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한 朴에게 칭찬을 // 험난했던 2관왕 길, 선배들에 못 미치는 支配力
출처 :소소풍(蕭蕭風) 여우찾아라체육(搜狐체육) 2015.02.12 ☜
2월12일, 제19회LG배결승삼번기 결승국에서 박정환이 고전 끝에 김지석에게 흑1집반승하여, 소원하던 대관식을 올렸다. 박정환은 이번 우승으로 자신의 ‘한국일인자’ 지위를 공고히 함과 동시에, 한 떼의 ‘일관왕’ 무리에서 가장 먼저 탈출하였다. 그리하여 羊의 해가 임박한 이 즈음에 세계바둑계 젊은 棋士 중의 ‘선도 羊’이 되었다.(역주 ;원문의 ‘領頭羊령두양’은 자구 그대로의 의미 -羊 행렬 맨 앞에서 선도하는 羊- 와 함께 '지도자 선도자 리더'라는 비유적 의미를 갖는다.)
지난 두 판에서 일 대 일, 쌍방 각 한 판씩 명국을 두었으니, 그 실력과 상태가 막상막하라 할 만하다. 결승국, 최후의 대승부에서 더 평상심을 유지하는 자가 2관왕이라는 영광에 더 다가서리라. 백을 든 김지석이 포석과 중반전에서 좋은 흐름이었으나 ‘필승’이라는 부담으로 지나치게 신중해졌고, 온건한 마무리로 승리를 얻고자 하였지만 결국 박정환의 사나운 반격을 당하여 전세가 역전되었다. 끝내기 단계에서 실수를 주고받은 끝에, 결국 강자의 운이 더 강했고 박정환이 승세를 장악, 미세한 승리를 거두었다. 최후의 순간 김지석이 완강히 저항하였지만 아쉽게도 운이 따라주지 않았고 자기의 천적에게 또다시 무릎을 꿇었다.
박정환은 2011년 ‘최후의’ 후지쯔(富士通)배에서, 90後 중에서 세계대회 첫 우승자가 되면서 이세돌의 후계자-한국바둑의 차세대 ‘天王’으로 지목되었다. 이후의 정권인수 작업이 비록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정환이는 기본적으로 한국 바둑팬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는 차근차근 계단을 밟은 끝에 한국랭킹 1위라는 寶座(보좌)에 올랐고 지금까지 18개월 연속 꼭대기 자리에 군림 중이다. 비록 세계대회에서는 근래 4년 동안 두 번째 우승과 영 인연이 닿지 않았지만, 높은 수준의 안정성만큼은 사람을 감탄시킨다. 냉정히 말해서, 젊은 棋士 중의 첫 번째 2관왕이 됨은 박정환에게 합당한 보상이며, 이는 또한 중국의 젊은 세계 타이틀리스트들에 대한 무거운 압박이다.
2013년 이래 남자 개인 세계대회로 지금까지 10명의 우승자가 탄생하였다. 그중 8개를 중국 젊은 棋士들이 나눠먹었고 나머지 두 개가 한국 雙峰(쌍봉) 김지석과 박정환의 차지이다. 설령 중국의 전체적 우세가 뚜렷하긴 하지만, 박정환은 그 외에도 하나의 준우승 및 네 번의 4강 실적, 이는 모든 중국 棋士을 뛰어넘는다. 거기다 이전의 후지쯔 우승 등, 박정환은 심지어 2011년 이래 세계바둑계 모든 세계대회에서의 총체적 성적으로 쳤을 때 이세돌 단 한 사람 다음이다. 그는 자기의 방식으로 이세돌의 지휘봉을 물려받았으며,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세계바둑계 정상급 지위를 여러 해 고수함은 결코 사치가 아니다.
한국의 역대 天王급 棋士들의 세계대회 모습을 살폈을 때, 첫 우승에서 두 번째 우승이 이렇게 힘들기로는 박정환이 거의 일인자라 부를 만하다.
1989년 9월 5일, 한국의 바둑황제 조훈현이 싱가폴에서 중국의 棋聖(기성) 섭위평(聶衛平)을 물리치고 초대 응씨배를 들어 올리며 민족의 영웅이 된다. 그 후, 1994년 6월 22일에서야 조훈현은 제5회 동양증권배 결승에서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를 격파하며 개인 두 번째 세계대회 타이틀을 획득한다. 비록 중간에 거의 5년의 세월이 있지만 당시에는 세계대회가 3개밖에 없었기 때문에 조훈현의 첫 둘 우승 사이 탄생한 세계대회 우승은 7개였다.
