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 徽欽(휘종흠종) 두 황제의 포로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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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왕조 亡國 君主의 운명은 매우 비참했다. 北宋의 徽(휘), 欽(흠) 두 황제는 중국 북부 지역인 흑룡강에서 죽었으며, 南宋 또한 황제 昺(병)이 南方의 애산崖山(지금 廣東 新會南) 앞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송휘종(1082-1235), 趙佶(조길), 北宋 8대 황제, 神宗의 11子, 원풍(元豊)8년(1085) 수녕군왕(遂寧郡王)에 封(봉), 소성(紹聖)3년(1096) 단왕(端王)에 봉, 원부(元符)3년(1100) 哲宗(철종)이 죽은 후 後嗣(후사)가 없기에 형을 이어 즉위, 도교를 숭상하여 도교 寺院을 크게 지었으며, 자칭 ‘道君황제’, 또한 토목 사업을 크게 일으켜 화양궁(華陽宮)을 지었으며, 강남의 奇花異石(기화이석)을 수탈하였으며, 궁에서 사치와 호화에 도취, 酒池肉林에 빠져 지냈다. 서기 1125년 겨울(北宋 선화宣和 7年,金 천회天會 3年), 金나라가 遼(요)나라를 멸하고 대거 남하, 宋나라 깊숙이 묻지마 직진하여 宋의 수도인 변경汴京(지금 河南 開封개봉)을 공략했다. 宋휘종은 한편으론 조서를 내려 각지에 구원군을 요청하고, 한편으론 스물다섯 살의 태자 趙桓(조환)(1100-1161)에게 급히 帝位를 물려주니 즉, 흠종이다. 그리고 자신은 蔡京(채경) 童貫(동관) 등의 호위 下에 長江 남쪽 연안의 진강부鎭江府(지금 江蘇성 鎭江)로 토꼈다.
흠종은 휘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한 살에 경조군왕(京兆郡王)으로 봉, 여덟에 정왕(定王)으로 봉, 열다섯에 태자가 되었다. 金兵 침입 시에 帝位를 물려받아, 항전을 요구하는 軍民의 아우성 下에 항전파 李綱(리강)을 기용 ;金兵은 황금500만냥 白銀5000만냥 牛馬10000필 비단100만필을 요구 접수하고, 또한 태원(太元) 중산(中山) 하간(河間) 세 鎭(진)의 할양 약속을 받은 후에 북으로 철군했다.
金兵이 물러가자 휘종 일행은 조용히 忭京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리강을 축출하고 太上皇의 썩어빠진 궁정 생활을 보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예상 외, 불과 반 년 남짓 지난 후에 金兵이 東西 두 갈래 길을 통해, 忭京으로 또 쳐들어왔다. 휘종과 흠종, 부패하고 무능한 두 황제는 묻지마 무릎 꿇고 항복한다. 1126년 12월, 흠종은 친히 金나라 군사 진영으로 찾아가 講和(강화)를 구하고 항복을 요청하는 동시에 稱臣請罪(신하로 칭하고 죄를 청함)한다. 또한 河南 河北 두 커다란 지역을 바친다. 金조정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금괴1000만錠 은괴2000만錠 비단1000만 필을 더 요구했다.(앞 침략에서 요구할 때, 金銀의 단위는 냥(兩), 이번엔 錠(덩이 정)이다. 錠은 금괴로 번역했다.‘냥’과 ‘덩이’, 두 단위의 大小 차이는 매우 크다고 짐작 ;譯註) 이러한 막대한 물자를 단시일에 어찌 마련할 수 있을까, 흠종은 견디지 못하고 宮中의 황실 여인네(자기 딸들 포함)들을 모두 金나라에 팔기로 동의한다. 金 天會5년(1127) 정월, 金나라 군사는 흠종을 구금, 다음 달엔 휘종을 구금, 또한 그들을 폐위시키고 庶人으로 만든다. 3월에 張邦昌(장방창) 괴뢰 황제를 세웠다. 4월 초에 세찬 바람에 돌멩이가 나는 삭풍 속에 金나라 군사는 휘,흠 두 황제와 왕비와 태자(趙諶조심), 그리고 황실 종실 부마 공주 궁녀 기술자 예술가 官妓(관기) 남녀 총 14000인을 일곱 무리로 나누어 압송하여 忭京을 떠난다. 포로 중에는 宋江(소설 수호지 송강의 모델 ;譯註)의 의거를 진압한 張叔夜(장숙야)와 매국노 秦檜(진회)가 포함되었다. 궁의 창고는 텅 비었고, 北宋은 멸망했다. 이로써 두 황제는 온 하루를 눈물로 얼굴을 씻는, 남은 半生 포로 생활을 시작한다. (이 亂을, 흠종의 연호인 정강(靖康)을 빌어 靖康지恥라 한다 ;譯註)
휘종은 정치에는 어리석고 무능하여 유명한 昏君이었지만, 서예와 그림에 뛰어나고 詩와 詞(사 :詩와 비슷한, 중국 문학의 하나 ;譯註)에 능하였다, 즉 학술에 대단한 조예가 있었다. 황제 그리고 태상황에서 포로로 전락하며 國破家亡이란 비참한 지경을 맞아 시시때때 悲感이 없을 수 없는 그가, 그해 5월에 연산燕山(지금의 북경)에 당도하여 시들어 떨어진 살구꽃을 보고, 자기 신세를 떠올리며 한 首의 詞「燕山停」을 지었다. 그는 이 詞에서 비바람에 시든 살구꽃을 들어, 허리 째 꺾여버린 자신의 운명에 비유, 이를 빌어 맘속 무한한 애수를 토로하였다.
