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慘憺(참담) 중국바둑 韜光養晦 - 中韓 大戰 고비 年에 일단 우세
(‘참담’은 原文의 ‘煎熬’-지질전 볶을오 /고통을 당하다=suffer의 의역임 ;譯註)
( wiki -韜光養晦:'칼날의 빛을 칼집에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는 뜻. 원래는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조조의 식객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재능을 숨기고 은밀히 힘을 기른 것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과거 등소평 시절 중국의 대외정책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자주 인용한다. ;譯註)
출처 :張卓 중국週刊 2009.09.01 Tom.com으로 轉載 ☜
1부)
2009년 5월 4일, 한국기원. 1층 바둑 방송 스튜디오에서는 바야흐로 古力(고력) vs 한국 强豪(강호) 조한승 대국을 방송 중이었다. 격전이 있었고 결국 古力이 총 3:1로 제1회 BC카드배 우승을 쟁취하였다. 그리하여 세계 타이틀 여섯 개째.
古力이 현 세계 1인자임에 그 누가 이의를 달겠는가. 세계 7대 프로 바둑 대회 타이틀 중에서 그가 다섯 개를 보유 중이다. 나머지 두 개 세계타이틀은 각각 한국 최철한(응씨배) 및 이세돌(삼성배) 手中에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古力의 여섯 번 우승 중 절반 이상이 한국 棋士들에게 승리하여 쟁취하였다는 점이다.
중국 갑조리그의 우수성은 갈수록 확연해지는데다가 다수의 우수한 청년 棋士가 쏟아져 나온다. 한국 바둑 일인자 이세돌은 한국리그를 포기하고 중국 갑조리그에 가입하였다.
이전 30년 동안 중국은 참담(譯註 ;原文은‘煎熬’)하였다 :1980년대에, 비록 中日승발전에서의 섭위평의 찬란한 연승이 있긴 하지만 세계 타이틀은 대체로 일본 6대 초일류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1990년대 중반에, 한국 천재 棋士 이창호가 중국 양대 고수를 밟고 20여 개 세계대회 타이틀을 쟁취하였다.
미친 듯한 聶衛平(섭위평)
1984년 8월 27일 中日 바둑계가 회합을 열었다. 안건은 중일바둑대항전. 일본 측은 방식으로 승발전 방식을, 명칭으로 ‘중일슈퍼바둑대회’를 제안하였다. 「신체육」誌 郝克强(학극강)은, 중국인은 ‘슈퍼’란 말에 익숙하지 않으며 방식은 승발전으로 하되 ‘중일바둑승발전’으로 부르자고 역 제의하였다.
고작 오전 반나절 걸려 중일바둑승발전이 탄생하였다. 당시의 참석자들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이 대회는 이후 중국바둑을 바꾸고 또한 세계바둑 地圖(지도)를 바꾸었다.
제1회 중일바둑승발전은, 쌍방 각 8인이 나왔고 중국 측에서 마효춘이 副將을, 32세의 섭위평이 주장을 맡았다. 일본 쪽 앞 출전자 5명은 모두 신예, 단지 小林光一(고바야시고이치)과 加藤正夫(가토마사오)만이 초일류 棋士였으며 주장 藤澤秀行(후지사와슈코)은 상징적 존재일 뿐이었다.
앞 5명으로 끝낼 수 있다 -일본기원은 호언장담하였다.
小林을 불러내면 합격이요 小林을 이기면 승리이다 -중국바둑협회의 목표였다.
만일 일본 선봉 依田紀基(요다노리모토)가 싹쓸이를 해버리면 어떡하지? -중국 바둑인들 다수의 걱정이었다.
이렇듯 한쪽으로 쏠리는 예측은 중일 양측의 현저한 실력차 때문이었다. 막 文革(문화대혁명)을 겪은 중국은, 대다수 棋士들이 지난 십 년 동안 바둑 둘 기회가 없었다. 1961년 일본 訪中團에 54세 기사 伊藤友惠(이등우혜)가 끼어있었다. 伊藤‘할멈’은 일본에서는 평범한 수준이었으되 중국에서는 8명의 일류 棋士에게 연승하였다.
대회가 시작되었다. 江鑄久(강주구)가 5연승으로 小林光一을 불러내었다. 小林이 또 중국 기사에게 6연승하였고, 중국 팀에는 주장 섭위평만 남았다.
이 한마당이 중국바둑의 운명을 바꾼 대회였음은, 후일이 증명한다.
산소통을 안고 등장한 섭위평은 黑 두집반으로 小林을 격파한다. 終局 후 小林은 한참동안을 머리를 부여잡은 채 침묵하였다. 또한 팬들과 만나는 장소에 나가려 하지 않으면서 줄곧 “저는 심경이 어지럽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어서, 섭위평은 加藤에게 백으로 네집반 대승하며 주장 藤澤을 끌어낸다.
