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휘종,흠종 두 황제의 포로 생애
출처 :hxlsw.com
송 왕조 망국 군주의 운명은 매우 비참했다. 북송의 휘, 흠종 두 황제는 중국 북부 지역인 흑룡강에서 죽었으며, 남송 또한 황제 병 남방의 애산(지금 광동 신회남) 앞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송휘종(1082-1235), 조길, 북송 8대 황제, 신종의 11자, 원풍8년(1085) 수녕군왕에 봉, 소성3년(1096) 단왕에 봉, 원부3년(1100) 철종이 죽은 후 후사가 없기에 형을 이어 즉위, 도교를 숭상하여 도교 사원을 크게 지었으며, 자칭 ‘도군황제’, 또한 토목 사업을 크게 일으켜 화양궁을 지었으며, 강남의 기화이석을 수탈하였으며, 궁에서 사치와 호화에 도취, 주지육림에 빠져 지냈다. 서기 1125년 겨울(북송 선화선화 7년,금 천회 3년),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하고 대거 남하, 송나라 깊숙이 묻지마 직진하여 송의 수도인 변경(지금 하남 개봉)을 공략했다. 송휘종은 한편으론 조서를 내려 각지에 구원군을 요청하고, 한편으론 스물다섯 살의 태자조환(1100-1161)에게 급히 제위를 물려주니 즉, 흠종이다. 그리고 자신은 채경, 동관 등의 호위 하에 장강 남쪽 연안의 진강부(지금 강소성 진강)로 토꼈다.
흠종은 휘종의 맏아들로서, 태어나 한 살에 경조군왕으로 봉, 여덟에 정왕으로 봉, 열다섯에 태자가 되었다. 금병 침입 시에 제위를 물려받아, 항전을 요구하는 군민의 아우성 하에 항전파 리강을 기용 ;금병은 황금500만냥 백은5000만냥 우마10000필 비단100만필을 요구 접수하고, 또한 태원 중산 하간 세 진의 할양 약속을 받은 후에 북으로 철군했다.
금병이 물러가자 휘종 일행은 조용히 변경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리강을 축출하고 태상황의 썩어빠진 궁정 생활을 보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예상 외, 불과 반 년 남짓 지난 후에 금병이 동서 두 갈래 길을 통해, 변경으로 또 쳐들어왔다. 휘종과 흠종, 부패하고 무능한 두 황제는 묻지마 무릎 꿇고 항복한다. 1126년 12월, 흠종은 친히 금나라 군사 진영으로 찾아가 강화를 구하고 항복을 요청하는 동시에 칭신청죄(신하로 칭하고 죄를 청함)한다. 또한 하남 하북 두 커다란 지역을 바친다. 금조정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금괴1000만 은괴2000만 비단1000만필을 더 요구했다.(앞 침략에서 요구할 때, 금은의 단위는 냥, 이번엔 덩이 정이다. 정은 금괴로 번역했다.‘냥’과 ‘덩이’, 두 단위의 대소 차이는 매우 크다고 짐작 ;역주) 이러한 막대한 물자를 단시일에 어찌 마련할 수 있을까, 흠종은 견디지 못하고 궁중의 황실 여인네(자기 딸들 포함)들을 모두 금나라에 팔기로 동의한다. 금 천회5년(1127) 정월, 금나라 군사는 흠종을 구금, 다음 달엔 휘종을 구금, 또한 그들을 폐위시키고 평민으로 만든다. 3월에 장방창 괴뢰 황제를 세웠다. 4월 초에 세찬 바람에 돌멩이가 나는 삭풍 속에 금나라 군사는 휘,흠 두 황제와 왕비와 태자(조심), 그리고 황실 종실 부마 공주 궁녀 기술자 예술가 관기 남녀 총 14000인을 일곱 무리로 나누어 압송하여 변경을 떠난다. 포로 중에는 송강(소설 수호지 송강의 모델 ;역주)의 의거를 진압한 장숙야와 매국노 진회가 포함되었다. 궁의 창고는 텅 비었고, 북송은 멸망했다. 이로써 두 황제는 온 하루를 눈물로 얼굴을 씻는, 남은 반생 포로 생활을 시작한다. (이 난을, 흠종의 연호인 정강을 빌어 정강지치라 한다 ;역주)
휘종은 정치에는 어리석고 무능하여 유명한 혼군이었지만, 서예와 그림에 뛰어나고 시와 사(사 :시와 비슷한, 중국 문학의 하나 ;역주)에 능하였다, 즉 학술에 대단한 조예가 있었다. 황제 그리고 태상황에서 포로로 전락하며 국파가망이란 비참한 지경을 맞아 시시때때 비감이 없을 수 없는 그가, 그해 5월에 연산(지금의 북경)에 당도하여 시들어 떨어진 살구꽃을 보고, 자기 신세를 떠올리며 한 수의 사「연산정」을 지었다. 그는 이 사에서 비바람에 시든 살구꽃을 들어, 허리 째 꺾여버린 자신의 운명에 비유, 이를 빌어 맘속 무한한 애수를 토로하였다.
