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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090216 바둑 두는 남자, 아니 여자


1

『한手 한手는 靈感영감의 바다에서 조심스레 퍼올린 희망이다. 희망은, 때로 맞부딪혀 흩어지는 순간 迷妄미망이 된다. 나는 희망을, 미망을, 무엇보다도 그 지독한 모순을 사랑했다.』


이 문장 하나를 써먹어보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결과는? 당연히 실패했다. 애초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

문장은 山颯산삽ShanSa 作 「바둑 두는 여자」의 것.


바둑 두는 여자의 제 85手 첫 마디.
한 수 한 수는 영혼의 밑바닥을 향해 내려가는 발걸음이다. 나는 그 미로들 때문에 바둑을 사랑했다.』를 흉내 낸 것.






‘간결한 동시에 관능적인 문체’(「바둑 두는 여자」譯者, 이상해)

‘지상의 모든 고통이 배어있는 것만 같은 몽환적인 문장’(Lire, 작가가 사는 現地인 프랑스 매체)

‘군더더기가 붙지 않은 단문은 명쾌하고 아름답다’(경향신문)


평가들처럼 「바둑 두는 여자」의 문장은 짧다. 구사하는 단어는 절제되었다. 한데 감정은 풍부하다. 고작 몇 개의 단어로 인생의 맛과 냄새를 어찌 그리 진하게 그려낼까. 것도 젊은 나이의 작가가 말이지.

때론 너무 진하지만 전편에 걸쳐 배인 몽롱한 내음, 때론 넘치지만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才氣재기 가득한 비유들, 통찰들.


그의 불순한 욕망들이 패자의 겸허함에 자리를 내주었을 때(9手)

지고 나면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 내 어린 시절의 석양(11手)

학교는 누에들이 펄펄 끊는 물속에서 숨을 거두기 전에 그들의 고치를 짜내는 부드러움의 공장(13手)

화환들이 별들과 맵시를 다투고 있다.(15手)

병사란 자기 가족의 행복을 희생시키는 사람(18手)

나는 태양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장님(19手)

물고기 비늘처럼 가지런하게 끝없이 펼쳐진 회색기와들이 은빛으로 반짝인다.(23手)

헐벗은 플라타너스들이 메마른 글씨의 획들을 그리고 있다.(23手)

새벽이 그 차가운 팔로 날 와락 껴않는다.(34手)

오늘 난 아직 살아있지만, 내일이 되면 전선에서 죽어갈 것이다. 나의 순간적인 열락은 영원한 행복보다 더 강렬하다.(74手)

.....

.....


소설에서 바둑 묘사는 적지 않다. 그 표현들이 또한 수박 겉핥기식이 아닌 제대로다. 무엇보다도...


「바둑 두는 여자」 제 85手. (저 위의) 독백은 이어진다.

돌 하나의 위치는 다른 돌들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한다. 점점 더 복잡해지는 돌들 사이의 관계는 속속 변모해 처음에 의도했던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법이 거의 없다. 바둑은 계산을 비웃고, 상상력을 조롱한다. 구름들의 연금술만큼이나 변화무쌍한 모양 하나 하나가 모두 최초의 의도에 대한 배신인 셈이다.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매순간 가장 유연하고, 가장 자유로운 동시에 가장 냉철하고, 가장 정확한 수를 재빨리 찾아내야만 한다. 바둑은 기만의 게임이다. 오직 하나의 진실, 바로 죽음을 위해 온갖 허상으로 적을 포위하여야 한다.


문장을 떠나서, 작가는 바둑 자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돌들 사이의 관계는 고정불변이 아니다.  끊임없이 변화한다’라든지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어선 안 된다’든지, ‘가장 유연한 동시에 냉철한 수를 그것도 재빨리’등의 서술들. 우리가 익히 아는 일류고수들이 해주는 바로 그 명료투철한 갈파에 다름 아니던가.

생각해보자. 

영혼의 밑바닥..로 시작하여 오직 하나의 진실, 바로 죽음을 위해 온갖 허상으로 적을 포위하여야 한다.로 맺는 부분이야말로 이 바둑소설의 백미다.


독특한 문체, 그것 말고도 특이한 게 있다. 소설의 형식, 바둑 형식이다. 마치 바둑을 두듯 여자의 한 手, 남자의 한 手가 교차된다.(한 章은 여자가 서술하고 한 章은 남자가 서술하는 식이다.)

바둑이란 원래 이런 것이다. 흑은 흑의 수읽기를 하고 백은 백의 수읽기를 한다. 매 手에 흑은 흑의 꿈속을 백은 백의 꿈속을 노닌다. 바둑 속의 흑백은 제각기 일장춘몽 속에 있다.

소설도 그렇다. 문체도 그렇지만 내용까지 꿈결 같다. 당초, 여자는 여자의 꿈속을 남자는 남자의 꿈속에서 따로 노는듯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접촉이 발생하고 스파크가 인다. 마치 바둑돌처럼.


남녀 각 46手, 총 92手. 포석이 있고 중반이 있다. 마지막은 계가바둑적인 끝내기라기보다는,...긴장의 폭발적인 해소이다. 말하자면 서로 간 피할 수 없는 수상전이 벌어졌고, 상승되는 긴장 속에 서로들 한수 한수 메웠다. 그러다 일순, 수십 마리 대마가 몽땅 빵따냄이다.

그 도달하는 과정에 얼마간 우연적인 요소가 있어 약간은 진부하달 수도 있는, 소설의 결말은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하나의 거대한 충격이었다. 직접 보라. 당신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려버리리라.




3

세월아 네월아 미뤄오던 「바둑 두는 여자」독후평. 이렇게나마 쓴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 아니고 LG배‘덕분’인데, 무슨 소리냐면..

「바둑 두는 여자」를 흉내 내어 「바둑 두는 남자」를 써보려 했다. 몽롱한 독백체를 흉내 내어보면 어떨까. 한手씩 교환하는 특이한 형식을 흉내를 내어보면 어떨까. 총 14手를 써보면 어떨까. 쎈力전 총 14판을‘바둑 두는 남자들’(세돌과 고력古力)이 직접 회고하는 형식이라면 어떨까. 다가올 LG배를 위한 그럴 듯한 전채요리가 되지 않을까.


다 좋다 다 좋은데,..사람은 주제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몽롱한 독백체는 개뿔..이러니 저러니 해도 애초에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 알간? 에헤라 디야.

세돌이 이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