흠종은 북으로 가는 일곱 번째 무리였으므로 네 번째 무리인 휘종 일행과는 따로였다. 출발할 때 金나라 군사는 흠종으로 하여금 검은 옷으로 갈아입게 하고 머리엔 모직물삿갓(氈笠전립)을 쓰게 하고, 검은 말에 태워 전담 병사로 하여금 압송케 하였다. 가는 길에 흠종은 시시때때 하늘을 우러러 哭을 함에, 그때마다 金兵은 크게 질책하며 제지하였다. 흠종은 곡소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흠종과 기타 宋나라 관원들은 7월 초에 燕山에 도착하였고, 휘종 일행 및 다른 (다섯) 무리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그해 9월 중순에 金人들은 두 황제를 멀리 中京(중경 :지금 내몽골 宇城 四大明城)으로 옮겼다. 그리고 종실과 복왕 중리(濮王仲理) 등 1800여 人은 燕山에 남았다. 헤어질 무렵은 마침 가을과 겨울이 맞물리는 순간이었는데, 북녘의 찬바람이 이따금 불어옴에 사람들은 맘이 참혹하여 눈물을 날리며 이별했다. 그리고 두 황제와 황실 일행은 거의 千里 길을 가서 시월 중순에 中京에 도착, 원래 遼나라 相國府(상국부, 相國=宰相 ;譯註)였던 곳에 잠시 머물렀다. 당시의 相國府는 매우 황량하고 소슬하여 모든 것이 燕山보다 못했다.
金나라 天會 6년(1128) 3월, 두 황제 및 그 수행원들은 통새주(通塞州)로 옮겨졌고, 각각 1500경(頃=66667제곱m, 1500경=1억제곱m, 결국 가로세로 10킬로 면적에 해당, 여의도 면적의 약 12배 ;譯註)의 밭을 받았다. 밭을 갈고 개간하고 파종하는 등, 자급자족하라는 뜻이었다. 궁중에서 존귀한 몸으로 떵떵거리던 생활에 익숙한 휘종은, 콩과 보리 분간조차 못 할 정도, 어떻게 이러한 거친 농사를 해낼 수 있단 말인가! 자연히 지난 추억이 생각났고, 한 首「眼兒媚(안아미)」를 지었다.
玉京曾憶舊繁華, 구중궁궐 화려한 기억이 새로운데
萬里帝王家。 제왕가는 만리나 멀어졌구나
瓊樓玉殿, 단청이 아롱진 전각들에서는
朝宣弦管, 아침에는 삼현륙각 요란했고
暮列笙琶。 저녁에는 생황과 비파소리 흥겨웠네
花城人去今蕭瑟, 꽃 같던 도읍은 주인 없어 쓸쓸하고
春夢繞胡沙。 춘몽에 오랑캐땅의 모래바람만 감도네
家山何在? 고향산천은 어디메뇨?
忍聽羌管, 오랑캐 피리소리 듣노라니
吹徹底梅花。 매화가 속절없이 지는구나
이에 흠종은 눈물을 비 오듯 쏟으며 다음과 같이 和答(화답 :앞의 詩作에 어울리도록 답함)을 했다고 한다.
