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사이버오로)
옛날, 일본바둑은 중국만 상대하고 한국바둑은 일본바둑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그런 한국바둑을 애타게 바라보는 곳이 있었으니 대만바둑이었다. 70년대 일본은 일찌감치 커다란 규모로 중국과 교류전을 열었고 급기야 일중슈퍼대항전으로 발전하는데 한국과는 마지못해 응하는 모습이 역력한 소규모, 그것도 몇 년 대충 하다 일방적으로 중단해 버렸다. 썩을...
대만의 속앓이는 더했으니 뭐하나 아쉬울 게 없는 부호 응창기(應昌期;잉창치)가 분하게도 ‘바둑을 좋아한 죄’(박치문 기자의 표현
백만 불 따먹기 바둑대회, 제1회 응씨배에서 한국기원 참가자 배당이 고작 한 장이어서 한국기원은 보이콧을 진지하게 의논하고 필자도 덩달아 분개했던 기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데, 박 기자는 물주에다 기획자인 應씨의 의사일 게 분명한 이 ‘농간’의 뿌리가, 한 대만 교류전을 둘러싼 섭섭함에서 비롯된 거 아니냐는 심증을 토로하고 있다. (위 링크 기사 참조)
((재)한국기원은 98년 별세한 대만 바둑계의 대부 응창기 선생의 영결식에 당시 정동식 상임이사를 단장으로 해 김수영 7단과 하훈희 과장을 조문사절로 파견했으며 아마 8단을 추증했었다. 조훈현 9단의 1회 대회 우승을 기점으로 붐을 일으켰던 한국 바둑계는 故 응창기 선생에 대해 최대한의 존경과 예의를 갖춘 셈이다사이버오로기사 )
잘 알려진 바대로 응 선생의 염원이야 응씨배의 중국인 우승이고 상호(常昊;창하오)가 지난 5회 대회를 우승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런데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또 하나의 염원이 있을지니 대만 바둑계의 대부로서 대만바둑의 꽃을 피우는 것일 게다. 응 선생 자신의 손을 탄 기사가 세계대회에서 우승한다면 바로 그 염원이 반쯤은 달성된 것 아니겠는가! 그가 바로 주준훈(周俊勳;저우쥔쉰)이다. 마악 재주를 드러내는 대만 본토박이 아이(80년생)에게 말년의 응 선생은 임(林) 九단이나 두 왕서방에게와는 다른 종류의 각별함을 쏟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제 드디어 周아이가 LG배를 우승하였으니 應노사(老師)께서 지하에서 춤을 출 일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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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 바둑 361)
10. 세계바둑계의 거목 잉창치 씨 타계
바둑올림픽 잉창치배 창설 등 평생 세계바둑계 발전에 이바지
세계바둑계의 큰나무 잉창치(應昌期) 씨가 8월 27일 상오 10시 10분 타이페이 자택에서 타계했다. 향년 85세. 사인은 지병으로 알려진 대장직장암과 방광출혈.
잉창치 씨는 중국 져쟝성(浙江省) 닝포(寧波) 출생으로 6세 때 처음 바둑을 배워 12세에 져쟝성 바둑대회에서 우승했으며 사업에 눈을 뜬 청년시절에도 상하이(上海)의 최고수들과 교류를 갖는 등 바둑에 대한 남다른 이해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찌감치 재단을 설립해 린하이펑(林海峯), 왕리청(王立誠) 등의 일본유학을 후원, 조국의 기재들이 세계일류의 길을 걷도록 이끌었고 전세계에 다양한 바둑대회를 개최했다. 84년 세계청소년바둑대회를 창설했으며 88년에는 우승상금 40만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대규모의 세계대회를 창설, 바둑의 세계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 대회에서 조훈현 9단이 우승을 차지하면서 한국이 세계바둑의 강자로 떠오르기 시작했으니 한국바둑과도 좋은 인연을 갖고 있는 셈이다. 잉창치 씨는 이밖에도 바둑미개척지인 미국, 유럽에서 바둑대회가 열릴 수 있도록 적극 후원하는 등 평생 바둑의 문화적 가치상승과 세계화에 힘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