최후 결전은 북경 수도(首都)체육관에서 거행되었다. 미친 섭위평은 세집반으로 藤澤을 격파하였고 제1회 중일바둑승발전은 중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는 몇 세기 이래 중국이 바둑시합에서 일본에게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당시 현장에서 관전하던 3000여 중국 바둑팬들은 감격하여 전원 기립, 장시간 박수를 쳤다.
중일바둑승발전을 회고하는 대다수 바둑인들은 섭위평의 승리가 운도 작용한 한편, 동시에 숙명적이었다 생각한다. 이 대회는 섭위평 바둑 인생 절정의 순간인 동시에 중국바둑의 對 일본 공포증을 타파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제2회 중일바둑승발전은 양측 각 9인이 출전한다. 일본인들은 복수일전이라 칭하였다. 1회 대회 패배 후 小林은 삭발로 意思(의사)를 표했다.
2회 대회에서도 같은 상황이 출현한다. 일본은 5명이 남고 중국은 聶 일인만 남은 국면. ‘졸병 없는 대장’ 섭위평은 네 명의 일본 고수들을 연속으로 이기고, 大竹英雄(오타케히데오)과의 결전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결전 당일 온 중국이 들썩거렸다. 등소평 一家 사람들도 함께 모여 앉아 시합결과를 기다렸다. 결과는 섭위평의 승리.
“승발전을 잘하는군.”
등소평이 말했다.
이후 바둑열풍이 중국을 뒤덮었다. 「주간체육계(體壇周報)」 바둑 기자 謝銳(사예)가 당시 대학 재학 중이었는데, 이렇게 회고한다. 매 宿舍(숙사)마다 바둑판이 있었고 모두들 한가해질라치면 바둑을 두었다. 국내대회, 국제대회를 막론하고 대회가 있으면 동료들은 죄 모여 생방송을 시청했다.
“섭위평 최대의 공헌은 다수의 아이들이 바둑을 배우게 만들은 데 있습니다. 중국 바둑 인구가 두 배로 불었죠.”
「新체육」誌 현 편집장 郝克强(학극강)의 말이다.
제3회 중일바둑승발전 개막 前 일본 주장 加藤은 말했다.
“棋士 생명과 명예를 걸고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도 聶선생은 주장 戰에서 加藤을 이겨 決定者(결정자) 역할을 하였고 중국은 대회 3連覇(연패)를 이룩한다. 일본 매체는 ‘우린 恐聶症(공섭증)에 걸렸다’라고 한탄한다.
1988년, 중국바둑협회는 중일바둑승발전 11연승의 섭위평에게‘棋聖’칭호를 수여한다.
제4회 중일바둑승발전 패배 후 聶선생이 비록 서서히 神壇(신단)에서 내려갔지만 그의 중일바둑승발전 11연승은 중국 현대 바둑이 일본을 따라잡는 기념비적 사건이 되었다.
삼국 鼎立(정립)
1980년대, 섭위평의 11연승이 중국바둑이 일본을 앞섰다는 표시는 아니다. 바둑은 여전히 일본 천하였다. 일본은 6대 초일류 고수(譯註 ;林, 大竹, 加藤, 武宮, 小林, 조치훈)들을 보유했고 木谷(목곡)도장에는 아시아 각지로부터 바둑 배우러 온 소년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조훈현, 훗날 ‘바둑황제’라 불리게 되는 한국의 젊은이도 목곡도장에서 공부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한국바둑은 飛翔(비상)하는 시기였습니다. 다만 中韓 간에 국교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한국 선수와 시합을 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바둑 八단 王元(왕원)의 말이다.
조훈현은 한국바둑 성장의 증표로 간주되었다. 그는 어릴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바둑을 배웠고 병역 때문에 귀국했다. 당시 한국바둑은 강하지 못했기에 그는 빠르게 한국 內 일인자가 되었다.
이때 대만의 저명한 기업가 응창기 선생이, 중일바둑승발전에서 섭위평이 일본 고수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는 것을 보고서 세계 차원의 바둑 대회를 막 내놓으려던 참이었다. 준비가 무르익는 차에 일본인들이 선수를 쳤다. 1988년에 일본 富士通(후지쯔)이 최초의 세계대회를 창설한다. 제1회 대회는 일본 기사 武宮正樹가 우승을 차지하였고 섭위평은 3위에 그쳤다. 뒤에 열린 응씨배는 4년에 한 번 열리며 우승 상금이 40만 달러라서 바둑 올림픽으로 불리었다. 제1회 응씨배에서 섭위평과 한국의 조훈현이 뭇 고수들을 물리치고 결승에 올랐다.