宸傳三百舊京華, 왕업이 3백년 전해온 도읍이었고
仁孝自名家。 인효가 넘친 명문대가였소이다
一旦奸邪, 어느 아침 간사한 무리가 일어나
傾天折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번져졌는데
忍聽琵琶? 비파소리 듣고 계시다니요?
如今在外多蕭瑟, 눈앞의 이 광경 소슬하기 그지없고
迤邐近胡沙。 오랑캐땅의 모래바람만 감도는군요
家邦萬里, 집과 고국에서 만리나 떨어진
伶仃父子, 외톨이 두 부자는
向曉霜花。 새벽서리 맞은 꽃과 같사옵니다
-위 번역은 이곳 ☞「북송의 두 末代 황제는 어디에 묻혀 있을까?」 김관웅- (두 황제를 다른 측면에서 조명한, 在中동포 교수가 한국어로 쓴 글이다. 반드시 읽어보길 권한다.)
오랑캐땅 모래바람과 비파 소리 뒤얽힌 중에, 옛 번성했던 시절을 추억하니, 이러한 슬픈 신음소리를 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8월 하순에 두 황제 일행 1300여 人은 멀리 경사회녕부京師會寧府(오늘날 흑룡강 아성阿城市 남백南白城)으로 또 옮겨졌고, 金나라 사람들은 포로봉헌의식(전쟁에서 승리하여 개선할 때에 사로잡은 포로를 종묘에 바치고 戰功을 알리던 軍禮)을 거행한다. 휘종과 鄭태후 및 흠종과 朱황후, 종실, 여러 왕들, 부마, 공주들은 죄다 머리는 두건으로 동여매고, 양가죽을 걸치되 윗몸 일부를 드러낸 차림으로 金兵의 압송 하에 金나라 아구타 종묘에 도착하여 ‘牽羊禮(견양례, 끌 牽)’를 행하였다. (다른 記事에 의하면, 金나라는 두 마리 양을 잡고 피가 뚝뚝 흐르는 양가죽을, 황제 父子의 웃통을 벗겨 맨살에 걸치게 했다. 父子는 이 차림으로 한 발자국에 한 번씩 머리를 땅에 박는 절을 하면서 아구타의 릉을 세 바퀴나 돌았다 한다 ;譯註) 흠종의 아내인 朱황후는 이런 희대의 치욕을 참지 못 하고 그날 밤 목을 맸고, 다행히 발견되어 깨어났으나 이번엔 물에 몸을 던져 결국 죽었다. 다음날 金태종은 명을 내려 휘종을 昏德公(혼덕공 :덕이 혼미한 이)으로, 흠종을 重昏侯(중혼후 :아주 혼미한 이)로 봉하였다. 그리곤 흠종의 生母 이하 300여 명 종실 女가족들은 전부 궁의 노비가 되었고, ‘옷 빠는 곳’ 에 보내져 苦役에 처해졌다.(譯註 ;이 부분은 아래 상자 記事 끝 부분 참조)
金은 부녀자를 대규모로 요구하였다. 그들은 먼저 천문학적 액수의 전쟁배상금을 요구하는데, 이는 宋의 속사정을 훤히 꿴 상태에서 나온 하나의 술책이었다. 앞에서 말한, 금 얼마 은 얼마 식으로 요구를 하는데(기재된 액수는 앞에 쓴 것과 서로 다르다. 중요한 건 천문학적..), 그들의 의도한 바는 바로 宋의 부녀자였다. 그들은 이렇게 요구했다. “금 얼마 은 얼마...열흘 안에 수레로 보내라. 만일 부족하면, 공주 또는 왕비(황제의 며느리) 1인=金 천錠(정), 옹주1인=金 오백정,...종실부인=얼마, 族室부인=얼마,...단, 金나라 사령부가 받는 사람만 받는다.(골라서 받는다, 이 말은 너무 박색은 퇴짜란 소리로 들린다)”金나라의 의도는 宋의 국토와 재물과, 거기에 여인까지 차지함이었다. 원래 요구액이 金100만정인데, 황제의 딸과 며느리의 값어치가 金1000정이니, 황제의 딸과 며느리의 가치로 쳐도 1000명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된다. 흠종은, 할 줄 아는 건 詩詞 읊는 것과 묻지마 yes뿐인지라 이번에도 묻지마 결재, 일단 응락부터 하고본다. 허나 아무리 부유했던 宋이라도 遼에 뜯기고 金에 뜯기고,..재정은 고갈되었고,..갈수록 커진 금액은 불감당인지라,
妃嬪(비빈) 83人 황제의 며느리 24人 공주와 옹주 22人 =다 합쳐 金134000정. 王妾28人 종실의 딸52人 종실의 곁가지 딸 195인=다 합쳐 얼마 ...=다 합쳐 얼마...=다 합쳐 얼마.....이런 식으로 아무리 채워도 채워도 요구액에는 모자랐다.