흠종은 북으로 가는 일곱 번째 무리였으므로 네 번째 무리인 휘종 일행과는 따로였다. 출발할 때 금나라 군사는 흠종으로 하여금 검은 옷으로 갈아입게 하고 머리엔 모직물삿갓(전립)을 쓰게 하고, 검은 말에 태워 전담 병사로 하여금 압송케 하였다. 가는 길에 흠종은 시시때때 하늘을 우러러 곡을 함에, 그때마다 금병은 크게 질책하며 제지하였다. 흠종은 곡소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흠종과 기타 송나라 관원들은 7월 초에 연산에 도착하였고, 휘종 일행 및 다른 (다섯) 무리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그해 9월 중순에 금인들은 두 황제를 멀리 중경(중경 :지금 내몽골 우성 사대명성)으로 옮겼다. 그리고 종실과 복왕 중리 등 1800여 인은 연산에 남았다. 헤어질 무렵은 마침 가을과 겨울이 맞물리는 순간이었는데, 북녘의 찬바람이 이따금 불어옴에 사람들은 맘이 참혹하여 눈물을 날리며 이별했다. 그리고 두 황제와 황실 일행은 거의 천리 길을 가서 시월 중순에 중경에 도착, 원래 요나라 상국부(상국=재상 ;역주)였던 곳에 잠시 머물렀다. 당시의 상국부는 매우 황량하고 소슬하여 모든 것이 연산보다 못했다.
금나라 천회 6년(1128) 3월, 두 황제 및 그 수행원들은 통새주로 옮겨졌고, 각각 1500경(경=66667제곱m, 1500경=1억제곱m, 결국 가로세로 10킬로 면적에 해당, 여의도 면적의 약 12배 ;역주)의 밭을 받았다. 밭을 갈고 개간하고 파종하는 등, 자급자족하라는 뜻이었다. 궁중에서 존귀한 몸으로 떵떵거리던 생활에 익숙한 휘종은, 콩과 보리 분간조차 못 할 정도, 어떻게 이러한 거친 농사를 해낼 수 있단 말인가! 자연히 지난 추억이 생각났고, 한 수「眼兒媚(안아미)」를 지었다.
玉京曾憶舊繁華, 구중궁궐 화려한 기억이 새로운데
萬里帝王家。 제왕가는 만리나 멀어졌구나
瓊樓玉殿, 단청이 아롱진 전각들에서는
朝宣弦管, 아침에는 삼현륙각 요란했고
暮列笙琶。 저녁에는 생황과 비파소리 흥겨웠네
花城人去今蕭瑟, 꽃 같던 도읍은 주인 없어 쓸쓸하고
春夢繞胡沙。 춘몽에 오랑캐땅의 모래바람만 감도네
家山何在? 고향산천은 어디메뇨?
忍听羌管, 오랑캐 피리소리 듣노라니
吹徹底梅花。 매화가 속절없이 지는구나
이에 흠종은 눈물을 비 오듯 쏟으며 다음과 같이 화답(앞 시에 어울리게 답함)을 했다고 한다.
宸傳三百舊京華, 왕업이 3백년 전해온 도읍이었고
仁孝自名家。 인효가 넘친 명문대가였소이다
一旦奸邪, 어느 아침 간사한 무리가 일어나
傾天折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번져졌는데
忍听琵琶? 비파소리 듣고 계시다니요?