1차전 세 판에서 섭위평은 2:1로 앞서나갔다. 최후 4,5국은 싱가포르로 옮겨서 진행되었다. 그 전에 많은 중국인들은 한국 기사의 실력을 알지 못했고 섭위평이 필승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조훈현이 연속 두 판을 이겨서 초대 응씨배를 가져갔다.
하룻밤 만에 조훈현은 한국에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영웅이 되었다. 그가 개선할 때 공항에서부터 서울까지 길가에는 환호하는 사람들로 가득찼다. 더욱이 曺는 40만 달러 전액을 한국기원에 기부하여 신인 양성에 쓰도록 하였다. 이 일전 이후 조훈현은 세계대회 결승에 일상다반사로 진입하였다. 그는 혼자 힘으로 한국 기사들을 이끌어 세계무대에 올렸으며 세계 바둑계를 中日韓 삼국 鼎立(정립) 시대로 만들었다.
이후 조훈현은 한 가지 공헌을 더한다. 그는 기이한 棋士 이창호를 키운다. 이창호가 바둑계를 제패하던 십년은 바로 한국 바둑의 전성기 십년이었다.
2부)
覇權(패권) vs 慘憺(참담)
1990년대 중국바둑은 단 두 글자로 형용할 수 있다 :참담(譯註 ;원문은 煎熬)
몇 차례 세계대회에서 섭위평은 매번 마지막 고비를 못 넘고 준우승에 머무른다. 棋力은 이미 하강세였다. 마효춘은 세계대회 2개를 연속 우승하자마자 한국 棋士 이창호란 거대한 봉우리와 맞닥뜨려야만 했다. 1992년에 16살의 이창호는 제3회 동양증권배 결승에서 일본 초일류 巨星 임해봉을 3:2로 이기고 우승을 하여 세계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운 이래 10년 동안 세계대회를 20차례 우승하였다.
1990년대 중반 이래 21세기까지, 바둑이란 두 字는 곧 한국을 뜻함이었다. 1995년부터 2005년 십년 동안 중국바둑은 2000년 兪斌(유빈)의 LG배 우승으로 세계대회 우승이 고작 하나였다.
1970년대 출생 기사 常昊(상호) 및 羅洗河(나세하)가 어쩌다 한두 번 세계대회 우승을 하곤 했지만 이창호 독주를 막을 길은 도무지 없었다. 십몇 년 동안 이창호는 중국바둑의 苦手 모양 지치지도 않고 중국의 양대 일류 高手와 격전을 벌였다. 마효춘으로부터 상호까지 ‘이창호 만나면 不勝(불승)’은 중국바둑의 뒷골을 당기는 숙명처럼 보였으며, 1970년대 生 중국 기사들을 멍하게 만들었다. 상호, 바둑 신동이란 불리던 기사가 이창호의 제압 하에 세계대회 6연속 준우승에 머물러야 했고, 화가 난 바둑팬들은 그에게 ‘常물麵’(譯註 ;원문 常麵麵(상면면) -기풍이 부드럽 또는 연약하며, 끝내야 할 순간에 끝내지 못한다 해서 붙여진 별명. 麵은 밀가루 면=밀가루/국수/연하다. 常昊의 이름자‘常’은 항상 상 字. 따라서 常麵麵을 직역하면 ‘맨날 물렁하게만 둔다’. /Oro 모 네티즌은 ‘상라면’이라 번역하기도.)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때의 일본 바둑계 또한 걱정스러웠다. 6대 초일류 고수들은 이미 나이 들었고 젊은 선수들은 전혀 치고 올라오지 못했다.
한국바둑은 한 천재소년의 깜짝 출현으로 中日韓 삼국 간의 경쟁에서 절대 우세를 점하였다. 많은 프로들이 이창호란 보기 드문 괴물에 감탄하였다 :많은 경우, 바둑 시작에 상대방이 명백히 좋고 중반도 괜찮고, 그런데 마무리에 가면 마치 원래부터 자기 것인 양 이창호가 완강히 승리를 가져가버린다.
“마치 달리기 시합처럼 이창호가 영원히 어깨 차이로 이길 뿐입니다.”
현재 중앙방송국 바둑 해설자인 프로 기사 王元(왕원)이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마효춘, 상호... 그들 모두 이창호에 의해 고통을 당해 自信(자신)을 잃었어요.”
바둑 최초의 프로리그
만약에 갑조리그가 없었다면? 아마도 중국 기사들은 여전히 한국 기사들에게 짓눌리고 있으리라.