조훈현의 제자 이창호의 세계대회에서의 활약은 지금까지도 사상 최우수이다. 1992년 1월 27일, 石佛은 임해봉을 힘겹게 꺾고 제3회동양증권배 우승을 한다. 다음해 6월 8일 그는 조치훈을 3:0으로 완봉하며 동 대회를 連覇(연패)한다. 그 중간에 다른 세계대회로는 불과 두 개의 우승이 있었을 뿐이다.
왕년의 ‘세계 최고의 공격수’ 유창혁, 1993년 8월 7일에 조훈현을 격파하고 제6회 후지쯔배 우승을 획득한다. 1996년 11월 16일, 그는 제3회응씨배 결승에서 요다 노리모토를 무릎 꿇리며 개인 두 번째 세계대회 우승을 한다. 그동안 3년 3개월이 지났고 6개 세계대회 우승이 탄생했다.
지금도 용맹이 여전한 이세돌, 2002년 8월 3일에 제15회후지쯔배 결승에서 유창혁에게 승리하며 세계대회 자신의 첫 우승을 획득한다. 다음해 3월 27일, 그는 제7회LG배 결승에서 강적 이창호를 3:1로 꺾었고, 이때부터 ‘昌世期’ 큰 깃발이 펄럭이기 시작한다.(역주 ;흔히 말하는 창세기는 創世記) 세돌의 첫 둘 우승 사이의 세월은 불과 일곱 달, 이 기간 탄생한 다른 세계대회 우승은 불과 세 개였다.
박정환이 제24회후지쯔배를 우승할 당시는 2011년 8월 14일, 오늘에야 들어간 두 번째 골. 그동안 세월은 3년 반, 중간에 13개의 세계대회 우승이 탄생했다. 현재의 바둑계가 군웅할거 시대로서 경쟁이 더 치열한 고로, 朴이 겪은 길은 조훈현보다도 더 험난했다. 박정환의 이러한 경력인즉, 한국의 天王급 棋士의 세계대회에서의 支配力(지배력)이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그의 전체 프로 생애 역시 이창호의 세계대회 성취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는 또한 세계바둑계 발전의 필연적 추세이기도 하다.
중국 棋士 중에는, 공걸(孔傑)이 2009년 12월 17일에 제14회삼성배 우승을 하고 2012년 2월 24일에 제14회LG배 우승을 하면서 첫 둘 우승 사이 기간은 불과 두 달 하고 7일이었다. 이는 세계바둑계 최단기록이다. 만약 첫 둘 우승 사이에 한정하지 않고 단순히 두 개의 세계대회 우승 간격만 계산한다면, 이세돌의 2004년 12월 9일 제19회 삼성배 우승과 2005년 1월 8일 제2회도요타(豊田)배 우승 사이 채 한 달도 되지 않는 간격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기록이다. 그는 또 2008년 연초에 제12회삼성배와 제12회LG배를 연이어 우승하였는데 그 간격이 불과 한 달 4일이었다.
중국 棋士와 중국 바둑팬으로서는, 이번 LG배 결승이 남의 일이긴 한데, 다만 일정 정도 바둑계 대세의 발전 방향을 밝히는 바, 절대 무관심할 수 없다. 그런 차원에서 박정환의 우승이 김지석의 우승보다 중국바둑에 더 큰 위협이 된다 말할 수 있다. 다행히 우리에겐 맞서 싸울 두터운 실력층이 있는 바, 적시에 누군가 뛰쳐나와 쌍관왕의 신분으로 정환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느냐 여부가, 다음 세대 세계바둑계 覇者(패자)가 어디 소속이 될 것인지에 관하여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올해는 춘란배 우승자가 탄생하는바 중국은 이미 우승을 예약한 상태다. 몽백합배 삼성배 LG배 또한 새로이 막을 올린다. 박정환이 계속 맹위를 발휘할지 중국 棋士가 따라잡거나 추월할지, 눈을 닦고 지켜보자.
蕭蕭風 소소풍
(책임편집 王濤 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