如今在外多蕭瑟, 눈앞의 이 광경 소슬하기 그지없고
迤邐近胡沙。 오랑캐땅의 모래바람만 감도는군요
家邦万里, 집과 고국에서 만리나 떨어져
伶仃父子, 외톨이 두 부자는
向曉霜花。 새벽서리 맞은 꽃과 같사옵니다
-위 번역은 이곳 「북송의 두 말대황제는 어디에 묻혀 있을까?」 김관웅-
오랑캐땅 모래바람과 비파 소리 뒤얽힌 중에, 옛 번성했던 시절을 추억하니, 이러한 슬픈 신음소리를 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8월 하순에 두 황제 일행 1300여 인은 멀리 경사회녕부(오늘날 흑룡강 아성아성시 남백성)으로 또 옮겨졌고, 금나라 사람들은 포로봉헌의식(전쟁에서 승리하여 개선할 때에 사로잡은 포로를 종묘에 바치고 전공을 알리던 군례)을 거행한다. 휘종과 정태후 및 흠종과 주황후, 종실, 여러 왕들, 부마, 공주들은 죄다 머리는 두건으로 동여매고, 양가죽을 걸치되 윗몸 일부를 드러낸 차림으로 금병의 압송 하에 금나라 아구타 종묘에 도착하여 ‘견양례, 끌 견)’를 행하였다. (다른 기사에 의하면, 금나라는 두 마리 양을 잡고 피가 뚝뚝 흐르는 양가죽을, 황제 부자의 웃통을 벗겨 맨살에 걸치게 했다. 부자는 이 차림으로 한 발자국에 한 번씩 머리를 땅에 박는 절을 하면서 아구타의 릉을 세 바퀴나 돌았다 한다 ;역주) 흠종의 아내인 주황후는 이런 희대의 치욕을 참지 못 하고 그날 밤 목을 맸고, 다행히 발견되어 깨어났으나 이번엔 물에 몸을 던져 결국 죽었다. 다음날 금태종은 명을 내려 휘종을 혼덕공(덕이 혼미한 이)으로, 흠종을 중혼후(아주 혼미한 이)로 봉하였다. 그리곤 흠종의 생모 이하 300여 명 종실 여가족들은 전부 궁의 노비가 되었고, ‘옷 빠는 곳’ 에 보내져 고역에 처해졌다.(역주 ;이 부분은 아래 상자 기사 끝 부분 참조)
금은 부녀자를 대규모로 요구하였다. 그들은 먼저 천문학적 액수의 전쟁배상금을 요구하는데, 이는 송의 속사정을 훤히 꿴 상태에서 나온 하나의 술책이었다. 앞에서 말한, 금 얼마 은 얼마 식으로 요구를 하는데(기재된 액수는 앞에 쓴 것과 서로 다르다. 중요한 건 천문학적..), 그들의 의도한 바는 바로 송의 부녀자였다. 그들은 이렇게 요구했다. “금 얼마 은 얼마...열흘 안에 수레로 보내라. 만일 부족하면, 공주 또는 왕비(황제의 며느리) 1인=금 천 정, 옹주1인=금 오백정,...종실부인=얼마, 족실 부인=얼마,...단, 금나라 사령부가 받는 사람만 받는다.(골라서 받는다, 이 말은 너무 박색은 퇴짜란 소리로 들린다)”금나라의 의도는 송의 국토와 재물과, 거기에 여인까지 차지함이었다. 원래 요구액이 금100만정인데, 황제의 딸과 며느리의 값어치가 금1000정이니, 황제의 딸과 며느리의 가치로 쳐도 1000명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된다. 흠종은, 할 줄 아는 건 시사 읊는 것과 묻지마 yes뿐인지라 이번에도 묻지마 결재, 일단 응락부터 하고본다. 허나 아무리 부유했던 송이라도 요에 뜯기고 금에 뜯기고,..재정은 고갈되었고,..갈수록 커진 금액은 불감당인지라,
비빈 83인 황제의 며느리 24인 공주와 옹주 22인 =다 합쳐 금134000정. 왕첩28인 종실의 딸52인 종실의 곁가지 딸 195인=다 합쳐 얼마 ...=다 합쳐 얼마...=다 합쳐 얼마.....이런 식으로 아무리 채워도 채워도 요구액에는 모자랐다. ...