1999년에 중국바둑 갑조리그가 탄생한다. 당시는 축구 프로 리그가 막 선을 보인 순간이었고, 중국기원은 ‘프로化’가 축구에 거대한 효용을 가져다주는 것을 보고 바둑계에도 일대 혁명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당시는 개혁, 개방이 한참 진척되어 사회에 개인 기업이 많이 출현하였습니다. 1999년 이전에 바둑 대회를 후원하겠다는 기업이 몇 있었는데, 다만 액수가 너무 작았습니다. 1999년에 우리는 시기가 성숙되었다, 바둑의 프로화를 시험해볼 수 있겠다 라고 판단했습니다.”
현 중국기원 부원장 王汝南(왕여남)이 기자에게 밝혔다.
현대적 의미의 프로 바둑리그는 설령 일본이나 한국이라 해도 실행되지 않은 상태였다.
일본은 가장 먼저 바둑을 직업화시킨 국가이다. 幕府(막부)시대부터 일본에는 직업棋士기 있었다. 다만 프로리그는 없었고 대부분이 각종 다양한 명칭의 타이틀전으로서, 상금이 풍부했으므로 프로 기사는 매년 각종 대회에 참가만으로도 화이트칼라 계층의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다.
일찍이 1980년대 중반에 중국은 일본을 배우고자 프로 式 대회 몇을 시험해본 적이 있었다. 「新체육」및「바둑」이 ‘新체육배’를 개최하였는데, 그러나 팬들의 수가 적었고 報道力(보도력)이 딸려 효과가 그다지 좋지 못했고, 결국 몇 년 못 가 소리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의 시각으로 회고해보면, 당시의 중국은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전환단계였기 때문에 일본의 프로 形 모델이 당시 사회적 배경에 부합하지 않았던 셈이다.
대회 방식을 어떤 방식으로 할까? 개인名義(명의)? 아니면 단체名義? 제1회 갑조리그는 참조할 그 어떤 모델도 없었다. 삼 개월 여 연구 끝에 결국 중국기원은, 매년 각 성(省) 간의 단체전을 기초로 하되 이탈리아 축구 리그의 안방/원정 경기 방식을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다.
중국기원이 각 지방기원에 의견을 소집할 당시에, 직업화 방향에는 모두들 찬성하였으나, 역시 돈이 문제였다. 들어갈 돈이 매년 일이 만에서 최소 십 몇 만으로 폭등하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리그가 시작되기 전에 중국기원은 최악의 상황을 想定(상정)해보았었다 : 만약 8개 팀이 참가한다면 시동을 건다 ;만약 8개 팀이 안 된다면 일단 보류한다. 그런데 갑조리그 첫해, 참가 팀은 열 개였다. 기존에 실력이 강력하던 절강(折江) 팀은 여러 가지 문제로 리그에 들어가지 못했다.
1999년 제1회 갑조리그는 강령(江鈴)公司가 160만元으로 타이틀 후원권을 따냈고, 이후 연 4년을 지속하며 총 1000여 만元을 투입하였다. 제5회 갑조리그에는 ‘호묘(好猫)’가 1000만元으로 타이틀 후원권을 획득, 갑조리그 신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2004년 6회째에, 갑조리그는 全裸질주(streaking스트리킹)를 해야 했다.
“살림을 꾸려보지 않으면 쌀이 비싼 줄 모르지요.”王汝南이 「중국週刊」기자에게 말하기를 갑조리그 십년 이래 그를 가장 곤란케 했던 사건이라고, “저는 초조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후에 생각하기를 정말 안 된다면 중국기원의 준비금으로라도 리그를 해나가자 라고 생각했습니다.”후에 상해 오특래(奧特萊 ;音借인 듯 -譯註)公司가 긴급구원을 해주어 난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최초의 위기를 넘긴 후, 갑조리그는 혼란의 극을 달리던 중국 축구리그와는 다른 길을 갔다. 정상의 길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바둑團(단)의 자금 상태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다. 하나의 측면으로는 후원 금액이 크지 않기 때문이고 다른 측면으로는 후원자 대다수가 바둑 매니아이기 때문이다.
“바둑만의 특별한 현상입니다. 바둑에 일단 빠지면 발을 빼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그런 팬들의 충성도는 매우 높습니다. 또한 말입니다. 바둑을 즐기는 분들은 素養(소양)이 높아서 대체로 고위직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열정으로 갑조리그를 후원합니다. 손해만 안 보면 좋다는 식이죠.“ 「주간체육계(體壇周報」사예 기자의 말이다.
