 :사람마다 바둑에 대한 이해는 같지가 않다. 바둑에 대한 나의 이해, 그리고 섭위평에 대한 나의 이해로 보았을 때, 그의 棋才는 예사롭지 않다, 본래 그는 더 멀리 갈 수 있었다. 당시에, 그와 같이 했을 시절에, 나는 기꺼이 나 자신을 버렸다. 사실, 후에야 나는, 젊은 시절엔 역시 자기의 일과 이상을 固守(고수)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지만.
섭위평의 棋才 는 보기 드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얼마만큼의 휘황함이 있었든지 간에 결국 사람에겐 각자 결함과 부족함이 있게 마련이다. 때문에 그의 棋才가 충분히 발휘되기 위해서는 안정된 환경이 필요하다. 그런데 또 누구나 다 자기의 행복과 애정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반드시 나를 계속 선택했어야만 그가 발전이 있었을 거다, 이런 말이 아니다. 어쩌면 다른 여인이 그에게 더 적합하고 더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은 바둑을 모르는 고로, 아마도 바둑 안에서 그를 격려하고 이해하기란 조금 더 어렵지 않았을까. 때문에 섭위평은 슈퍼대항전 이후 더 이상 자기의 재능을 계속 발휘하지 못한 듯하다.
이것이 그에게의 유감이고 또한 우리 바둑계를 향한 유감이다.(유감;미안함) 다행히 후배들이 매우 뛰어나서 바둑계의 많은 영광을 이뤄냈다. 나의 유감을 메워준 셈이다.
問 :당신도 당시에 여자 바둑의 영광을 만들어내었다. 이런 영광이 聶선생이 바둑에 끼친 영향력과 어떻게 다르다고 보는지?
孔 :정확히 말했을 때 그의 영향력이 훨씬 크다. 전통적 관념상 결국 남녀 간에 차이가 있다. 때문에 여자의 성적은 무슨 대단한 일거리가 못 된다. 게다가 그 시대에 바둑은 본래 비인기종목이었다. 슈퍼대항전 이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둑을 몰랐다.
자아완성을 포기해선 안 된다
問 :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생활상의 어려움을 마주하여 마음속으로 겪어나가야 했던 고충은 한층 더했을 듯하다. 한 사람의 여인으로서, 무엇이야말로 여인이 견지해나가야 할 것이라 보는지?
孔 :결혼의 해체에는 양쪽 다 책임이 있다. 당연히 책임에도 주와 종의 구분이 있다. 다만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여성은 절대 자기완성을 포기해선 안 된다. 만약 제자리에서 정체되기만 한다면 금방 쌍방의 격차가 생길 것이다. 여인이 누군가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게 될 때엔, 쉽게 자기를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전력으로 뒷바라지하게 된다. 당연, 이것이 뭐 착오는 아니다. 헌데 사람과 사람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의 상호융합과 영혼의 의기투합이다. 성공적이고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다면, 반드시 자신을 충실히 함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충분한 지식과 교양을 가져야 한다. 이게 여인의 필수과목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원하지 않은 결말을 맞게 된다. 여자로서 말하자면, 활달함 이해심 관용...이런 품성이 매우 중요하다.
이혼 당시엔 젊었기에 나 또한 원망이 컸다. 다만 후에 계속 반성했는데, 어쩌면 어떤 부분에 그에 대한 요구가 과도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들 그때 시대의 가치관은 노력과 분투였으므로. 헌데 시대가 점점 바뀌면 상대방과 소통하는 방식도 바꿔야 한다. 융통성 없는 강경한 태도는 상대방을 더 멀리 밀어낼 뿐이다. 당시, 아마도 그는 매우 피곤해서였을 거다.
問 :어떤 한 사람의 인생 경험이 바둑에 대한 이해와 棋力 제고에 도움이 된다고 보는지?
孔 :누구나 끊임없이 자기 수준을 높여야 한다, 이게 중요하다. 앞 世代 棋士들을 예를 들자면, 陳老(진조덕 陳祖德), 王老(왕여남 王汝南) 華老(화이강 華以剛)... 그들은 다 책을 많이 읽었다. 陳선생은 도덕경을 줄줄 외울 수 있다. 오청원 선생은 四書五經(사서오경)에 아주 빠삭한 수준이다.
바둑의 승부가 중요하지만 그것의 문화적 심층 또한 무시해선 안 된다. 설령 세계대회 우승자라 해도 자기 바둑 수준을 새로이 끌어올리고 싶다면 자기 자신의 수준 또한 반드시 그만큼 제고해야 한다. 이러한, 수준의 상승이 반드시 독서에 의해서만 이르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의지만 있다면 주위의 만사와 만물이 다 우리의 스승이다.
棋藝(기예) 추구에 더 중점
問 :방금 문화上의 일을 얘기했다. 일본에 오래 머무른 바 있는데, 중국과 일본의 바둑문화에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孔 :일본의 전통은 棋藝(기예) 중시이다. 예를 들어, 이 한 手면 이기는데 단지 모양이 추하다 했을 때, 일본 棋士는 차라리 그 한 手를 버리고 다른 예쁜 길을 간다. 어쩌면 그 때문에 판을 이기지 못할지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까워하지 않는다. 이 측면에서 일본의 많은 棋士들이 추구하는 것은 바둑의 미학과 예술성이다.