정리하면, 이리하여 정강元年(1126) 金나라 군사에 의해 北宋의 수도가 함락된 후 노획된 포로가, 后妃(후비) 3000여人 종실남녀 4000여人 황제의 인척 5000여人 각종기술자 3000여人 官妓 3000여人 민간 미녀 3000여人 각급 大臣과 종실의 가족 수천 명이었다.
당시 일을 기록한 책(開封府狀) 1127년 2월 부분에는 ‘여자포로가 11635명으로서, 그중 공주가 21人’이라 기재되어 있다. 휘종의 딸은 모두 26人인데 그중에 4人은 요절했고 가장 어린 한 살짜리 딸은 북으로 이동시에 어디론가 생사 불명, 그 나머지 21人이 일망타진된 셈이다. 여자포로들은 北行 도중에 부지기수로 죽었는데,
(또 다른 책의 기재) ‘2월 20일에 信王의 부인이 어디에서 자살, 그 외에 여자 포로들의 죽음이 그치지 않았다.’ ‘2월 24일 모 공주(16세)가 병으로 사망’ ‘2월 25일 모 공주(16살) 어디에서 돌아가심’ ‘2월 28일 모 공주(16살) 같은 곳에서 돌아가심.’
北宋은 멸망했지만 휘종의 아홉째 趙構(조구)가 강남으로 가 南宋을 세워 宋의 명맥을 잇는다. 高宗이다. 조구의 아버지인 ‘풍류황제’‘예술가 황제’ 휘종은 딸 뿐만 아니라 아들들도 金人들에게 일망타진 당했는데, 이 조구만은 예외였다. 그가 화를 면할 수 있었던 연유는 막 ‘최후의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에 그가 金으로 가는 使臣이었고, 이에 국경 근처에서 백성들이 ‘전쟁이 터진 이제, 범 아가리로 들어가는 격이다’며 말고삐를 붙잡고 말려준 덕분이다. 북으로 끌려간 사람 중에는 조구의 생모와 왕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2월 29일 모모 두 妃와 두 공주가 말에서 떨어져 낙태하여 더 이상 이동할 수 없었다.’원래 출발 때인 1월 16일에 ‘임신한 여자는 의원을 불러 낙태시켜라’(南征錄彙에 기재) 명령하였고 모모 공주는 시집도 안 갔는데,.. 아마도 이들 두 공주와 두 妃는 당시 두 달 무렵에 (강간 당하여) 임신했으리라. ‘3월 4일 황하를 건널 때, 金나라 모모 大王이, 임신한 모 공주와 모 공주가 말을 같이 탄 모양을 보고선, 모를 죽이고 시체는 황하에 버리고 모는 데리고 갔다.’이 모 大王은 조구의 처 邢妃(형비)를 강간하였다. 형비는 하남 어디어디에서 자살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죽지 못했다.
路上의 참상, 일곱 무리 중 한 무리에 ‘부녀자 3400여人이 3월 27일 어디에서 출발하여 4월 27일 북경에 도착, 남은 부녀는 1900여人이었다.’(呻吟語에 기재) 한 달 만에 거의 반이 죽었다. 살아남은 자는 행운이라 하겠으나, 그들에게 남겨진 운명은 비극을 면할 길 없었다.
5월 23일 조구(南宋 고종)의 생모인 韋后(위후)와 아내 형비 등 일행은 金나라 上京에 도착하였다. 金 황제는 이들을 접견한 후, 위후 형비 공주 모모 등등을 ‘옷빠는곳(洗衣院세의원)’으로 배치했다. 그런데 이 ‘세의원’이란 곳은 옷 빠는 곳이 아니라 ‘군영 내의 妓院(기원)’이었다.(譯註 ;원문에는 ‘軍妓營’, 현대식으로 말해서 종군위안부) 위후 등 18명의 귀부인이 먼저 들어갔다. 나중에 휘종이 도착한 후에 세의원은 북적거렸다. 「呻吟語」에는 이렇게 기재되어 있다. ‘비빈 왕비 공주 종실부녀는 예외 없이 상체(일부)를 노출시키고 양가죽을 걸쳤다.’그 차림은 여진족 부녀들 차림이라 한다. 또 누군가 수치를 참지 못하고 자살을 기도했다...이들은 세의원에서 10년 안팎 세월을 보낸다. 이후 각자의 운명으로, 갈 길을 밟아갔다.