귀주(貴州) 팀 사장 姜衛(강위)가 전형적이다. 귀주 안순(安順) 그의 집무실에는 언제나 바둑판이 펼쳐져 있다. 귀주 팀이 홈팀으로 치루는 시합 때면 그는 언제나 바둑 몇 판을 두어줄 記者 그리고 棋士를 부른다. 귀주의 바둑 고수 몇을 하급자로 뽑아 틈틈이 대국을 한다. 또한 귀주 팀 전력강화를 위해 그는 거액을 아까워하지 않고 한국 랭킹 1위의 고수 이세돌을 청하여 오게 만들었다.
“만약 후원자가 바둑을 모르는 인물이라면, 얼마 안 가 ‘바둑이 떠들썩하지도 않고 흡인력도 없구나’ 여길 것이고, 곧 후원을 그만두어버릴 것입니다. 갑조리그 탄생 십년에 80%의 후원자가 바둑을 잘 아는 인물입니다. 현재 갑조리그의 사회적 역량과 시장에서의 힘은 기원 수뇌부의 능력 이상입니다.” 감개무량한 王汝南(왕여남)의 말이다.
3부)
古力을 키워내다
갑조리그 십년은 중국바둑 韜光養晦 십년이다. (wiki -韜光養晦:'칼날의 빛을 칼집에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는 뜻이다. 원래는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조조의 식객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재능을 숨기고 은밀히 힘을 기른 것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과거 등소평 시절 중국의 대외정책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자주 인용한다. ;譯註)
시합방식 변화 :외국 선수 허용, 이세돌 이창호 등 한국 최고수를 초빙, 갑조리그가 전 세계 최고 수준의 바둑리그가 되게 함 :이적제도를 차츰 정비하며 일체를 자본에 의하도록 하고 행정 간섭을 최소화하였다. 2009년 산동(山東)의 절정 고수 謝赫(사혁)이 96만元에 중경으로 이적하여 갑조리그 이적 시장 최고가를 기록하였고, 주장제를 설립하여 각 팀 최고수들이 반드시 만나서 붙게 하였다. 한국 랭킹 1위 이세돌은 ‘중국 갑조리그의 주장제가 그를 흡인케 하는 主원인이며, 일 년을 두면 중국 최고수들과 한 번씩 붙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
기사의 생활 또한 윤택해졌다 :1999년 중국바둑협회가 갑조리그를 발동시킨 이후 중국의 다수 기사들이 갑조리그만으로 수입이 10만元을 넘어섰다. 만약 매년 각종 대회까지 보탠다면 기사들의 수입은 상당한 수준이 된다.
갑조리그를 내놓기 전의 중국바둑이 가던 길은 전문화(譯註 ;국가주도형/차별화로 이해)로서 일류 고수는 죄다 국가가 양성했다. 섭위평, 상호는 국가적 차원에서 키워져 나왔다. 국가바둑대에 들어가지 못하는 기사들은 高 차원의 바둑을 둘 기회가 없어 생계가 어려웠으며, 지방기원에서 받는 약간의 급여 외 나머지 부분은 각지로 뛰어다니며 상금을 벌어 채워야 했다. 王元 八단은 말한다. “과거 시합방식은 도태제였습니다. 천리 길을 기차에 앉아 급히 가지만, 만약 첫판을 지게 되면 바로 돌아가야 하지요. 상금은 말하지도 마세요.”
현재 갑조리그 매년 22판의 高 수준의 시합은 이들 기사들에게 판數를 보장하기에 충분하다. 90년대 生 棋士 古靈益(고령익)의 어머니 張曉榮(장효영)이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갑조리그 참가 전 고령익의 가장 안정적 수입은 성도기원(成都)이 주는 몇 백 元 급여였다, 갑조리그 참가 후 母子의 북경생활에 衣食(의식) 걱정이 없어졌다.
중국바둑협회 주석 陳祖德(진조덕)이 일찍이 흐뭇하게 말하였다.
“나는 평생에 중국바둑을 위해 두 가지 일을 하였다. 하나는 1995년 棋士 등급점수 제도를 내놓은 일이요, 둘은 1999년 갑조리그를 만든 일이다. 바야흐로 棋士들은 시장경제가 주는 각종 좋은 점을 누리는 중이다.”
과거 국가 주도형 고수 양성체제로부터 벗어난 후 갑조리그는 신예들의 무대가 되었다. 이변은 언제나 가능하다. 금년 갑조리그 반환점 시점에 1위를 내달리던 사천교자(四川嬌子)의 선수 세 명이 90년대 生 棋士였는데, 그 중 18세의 고령익이 한국 최고수 이세돌을 메다꽂아 그의 갑조리그 연승을 19로 마감시켰다.