정리하면, 이리하여 정강 원년(1126) 금나라 군사에 의해 북송의 수도가 함락된 후 노획된 포로가, 후비 3000여인 종실남녀 4000여인 황제의 인척 5000여인 각종기술자 3000여인 관기 3000여인 민간 미녀 3000여인 각급 대신과 종실의 가족 수천 명이었다.
당시 일을 기록한 책(開封府狀) 1127년 2월 부분에는 ‘여자포로가 11635명으로서, 그중 공주가 21인’이라 기재되어 있다. 휘종의 딸은 모두 26인인데 그중에 4인은 요절했고 가장 어린 한 살짜리 딸은 북으로 이동시에 어디론가 생사 불명, 그 나머지 21인이 일망타진된 셈이다. 여자포로들은 북행 도중에 부지기수로 죽었는데,
(또 다른 책의 기재) ‘2월 20일에 신왕의 부인이 어디에서 자살, 그 외에 여자 포로들의 죽음이 그치지 않았다.’ ‘2월 24일 모 공주(16세)가 병으로 사망’ ‘2월 25일 모 공주(16살) 어디에서 돌아가심’ ‘2월 28일 모 공주(16살) 같은 곳에서 돌아가심.’
북송은 멸망했지만 휘종의 아홉째 조구가 강남으로 가 남송을 세워 송의 명맥을 잇는다. 고종이다. 조구의 아버지인 ‘풍류황제’‘예술가 황제’ 휘종은 딸 뿐만 아니라 아들들도 금인들에게 일망타진 당했는데, 이 조구만은 예외였다. 그가 화를 면할 수 있었던 연유는 막 ‘최후의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에 그가 금으로 가는 사신이었고, 이에 국경 근처에서 백성들이 ‘전쟁이 터진 이제, 범 아가리로 들어가는 격이다’며 말고삐를 붙잡고 말려준 덕분이다. 북으로 끌려간 사람 중에는 조구의 생모와 왕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2월 29일 모모 두 비와 두 공주가 말에서 떨어져 낙태하여 더 이상 이동할 수 없었다.’원래 출발 때인 1월 16일에 ‘임신한 여자는 의원을 불러 낙태시켜라’(南征錄彙에 기재) 명령하였고 모모 공주는 시집도 안 갔는데,.. 아마도 이들 두 공주와 두 비는 당시 두 달 무렵에 (강간당하여) 임신했으리라. ‘3월 4일 황하를 건널 때, 금나라 모모 대왕이, 임신한 모 공주와 모 공주가 말을 같이 탄 모양을 보고선, 모를 죽이고 시체는 황하에 버리고 모는 데리고 갔다.’이 모 대왕은 조구의 처 형비를 강간하였다. 형비는 하남 어디어디에서 자살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죽지 못했다.
노상의 참상, 일곱 무리 중 한 무리에 ‘부녀자 3400여 인이 3월 27일 어디에서 출발하여 4월 27일 북경에 도착, 남은 부녀는 1900여 인이었다.’(呻吟語에 기재) 한 달 만에 거의 반이 죽었다. 살아남은 자는 행운이라 하겠으나, 그들에게 남겨진 운명은 비극을 면할 길 없었다. 5월 23일 조구(남송 고종)의 생모인 위후와 아내 형비 등 일행은 금나라 상경에 도착하였다. 금 황제는 이들을 접견한 후, 위후 형비 공주 모모 등등을 ‘옷빠는곳(세의원)’으로 배치했다. 그런데 이 ‘세의원’이란 곳은 옷 빠는 곳이 아니라 ‘군영 내의 기원’이었다.(역주 ;원문에는 ‘군기영’, 현대식으로 말해서 종군위안부) 위후 등 18명의 귀부인이 먼저 들어갔다. 나중에 휘종이 도착한 후에 세의원은 북적거렸다. 「呻吟語」에는 이렇게 기재되어 있다. ‘비빈 왕비 공주 종실부녀는 예외 없이 상체(일부)를 노출시키고 양가죽을 걸쳤다.’그 차림은 여진족 부녀들 차림이라 한다. 또 누군가 수치를 참지 못 하고 자살을 기도했다...이들은 세의원에서 10년 안팎 세월을 보냈다. 그리곤 각자의 운명을 밟아갔다.
