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바둑

060000 [펌譯] 聶衛平 아들 孔令文 (百度百科)


얼마 전, 일본기원 원생이 단체로 중국으로 공부하러 나갔다는 일본 發 記事에, 단장이란 양반의 이름이 孔모모씨라..게다가 일본으로 귀화한 중국 혈통이라.. 호기심이 생겨서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출처 :(아래 사진 포함) 百度百科(중국 인터넷 백과사전 사이트 中 하나)



사용자 삽입 이미지

孔令文(1981~), 일본 화교. 바둑 六단 棋士. 중국 바둑 기사 섭위평/공상명(聶衛平/孔祥明-이혼했음)의 맏아들.


공령문의 아내는 일본 바둑 九단 小林覺(木谷實 九단의 제자)의 딸인 小林淸芽(청아)이다.

공령문은 일본 아마추어 강호인 菊池康郎(국지강랑)에게 師事(사사)하였고, 2003년에 프로 100승을, 2007년에 六단이 되었다.


1991년 섭위평과 그의 첫 부인 공상명의 이혼 후에 갓 10세의 공령문은 엄마를 따라 일본으로 넘어가 정착한다. 이때부터 공령문의 마음 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생겼다. 2003년에 공령문이 일본 바둑 名家(명가) 小林覺의 딸 小林淸芽가 결혼하였다. 섭위평은 당시 이 기회를 빌려 아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었다. 그러나 聶이 사람을 시켜 일본으로 보낸 축의금을 아들은 단호히 거절했다.

“당시만 해도 여전히 앙금이 남아있었습니다. 열 살의 저를 데리고 일본에 건너와서 고생하던 엄마에 대한 인상이 깊었기 때문일 겁니다.”공령문의 회고이다.


2006년 공령문이 북경으로 (일시) 돌아갔다. 聶은 수도(首都)공항으로 직접 마중을 나갈 정도로 이 일을 중요시하였다. 아직 정정한 聶이 비행장으로 나가 맞이하였는데, 이런 일은 聶에게 몇 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이리하여 15년간 얼어붙었던 부자관계가 어느 정도 풀리기 시작했다. 다음날 저녁 聶은 집안 잔치를 열었고, 아들과 함께 밤 아홉시까지 술을 마셨다. 졸음에 떨어진 손자만 아니었다면 이 술자리가 몇 시까지 이어졌을지 몰랐다. 공령문이 이후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섭위평은 ‘봉투’를 재차 꺼냈다고 한다. 손자 상견 예물 명목이라 이번에는 공령문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버지는 손자를 보자 퍽이나 좋아하시며 ‘잘 챙겨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공령문이 결혼하고 孔德志(공덕지)가 태어난 후 할아버지 섭위평으로서는 손자와의 첫 대면이었다. 잔치 중에 섭위평이, 손자가 북경에 좀 머물수 없겠느냐, 제안하였으나 공령문은 거절했다.

“애가 아직 어린데다가 북경 기후가 건조해서, 요 며칠 벌써 애가 기침이 좀 있습니다. 때문에 아무래도 돌아갈 때 데리고 가야겠습니다. 그래도 이후에 기회가 된다면 가능한 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공령문이 이번에 아버지를 찾아뵌 것은 즉흥적 결정이 아니라고 한다. 공령문네는 2005년에 이미 이번 방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정이 작년에야 났습니다. 본래 작정은 결혼 후 바로 귀국해서 아버지를 뵙고 싶었습니다만,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임신을 하였고 이후 계속 아기 때문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전의 갈등 때문에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았다,.. 전혀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내도 역시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예의상으로 쳐도 당연히 돌아가 뵈어야지요. 애도 좀 컸고 하니 돌아가서 뵙자, 작년 연말에 비로소 작정을 하였습니다.”


이번 귀로에 공령문 부부는 섭위평에게 예물을 준비했는데 예물이 상당히 특별했다.

“전에 아버지가 ‘담배 한 갑이면 된다’하셨지요. 그래서 공항에서 Mild Seven을 샀습니다. 淸芽도 여러 가지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다 성의죠.”


“결국 부자지간 아닙니까. 감정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만, 어릴 때와 달리 지금은 여러 일들이 이전처럼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납득이 안 가는 점이 있긴 합니다만, 성장하고 나서는 말입니다. 좀 더 관대해져야 한다, 보다 넓게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은 했지만 무심한 다음 한마디에서 아버지에 대한 역시 완전하지 않은 감정이 엿보였다.

“아이가 하나 더 태어난다면 성을 聶씨로 하실 생각이 있는지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차례대로 孔祥明(공상명), 王靜(왕정), 蘭莉婭(란리아) 


두 번째 부인이 스튜어디스였던가? 아무튼 약 20십년 전의 일. 聶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어쩌다 보니 스타일 괜찮은 여자를 만났고, 어떻게 하다 보니 덜컥 임신이 되어버렸고, 급기야 뱃속 아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혼이란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미친 놈 소리를 들으며 이혼했다고 한다. 聶은 후일 이 이혼이 자신의 일대 판단착오였다 회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