대다수 사람들이 말이 나올 때마다 갑조리그를 높이 평가한다. 더욱이 어떤 약팀이 강팀을 만나 이긴다 했을 때, 어린 선수들의 자신감이 상승한다, 심지어 장려금 일만元을 내놓아 승리하면 즉각 지급하는 팀들도 있었다.
“과거에 지도자로서 후배들을 교육할 당시, 저는 승리를 요구하였습니다. 현재 저는 갑조리그를 볼 때면 늘상 소년들에게 말해줍니다.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승리를 향한 집착을 요구하지 않는다.”
1999년 갑조리그에 막 참가할 당시 古力(고력)은 갓 16살이었다. 연장자로서 받은 인상에 그는 큰 바둑판 가에서 돌을 늘어놓던, 중경(重慶) 팀의 바둑소년이었다. 십년이 흘러 古力의 등급점수는 곧장 상승하여 국내 랭킹 1위가 되었고, 세계대회에서 줄줄이 여섯 개의 우승을 차지하였다.
만약 갑조리그가 없었다면 古力이 이다지도 빠르게 드솟지 못했으리라. 이 소년은 16세 초입에 각양각색 22개 기풍의 일류 기사를 상대로 죽어라 戰場(전장)을 누볐다. “古力은 갑조리그의 성공적 사례입니다. 갑조리그로부터 나와서 세계 타이틀 보유자가 되었고, 다시 중국바둑의 성장 요소가 되었습니다.(譯註 ;feedback을 말함)” 王汝南의 말이다.
「주간체육계」기자 사예의 평가는 더 직접적이다 :“갑조리그가 없었다면요. 천재는 그래도 나오겠지만, 80년대 生 90년대 生 신예들이 우르르르 분출되어 일본, 한국과 다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일본바둑 ‘消失(소실)’
일본바둑은 기어코 말을 잊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일본바둑은 세계대회 우승컵에 손을 대기가 극히 힘들어졌다. 그 최악으로 2007년 삼성배에서 일본 기사가 1회전에 전멸한 예가 있다.
“참담 그 자체입니다.”오랜 시간 동안 中日韓 바둑을 취재한 「주간체육계」기자 사예가 말했다. “실제상 현 시대를 삼국 정립 시대라 말할 수 없습니다.”
일본인들은 줄곧 바둑을 예술로 간주했다. 각종 대회는 일종의 ‘show(쑈)'이다. 일본에서 무슨무슨 棋戰이 벌어질라치면 무슨무슨 타이틀보유자만이 유현(幽玄) 특별대국실에서 둘 자격을 갖는다. 무슨무슨 대회에 기사들은 일본 전통복장(和服)을 입도록 명문으로 규정하였다. 이런 번거롭고 특이한 예식은 한편 전통에 대한 일본적 집착이란 일면이며 다른 한편 현대 바둑의 치열한 경쟁 구조 하에 그들이 점점 뒤떨어지게끔 만들었다.
중국기원협회 주석 王汝南(왕여남)은 中日韓 삼국 棋風(기풍)을 이렇게 분석한다. “한국바둑에는 그들의 완강한 민족성이 체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일본에게 질 수 없다 하는 정서가 줄곧 있으며, 그들만의 독자적인 기풍을 발달시켰습니다. 일본은 삼국 중에 가장 먼저 자기 기풍을 형성한 나라로서, 논리를 중시하고 조리가 있으며 엄격한 등급제도에다 바둑문화 확충/高揚(고양)에 일가견이 있습니다. 중국 현대 棋風은 日韓과 겨루어온 근래 30년간에 형성되었습니다. 더욱이 갑조리그는 중국 棋士들의 등급제도를 없애버린 셈이 되었습니다. 하수가 고수가 두는 경우에 만약 순리대로만 둔다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머리를 바지춤에 매달지언 정, 패배는 두렵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死鬪(사투)’(譯註 ;원문 拼殺 -목숨을 걸고 싸우다.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라는 중국적 기풍이 형성되었습니다.”
“바둑의, 승부와 예술은 모순 그 자체입니다.” 王元이 말한다. “일본 바둑인들은 늘 하나의 신조가 있는데 추한 모양은 죽어도 두지 않는다 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중국과 한국 바둑은 그러한 틀이 없습니다. 설령 추한 모양이더라도 이기면 족하다는 태도입니다.”
최초의 세계대회인 富士通(후지쯔)배는 일본인들이 창설하였다. 허나 이 사실이 일본이 세계대회를 중사한다는 표현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본인들은 국내대회를 중시한다. 일본의 여러 국내대회들, 예를 들어 棋聖, 名人, 本因坊 등 큰 타이들은, 그 중 棋聖 우승 상금은 4200만 円에 달한다. 국제대회에서 패배하더라도 국내대회로 혹은 지도棋로 일본 기사들은 예전처럼 중산층 생활을 해나갈 수 있다. 가장 적나라한 예는 일 년 전 춘란배에서 당시 일본 일인자 조치훈이 춘란배 일정과 국내대회 일정의 충돌 때문에 결국 춘란배를 포기한 사례이다.