현재의 바둑은 실전을 중시한다. 효율적이고 이길 수만 있다면 아무리 추해도 상관 않고 둔다. 이게 시대의 대세이긴 하다. 따라서 일본도 현재 천천히 승부 방면으로 돌아서는 중이다. 그렇긴 해도, 비교적 기예 추구를 중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問 :그쪽으로 간다면 이길 수 있는데 왜 안 둘까?
孔 :그들 생각은, 승부가 다는 아니다. 두면서 바둑의 예술성도 추구한다. 형태가 아름답지 못하면 그들의 바둑에 대한 이해를 훼손하게 된다. 바둑이 세상에 남기는 것은 棋譜(기보)이다. 棋譜를 감상할 때 한 手 한 手 늘어놓게 된다. 만약 그런 추한 모양이 남겨진다면, 그건 棋士로서 심적으로 용납하기 곤란하다.
問 :승부와 내용은 당연히 통일적이야지 않겠는가?
孔 :당연히 융합 가능하다. 둘은 다 극단으로 갈 순 없다. 다만 예쁘게 이기는 것과 추하게 이기는 것은 결국 다른 개념이다.
후지사와 선생의 착오
問 :일본 棋士 중에서 후지사와(藤澤秀行) 선생이 당신에게 남긴 인상도 그러한지?
孔 :승부처에서 후지사와 선생은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최대한 국면을 자기가 장악하여 그런 추한 手를 회피하려 했다. 그는 화려한 바둑을 둘 줄 알았고 이겨도 멋지게 이기려 했다. 허나 바둑은 千變萬化(천변만화)라, 상대방이 기어이 어지럽혀 올 경우엔 때로 愚形(우형)을 둘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어떤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상황에 맞추어 변화하라고 말할 수 있다.
問 :후지사와 선생과 관련하여 깊은 인상이 있다면?
孔 :후지사와 선생은 나의 은인으로서 마치 부친과 같다. 내 아들이 바둑을 배우기 시작하여 프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기본적으로 다 그의 보살핌下에서다.
다만 나에 대한 그의 애정은 일종의 착오였다. 그는 내가 바둑에 타고난 재능이 있고, 다시 바둑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선생은 깊이 실망했다. 결국 선생은 후에 그의 희망을 나의 아들에게 걸었다.
問 :당시에 왜 바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나?
孔 :역시 인생의 변고를 겪은 직후였기 때문이다. 당시에 나는 충격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생각은, 내가 결혼 때문에 바둑을 포기하고서, 결혼이 실패하자 바둑으로 돌아온다?, 이건 바둑에게 미안한 노릇이었다. 또한 자신감도 없었다. 그 외에 당시 아들이 성장기라서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결국 다시 두지 못했다.
보람
問 :우리는 당신의 아들도 인터뷰했다. 그는 자기에겐 뛰어난 어머니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中日문화교류 관련 사업을 적극 행하는 중이다.
孔 :어떻게 말하든, 나는 아들을 일본에서 키운 셈이다. 때문에 나는 中日 두 나라에 감정이 깊다. 中日 국교, 민간 상호 이해 및 우호 기초는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현재 공령문(孔令文)이 하는 일련의 일은 의의가 아주 크다. 나 또한 늘 그를 격려하고 지지한다. 다만 내 힘에 한계가 있는 바, 기본적으로 그에게 별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나는 그에게, 몸이 허락하는 한 최선을 다해라, 고 말한다.
다만 세상사 늘 원하는 대로 되지 않기 십상이다. 어떤 경우 오랫동안 애를 썼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원래 잘 기획해온 활동이 도로아미타불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일이든 天時 地利 人和가 필요하다.
問 :가정사로 돌아가 보자. 現 부군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지?
孔 :그는 현재 사천(四川)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우리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비슷해서 공통 화제가 많다. 부부 사이 늘 이해하고 포용한다. 우리 나이에 이르면 부부란 친구이며 가족일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경우 정신적 반려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세상의 모든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아껴야 한다.
생활 중 일부분
問 :반평생 바둑을 두었다. 가장 깊은 인상이 무엇일까?
孔 :바둑은 내 생명의 일부분이다. 바둑 말고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사회의 사교에도 서투르다. 바둑은 내게 일종의 반려자, 바둑으로 내가 한 분야 재주를 가질 수 있었고 바둑이 나 자신과 아들을 먹여 살렸다. 이런 차원에서 바둑은 또한 나의 은인이라 말할 수 있다. 바둑이 나에게 준 것은 많다, 다만 내가 보답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적다. 나는 바둑에게 매우 고맙다!
問 :당신이 바둑에서 얻은 최대의 수확은 무엇인지?
孔 :어떤 일도 순리대로, 억지로는 안 된다. 바둑에는 많은 변수가 있다, 만약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하려다간 어김없이 一敗塗地(일패도지)할 것이다. 먹을 수 없는 돌을 기어이 먹으려다간 자기가 먹혀 붕괴할 뿐이다. 때문에, 실력과 판의 변화에 맞추어 최선의 착수를 찾을 줄 아는 자가 잘 두는 자이다.
인생 또한 이러하다. 무엇이든 간에 자기 것이 아니라면 손을 놓아야 한다. 인생 최선의 한 手는, 자신의 깨달음 인생관 가치관에 의해 정확히 선택되어야 한다.
인터뷰 :思瓊사경 容逸용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