오래지 않아 금나라 사람들은 그들을 한주(오늘날 요녕성 창도 북팔면성)로 유배 보냈다. 15경의 밭을 주며 역시 자급자족케 했다. 이때 진회는 두 황제를 떠나 금나라의 권신인 달라에게 몸을 의탁했다.
(진회는 남송을 말아먹었다는 평가를 듣는 사람이다. 이때만 해도 금의 포로였으되, 후일 남송으로 넘어갈 수 있었고, 거기서 남송의 대신이 되었다. 흔히들, 남송의 충신 악비의 죽음은 진회 탓이었다고... 이 글에서 그의 이름이 뜬금없이 등장하는 이유는 송나라 역사에서 진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역주) 천회 8년(1130) 7월에, 금인들은 두 황제 일행을 다시 오국성(오늘날 흑룡강성 의란현)으로 옮기게 했다. 그들이 물길을 따라 막 떠나는 순간에 금 태종의 조서가 도착하여, 두 황제를 수행하던 종실 일행 500여인은 림황(오늘날 내몽고 파림 좌기남)으로, 내시 려안국 등 300인은 성주 성주(오늘날 요녕 개원 동북 로성진)로 이주하라는 명령이 전해졌다. 이리하여 두 황제 신변에는 가속 외에는 종실 사람 여섯만 남게 되었다. 당시 휘종은 일행 모두를 함께 있게 해달라고, 조서를 전하는 사자에게 요구하였으나 승낙을 얻지 못했다. 휘종은 (떠나는) 모두에게 이런 말만 할 수 있을 뿐, ‘그대들이 나를 따른 이래 환난 근심 기쁨을 마땅히 같이 누리고 같이 짊어졌다, 이제 속박 받는 이 처지에 참으로 아무런 방법조차 없구나!’ 사람들은 머리를 감싸며 통곡한 후 이별했다.
이 당시, 남송이 파견한 통문사 홍호가 금나라 조정에 의해 대동에 연금 당하는 중이었는데, 두 황제가 오국성에 당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황금으로 상인 하나를 매수하여 비밀 서신을 전하게 했다. 이리하여, 강왕(조구, 휘종의 아홉째)이 이미 3년 전에 (남송 황제로)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드디어 두 황제도 알게 되었다. 자연히 두 황제는 귀국의 희망을 조구에게 걸었다. 허나 그들이 어찌 알았으랴. 조구는 아버지와 형의 귀국을 자기 제위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고, 때문에, 금나라에 대항할 의사가 근본적으로 없었음을!
천회10년(1132), 그들이 오국성에 당도한지 세 번째 해였다. 6월에, 휘종의 열다섯째 및 부마가, 휘종 및 휘종의 열여덟째인 조진이 모반을 도모한다고, 무고하였다. 금나라 조정은 즉시 사람을 보내 심문하였고, 상황을 낱낱이 조사하여 명백히 밝힌 후, 열다섯째 및 부마를 죽였다.
오국성에서 휘종은,
國破山河在,나라는 깨졌으되 (떠나온 곳) 산하는 그대로겠네,
宮廷荊棘春,(옛날 그) 궁 뜰에는 가시나무가 봄을 알리겠구나,
衣冠今左衽,의관은 오늘 왼쪽으로 여미고,
忍作北朝臣 욕됨을 참고 북조(금나라)의 신하가 되었네.
란 시를 남겼다.
***
옷깃을 왼쪽으로 여밈은 북방민족의 풍속이다. 위 시와 아래 시, 두 수의 번역은 너무 믿으면 안 됨.)
다른 한 수도 지었는데,
茸母初生認禁烟,떡쑥이 새로 돋음에 (고향의) 양귀비인가 하노라,
無家對景倍凄然。집 없는 처지에 경색을 대하니 배로 처연쿠나,
帝城春色誰爲主,(떠나온) 황성 짙은 춘색 이젠 뉘라서 주인일꼬,
遙指鄕關涕淚漣。멀리 고향 관문을 가리키며 줄줄 눈물이고나.