일본바둑 현 일인자는 대만 출신의 張栩(장쉬)로서, 일본 다수의 국내 타이틀을 보유 중이다. 그런데 세계대회에서 그는 2005년 LG배 우승을 한 적이 있을 뿐이다.
섭위평이 일본바둑을 평하였다. “일본바둑의 안일함이 그들의 현 기풍을 키웠다. 그러니 그들이 이리(狼) 뺨치고 호랑이 못지않은 같은 한국 기사와 부딪혔을 때나 실력이 더 강한 중국 기사들을 만나는 경우 결과는 ‘뻔할 뻔 字’다.”
4부)
中韓 大戰 고비 年
中韓 大戰은 현 세계바둑계의 주류가 되었다.
(譯註 ;大戰(대전)은 원문에서 博弈(박혁) -1.v.바둑을 두다. 2.n.도박.‘博’은 쌍륙,‘奕’은 바둑을 말함 ;中韓圍棋가 아닌 中韓‘博弈’으로 한 이유는, 韓中 간 playing game이라는 생동적인 표현 의도를 강조하기 위함인 듯, 따라서 中韓바둑이 아닌 中韓大戰으로 번역 -아님 말고)
2009년에 이세돌은 한국리그를 포기하고 중국리그만 참가한다고 선언하였고 한국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이 사태는 中韓 간 경쟁에서 중국이 점한 약간 우세의 간접 증거였다.
중국의 바로 뒤를 이어 한국은 바둑 프로리그를 연 두 번째 나라가 됐다. 2009년 금융위기로 한국 바둑리그는 하마터면 요절할 뻔했다. 4팀이 철수를 선언하고 후에 노력하여 3팀이 가입하였는데, 그 중에는 이세돌의 고향 팀도 포함된 상태였다. 여기서 이세돌의 불참가 선언은 한국 바둑리그를 거의 유산시킬 뻔했다.
이세돌이 自國 리그를 포기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한둘이 아니다. 갑조리그에서 이세돌은 귀주 팀과 이기면 판 당 10만元, 지면 한 푼도 받지 않기로 합의했다. 2007년부터 시작해서 갑조리그에서 이세돌은 벌써 19연승 중이었다. 이렇듯 한국리그 열판 승리가 중국리그 한판 승리에 해당하는데다가, 한국에서는 생방송을 위해 속기라야 했다. 그런데 세계대회는 대부분 正시간 시합 방식이니 자국 리그에서 습관이 된 한국 기사들에게는‘길따라바둑’을 두는 습관이 생겼고 棋藝(기예) 제고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한국리그는 용병 도입을 불허하며 하부리그 또한 없어서 전체 규모가 중국의 바둑리그보다 작았다.
양쪽을 비교한 결과 이세돌은 중국리그에서 수련하기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그의 내심 깊은 곳에서는 중국 갑조리그가 세계 최고 리그라 인정하기 때문이었다.
한국리그의 후퇴 흐름을 돌이키기 위하여 한국의 매체들과 전문가들이 최근에 토론회를 열었다. 한국 매체 「SportsKhan」의 바둑 기자 엄민용의 말이다. “2009년에 한국에 대한 중국의 위협은 갈수록 심각하다. 2009년에 중국의 성장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며 드러나는 결과 또한 갈수록 확연해지리라 본다. 예전처럼 이세돌, 이창호 두 사람의 활약에 의지하여 중국 기사들의 집단 공격을 버텨내길 기대하기 어렵다.”
언제나 오만하던 한국인들이, 2009년이야말로 中韓 간 세계 바둑계 주도권 쟁탈전의 가장 중요한 한해가 되리라 의식하기 시작했다.
일단 우세
中日韓 삼국 모두 신인왕전이 있다. 중국 신인왕전은 20세 이하만 허용된다. 한국 신인왕전은 연령과 단위에 제한이 없다.(譯註 ;한국기원 棋戰정보 란을 뒤진 결과 현재 상태 국내 기전에 신예기전 없음. 2-3개 있었다고 아는데, 몇 년 사이 모두 없어졌는지.) 일본 신인왕전 참가조건은 25세 및 七단 이하 두 조항이다.
비교했을 때, 중국의 연령제한이 가장 엄격하며 2007년 중국 신인왕 周睿羊(주예양)은 16세였고 한국 신인왕 원성진은 23세였다. 이에 반해 일본은 근래 5년 동안의 신인왕 중에 27세의 ‘고령’도 있었다.