오래지 않아 金나라 사람들은 그들을 한주韓州(오늘날 요녕성 昌圖 北八面城)로 유배 보냈다. 15傾의 밭을 주며 역시 자급자족케 했다. 이때 진회는 두 황제를 떠나 金나라의 權臣인 달라에게 몸을 의탁했다.(진회는 남송을 말아먹었다는 평가를 듣는 사람이다. 이때만 해도 金의 포로였으되, 후일 南宋으로 넘어갈 수 있었고, 거기서 南宋의 대신이 되었다. 흔히들, 南宋의 충신 岳飛(악비)의 죽음은 진회 탓이었다고... 이 글에서 그의 이름이 뜬금없이 등장하는 이유는 宋나라 역사에서 진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譯註) 天會 8년(1130) 7월에, 金人들은 두 황제 일행을 다시 五國城(오늘날 흑룡강성 依蘭현)으로 옮기게 했다. 그들이 물길을 따라 막 떠나는 순간에 金태종의 조서가 도착하여, 두 황제를 수행하던 종실 일행 500여人은 림황臨潢(오늘날 내몽고 巴林 左旗南)으로, 내시 黎安國(려안국) 등 300人은 성주成州(오늘날 遼寧 開原 동북 老城鎭)로 이주하라는 명령이 전해졌다. 이리하여 두 황제 신변에는 家屬(가속) 외에는 종실 사람 여섯만 남게 되었다. 당시 휘종은 일행 모두를 함께 있게 해달라고, 조서를 전하는 使者에게 요구하였으나 승낙을 얻지 못했다. 휘종은 (떠나는) 모두에게 이런 말만 할 수 있을 뿐, ‘그대들이 나를 따른 이래 환난 근심 기쁨을 마땅히 같이 누리고 같이 짊어졌다, 이제 속박 받는 이 처지에 참으로 아무런 방법조차 없구나!’ 사람들은 머리를 감싸며 통곡한 후 이별했다.
이 당시, 南宋이 파견한 通問使(통문사) 洪皓(홍호)가 金나라 조정에 의해 大同(대동)에 연금 당하는 중이었는데, 두 황제가 五國城에 당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황금으로 商人 하나를 매수하여 비밀 서신을 전하게 했다. 이리하여, 康王강왕(조구, 휘종의 아홉째)이 이미 3년 전에 (南宋 황제로)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드디어 두 황제도 알게 되었다. 자연히 두 황제는 귀환의 희망을 조구에게 걸었다. 허나 그들이 어찌 알았으랴. 조구는 아버지와 형의 귀국을 자기 帝位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고, 때문에, 金나라에 대항할 의사가 근본적으로 없었음을!
天會10년(1132), 그들이 五國城에 당도한지 세 번째 해였다. 6월에, 휘종의 열다섯째 및 부마가, 휘종 및 휘종의 열여덟째인 趙榛(조진)이 모반을 도모한다고, 誣告(무고)하였다. 金나라 조정은 즉시 사람을 보내 심문하였고, 상황을 낱낱이 조사하여 명백히 밝힌 후, 열다섯째 및 부마를 죽였다.
五國城에서 휘종은,
國破山河在,나라는 깨졌으되 (떠나온 곳) 山河는 그대로겠네,
宮廷荊棘春,(옛날 그) 궁 뜰에는 가시나무가 봄을 알리겠구나,
衣冠今左衽,衣冠은 오늘 왼쪽으로 여미고,
忍作北朝臣 욕됨을 참고 北朝(金나라)의 신하가 되었네.
라는 시를 남겼다.
***
옷깃을 왼쪽으로 여밈은 북방민족의 풍속이다. 위 詩와 아래 詩, 두 수의 詩 번역은 너무 믿으면 안 됨.)
다른 한 首도 지었는데,
茸母初生認禁烟,떡쑥이 새로 돋음에 (고향의) 양귀비인가 하노라,
無家對景倍凄然。집 없는 처지에 景色을 대하니 곱으로 처연쿠나,
帝城春色誰爲主,(떠나온) 皇城 짙은 春色 이젠 뉘라서 주인일꼬,
遙指鄕關涕淚漣。멀리 고향 관문을 가리키며 줄줄줄 눈물이구나.