북방에서, 새로 돋아난 떡쑥을 보고 변경 궁중의 금연(금연 no smoking, 여기선 뭔 소리인지 해석 불능, 아편 즉 양귀비가 아닐까 추리 ;역주)이라 여김에, ‘돌아보니 고향산천 삼천리,남쪽 하늘 바라보나 눈길은 잘리고 기러기조차 날지 않는구나 -家山回首三千里 目斷天南无雁飛’, 지난 날 영화를 추억하다 생각이 영락한 자기 신세에 미침에 눈물이 종횡으로 흐름을 탓하기 어렵도다. 천회13년(1135) 4월 21일에, 휘종은 처참한 신세로 생을 마쳤다. 향년 54세였다.
흠종 또한 시와 사에 능했다. 새외진에서 「西江月」을 지었다.
(그만 좀 짓지..해석 없음)
歷代恢文偃武,四方晏璨无虞,
奸臣招致北匈奴,邊境年年侵侮,
一旦金湯失守,万邦不救鑾輿,
我今父子在穹庐,壯士忠臣何處?
塞雁南去,高飛難寄音書,
只應宗社已丘墟,愿有眞人爲主,
岭外云藏曉日,眼前路憶平蕪,
寒沙風緊淚盈裾,難望燕山歸路。
사는 애상, 회한, 그리고 실심으로 가득하다.
남송 소흥11년(1141), 고종은 아버지 휘종과 어머니 정태후, 처 형씨의 유골과 생모 위현비의 귀환을 조건으로, 금나라와, 쌍방은 회수를 경계로, 송은 금에 신하로 칭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협상을 타결하였다. 이리하여 금조정은 다음해 4월에 사신을 보내, 휘종 및 정태후 그리고 형비의 영구, 그리고 위현비를 송으로 돌려보냈다. 행렬은 8월에 림안(오늘날 절강성 항주)에 도착하였다. 위현비는 향년 80에 생을 마쳤다.
위현비가 귀환할 때, 흠종은 얼굴 가득히 눈물을 흘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돌아가시면 아홉째(남송 고종)와 승상(진회)에게 말해주소서. 나는 태을궁 궁사(어떤 궁 하나를 주관하는 관리)로 만족합니다. 감히 그를 원망치 않겠습니다.” 이 말은, 만약 고종이 자신을 구해 돌아가게만 해준다면, 궁중의 일개 종(진짜 종이 아니고, 중국식 표현에는 관리도 ‘황제의 종’이다 ;역주)이 되고자 함이며 그것으로 만족한다, 감히 복위라니 근본적으로 생각이 없다, 이런 의미였다. 위현비 또한 눈물을 비 오듯 흘렸다. 그리고 그와 헤어졌다. 위현비는 림안으로 돌아가서 자녕궁에 거처를 잡은 후, 허나 고종은 흠종을 영접할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음을 알게 되고선, 흠종의 말을 감히 고종에게 전해주지 못했다. 이리하여 오국성에서 학수고대 근 20년, 기다리고 또 기다려 1161년 5월 19일, 결국 귀환 기별을 듣지 못한 채, 흠종은 절망에 빠져 한스럽게 생을 마쳤으니 향년 51세였다. 휘종과 흠종 두 황제는 이렇게 대 치욕의 반생을 마쳤다.
원래 금나라 군사가 변경을 공략할 때, 황실의 옥첩(사람의 명단이라 짐작 ;역주)과 대조하며 이 잡듯이 뒤져 조씨 송나라 황실 사람들을 체포했다. 휘종의 형과 동생 또한 행운은 없었다. 휘종의 32명 아들과 22명 딸들은 아홉째 조구 및 강보에 쌓인 한 살짜리 딸 외에는, 죄다 일망타진 당했다. 옛 사람이 이에 탄식하며 말했다 :“먼 옛날 이래로, 망국의 치욕으로, 조씨 송나라 같은 경우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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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기술에 의하면 :훗날 남송 고종이 되는 조구 및, 휘종의 노여움을 받아 휘종에게 내침을 당해 평민이 됨으로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덕분에 그야말로 새옹지마 식으로 화를 면한 휘종의 어느 비, 딱 이들 두 사람만 ‘재앙을 면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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