중국 신인왕전 16회 동안 주예양만이 連覇(연패)에 성공했다. 일인자가 없다 할 순 없으나 新人이 허다하고 실력이 상당하다.
“90년대 生 기사들의 경쟁이 치열합니다. 과거처럼 걸출한 인물 한 사람이 수십 년 獨走(독주)하는 상황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2008년에 18세 井山裕太(이야마유우타)가 일본 신인왕을 차지하면서 일본 바둑계의 기대주가 되었다. 중국 바둑계 人士 한사람이 기자에게 말하였다, 이 일본의 보배가 만약 중국에서라면 30위권은 가능하겠지만 10위권은 절대 불가능하다.
설령 80년대 生인들, 일본이 얻어낸 數(수)는 겨우 張栩(장쉬), 山下(야마시타), 高尾(타카오), 羽根(하네) 이 소위 ‘평성(平成) 4천왕’뿐이다. 그들의 자질은 본래 小林(고바야시) 등 초일류 기사에 미치지를 못하는 바이며, 또한 온실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대항력이 강력하지 못하다. 더욱 걱정은 일본 아동들이 죄다 바둑에 관심이 없고 더 자극적인 電子 게임으로 몰린다는 점이다. 현재 일본에서, 바둑 강의실에서 바둑을 보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며 청년들 보기가 참 어렵다.
한국은 일본의 前轍(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고 ‘한국황제’ 조훈현이 여러 차례 호소했다. 2009년 초에 한국기원이 내놓은 「2009한국바둑백서」에서는 2008년 한국바둑 인구가 766만, 1997년 900만으로서 바둑 인구가 지속적인 감소추세라고 밝혔다. 바둑교실 또한 2003년 583개가 2008에는 517개로 감소했다.
2008년 설에 한국바둑계 원로 유창혁이 공개호소문을 발표한다. (☞상금제와 오픈전으로 위기 극복하자 -유창혁)
저는 우리나라 바둑의 정점은 10년 전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는 점차 하향 추세에 놓여 있다고 봅니다. 이는 제가 일선에서 어린이바둑 보급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뼈저리게 느끼는 바입니다.
바둑을 배우는 학생이 3분의 1 정도로 떨어졌고 프로 지망생은 더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우리 바둑이 세다고 착각합니다. 여전히 세계최강을 유지하고 있으니 외관상 아무 문제없어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10년 전 피크 때 바둑을 배우기 시작한 애들이 지금 성적을 내는 것일 뿐입니다. 앞으로 5년만 지나면 다 빠져나갑니다. 새롭게 배우는 애들이 날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곧 힘들어질 겁니다.
약 30년 동안 이웃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중국바둑은 발전의 길을 찾아냈다 -우선, 싹수 있는 씨앗의 양성은 사회와 지방에 맡기고, 이후 프로리그를 통해 단련시키고, 체로 걸러 송곳을 골라 국가집단훈련대에 들어가게 한다.
자본 主導(주도)와 국가 주도를 결합시킨 이러한 방법은, 중국바둑이 인재양성으로 지향하는 다음 목표에 부합한다. - 세계의 고수들에게 승리, 국가에 영광을.
이에 반해, 일본바둑계의 주된 목표는 '바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취업환경을 제공한다.’이다. 천재 棋士를 유입시키고 키워내느냐 여부는 천운에 맡길 뿐이다.
한국바둑 또한 이와 같은데 棋士와 기원의 관계는 느슨하며 통일적 집단 훈련과 연구 토론이 없다. 한국 매체「SportsKhan」의 바둑 기자 엄민용은 그래서 중국바둑계를 부러워한다.
“중국바둑은 과거의 소소회 같은 집단 연구 모델을 채택하였습니다. 훈련 강도가 세졌고 효과가 큽니다.”
이창호나 이세돌 같은 천재들은 수십 년에 하나 나올 뿐인데 만약 그들이 없다면 한국바둑은 무엇에 기대어 중국바둑의 집단 공격을 버티어내겠는가 라고 嚴기자는 걱정한다.
중국기원 입구에는 늘상 아이들이 모여 있다. 그들은 대부분 각종 바둑 대회 참가 차 북경에 온 김에 부모들 손을 잡고 기원을 참관하러 온 아이들이다. 중국기원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아이들은 입구에 서서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 있을 뿐인데, ‘중국기원’懸板(현판)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찍어도 그들은 충분히 기뻐 날뛴다.
「주간체육계」 기자 謝銳(사예)는 기원에 취재 갈 때마다 감탄한다. 중국의 바둑 배우는 아이들 천만, 어쨌거나 천재 한둘은 튀어나오리라.
張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