북방에서, 새로 돋아난 떡쑥(茸母용모)을 보고 忭京 두고 온 궁중의 禁煙(금연 no smoking, 여기선 뭔 소리인지 해석 불능, 아편 즉 양귀비가 아닐까 추리 ;譯註)이라 여김에, ‘돌아보니 고향산천 삼천리,남쪽 하늘 바라보나 눈길은 잘리고 기러기조차 날지 않는구나 -家山回首三千里 目斷天南無雁飛’, 지난 날 榮華(영화)를 추억하다 생각이 零落(영락)한 자기 신세에 미침에 눈물이 종횡으로 흐름을 탓하기 어렵도다. 天會13년(1135) 4월 21일에, 휘종은 처참한 신세로 생을 마쳤다. 향년 54세였다.
흠종 또한 詩와 詞에 능했다. 塞外鎭(새외진)에서 「西江月」을 지었다. (그만 좀 짓지..해석 없음)
歷代恢文偃武,四方晏璨無虞,
奸臣招致北匈奴,邊境年年侵侮,
一旦金湯失守,萬邦不救鑾輿,
我今父子在穹廬,壯士忠臣何處?
塞雁南去,高飛難寄音書,
隻應宗社已丘墟,愿有眞人爲主,
岭外雲藏曉日,眼前路憶平蕪,
寒沙風緊淚盈裾,難望燕山歸路。
詞는 哀傷(애상), 회한, 그리고 失心으로 가득하다.
南宋 소흥(紹興)11년(1141), 고종은 아버지 휘종과 어머니 鄭태후, 妻 邢(형)씨의 유골과 생모 韋賢妃(위현비)의 귀환을 조건으로, 金나라와, 회수(淮水)를 쌍방의 경계로 하고, 宋은 金에 신하로 칭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협상을 타결하였다. 이리하여 金조정은 다음해 4월에 使臣을 보내, 휘종 및 鄭태후 그리고 邢妃(형비)의 靈柩(영구), 그리고 위현비를 宋으로 돌려보냈다. 행렬은 8월에 림안臨安(오늘날 절강성 항주)에 도착하였다. 위현비는 향년 80에 생을 마쳤다.
위현비가 귀환할 때, 흠종은 얼굴 가득히 눈물을 흘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돌아가시면 아홉째(南宋 高宗)와 승상(진회)에게 말해주소서. 나는 태을궁(太乙宮) 宮使(궁사 ;어떤 궁 하나를 주관하는 官吏)로 만족합니다. 감히 그를 원망치 않겠습니다.” 이 말은, 만약 고종이 자신을 구해 돌아가게만 해준다면, 궁중의 일개 종(진짜 종이 아니고, 중국식 표현에는 관리도 ‘황제의 종’이다 ;譯註)이 되고자 함이며 그것으로 만족한다, 감히 복위라니 근본적으로 생각이 없다, 이런 의미였다. 위현비 또한 눈물을 비 오듯 흘렸다. 그리고 그와 헤어졌다. 위현비는 림안으로 돌아가서 자녕궁(慈寧宮)에 거처를 잡은 후, 허나 고종은 흠종을 영접할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음을 알게 되고선, 흠종의 말을 감히 고종에게 전해주지 못했다. 이리하여 五國城에서 학수고대 근 20년, 기다리고 또 기다려 1161년 5월 19일, 결국 귀환 기별을 듣지 못한 채, 흠종은 절망에 빠져 한스럽게 생을 마쳤으니 향년 51세였다. 휘종과 흠종 두 황제는 이렇게 大치욕의 半生을 마쳤다.
원래 金나라 군사가 忭京을 공략할 때, 황실의 玉牒(옥첩 ;사람의 명단이라 짐작 ;譯註)과 대조하며 이 잡듯이 뒤져 趙씨 宋나라 황실 사람들을 체포했다. 휘종의 형과 동생 또한 행운은 없었다. 휘종의 32명 아들과 22명 딸들은 아홉째 조구 및 강보에 쌓인 한 살짜리 딸 외에는, 죄다 일망타진 당했다. 옛 사람이 이에 탄식하며 말했다 :“먼 옛날 이래로, 망국의 치욕으로, 趙씨 宋나라 같은 경우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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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記述에 의하면 :훗날 南宋 고종이 되는 조구 및, 휘종의 노여움을 받아 휘종에게 내침을 당해 평민이 됨으로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덕분에 그야말로 새옹지마 식으로 화를 면한 휘종의 어느 妃, 딱 이들 두 사람만 ‘재앙’을 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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