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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펌譯] 중국바둑, ‘집단 help 개인' 효과 현저 (노동자일보) -한글only


삼국, 기사 육성 방식에 나름의 특장 - 중국‘집단 help 개인' 효과 현저

출처 :노동자일보(工人日報), 2011.06.22 tom.com으로 전재




2009년 이래 현 시점까지, 자칭 ‘(감독 직 수행에 지금이 딱)
한창 시절’이라 자부하는 兪斌(유빈)은 대회 참가 빈도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렇게 ‘국외자’신분으로 변신하고선 ‘시끌벅적한 시장’으로 나아가, 2007년 국가여자바둑팀 감독으로부터 시작하여 2009년에는 중국국가바둑팀 총감독을 맡았다. 이 역할 변신 과정에서 유빈은 능수능란 무르익은...

기자가 오늘 중국기원으로부터 알게 된 바로, 국가바둑팀 신임 감독조 경선 작업이 이미 시작되었다 한다. 경선은 보고진술, 질문에 대한 답변, 투표, 심사 및 결과공표 등 과정을 거쳐서, 총감독 1명 /남자팀 감독 2명 /여자팀 감독 1명 /국가소년대 감독 1명으로 구성되는 감독조가 출범하게 된다고 한다.(내용이 좀 애매한데, 아마도 총감독만 경선으로 선출하고 나머지 조원들은 경선이 아닌 듯 ;역주)

2005년 국가바둑팀 감독 공개 경선제를 실시한 이래, 馬曉春(마효춘)과 유빈이 차례차례 국가바둑팀 감독조의 ‘장문인’이 되어, 팀을 이끌었고, 예사롭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다. 중국바둑계는 50년 동안 지속되어온 ‘집단훈련’방식을 대단히 높이 평가한다. 즉, 바둑 원로 王汝南(왕여남)이 바로 이렇게 말하는 바다.“훈련과 관리를 더욱 강화하여 기사들이 더 체계적으로 더 맞춤형으로 연구하도록 이끌어줄 지도부가 국가바둑팀에 필수적이다. 그 직위에서 그 업무를 수행함에 국가바둑팀 감독조의 책임이 매우 크다.”


확연한‘집단 help 개인’효과 현저 

바둑 원로 陳祖德(진조덕)은 국가바둑팀 (최초) 성립에 대한 기억이 더욱 새록새록하다. “새 중국에 바둑이 개시되자마자 ‘집단이 개인을 도운다’라는 훌륭한 전통이 생겼다. 1961년 국가바둑팀이 출범함으로써 이후 긴 세월 동안 바둑의 안정적 발전이 가능했다.”

중국의 국가바둑팀이 성립된 지 어언 50년 역사이지만, 국가바둑팀 감독조 공개 경선제는 겨우 몇 년 전인 2005년부터 시작되었다. 중국 바둑의 전반적인 발전, 특히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위해 중국기원은 국가바둑팀 감독조의 공개경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일찍이 중국바둑 최초의 세계대회 우승자인 마효춘이 劉小光(유소광)과 겨룬 경선에서 이겨 감독조 조장으로 당선되었다. 당시의 감독으로서는 유소광, 吳肇毅(오조의), 邵煒剛(소위강), 吳玉林(오옥림)과 張文東(장문동)이었다.

2009년 1월, 국가바둑팀 새로운 감독조 선출을 위한 경선이 진행되어, 유빈이 마효춘을 ‘격파’하고 국가바둑팀 신임 총감독을 맡게 되었다. 감독조의 나머지 구성원은 :남자팀 감독 華學明(화학명)과 소위강, 여자팀 감독 王磊(왕뢰), 국가소년대 감독 오조의였다.

이전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왕여남은, 국가바둑팀 감독조 경선은 시대적 발전과 경쟁에 중국 바둑이 적응해나가기 위해 당연히 필요하다며, “지난 세기 90년대 말에 국가바둑팀은 총감독 직위를 폐지하고 중국기원 바둑부 관리 하로 편입시켰다. 그런데 세계바둑계, 특히 중일한 삼국 바둑의 경쟁이 점점 격렬해짐에 따라, 국가바둑팀 감독조 내에 누군가 한창 나이에 기력 왕성하며 업무와 관리능력을 겸비한 리더가 필요해졌다.”

감독조의 조정 및 그에 뒤따른 국가바둑팀 훈련과 지도방식의 변화는 중국바둑의 전체 수준, 특히 국제대회에서의 활약 정도를 환골탈태시켰다. 2000년 이전에 중국바둑의 세계대회 우승 개수는 마효춘과 유빈이 거둔, 고작 3개였다. 2000년 이후부터 2005년 이전까지, 중국 기사 중에 심지어 단 한 사람의 세계대회 우승자도 배출되지 않았다. 마효춘이 국가바둑팀 감독조 조장을 맡은 2005년 이후 2009년 이전까지 중국 기사들은 豊田(토요타)배, 삼성배 등을 포함한 6개의 세계대회 우승을 하였다. 2009년 유빈의 ‘반정’성공 후(反正:正으로 되돌림. 무협 식으로 마효춘을 사(邪), 유빈을 정(正)으로 이미지화하여 흥취를 살린 표현 ;역주), 중국 기사들은 대략 2년 동안에 8개의 세계대회 우승을 수확하였다.

통계상, 비록 지금까지 중국기사들의 세계대회 17회 우승과 한국기사들의 세계대회 우승 46회는 여전히 상당한 차이이긴 하다 그러나, 세계대회 11차례 우승한 일본바둑은 이미 추월하였다. 중한대결은 이미 바둑계 주된 선율이 되었다.


삼국, 기사 육성 방식에 나름 특장

중국바둑의 ‘집단 훈련’이란 육성 모델을 바둑계 인사들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근래 2년에 세계대회 3개를 우승한 孔杰(공걸)은 인터뷰에서 또렷이 밝히기를, 바둑은 테니스처럼 단독비행에 적합한 종목이 아니고, 국가바둑팀의 집단훈련은 더욱 장점이 있다며, “매 번 큰 시합 전에, 국가바둑팀 감독조는 일련의 리그전을 열어주는데, 컨디션을 끌어올리는데 대단한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감독조 조장 혹은 총감독을 핵심으로 세우는 책임감독제는 확실히, 국가바둑팀 나아가 중국바둑 전체의 발전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예를 들어 감독조 조장 재임 당시의 마효춘은 그 풍부한 상상력과 예의 출기제승(出奇制勝:기이한 책략으로 승리)적 기풍으로 국가바둑팀의 많은 기사에게 신선한 생각방식을 제시한 바 있으며, 유빈의 진중하고도 치밀한 기풍과 관리방식 또한 국가바둑팀 기사들의 폭넓은 환영을 받았다.

정예기사 육성 방식에 있어서, 3대 바둑강국 중일한은 각 나름의 특장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은 오랜 세월 국가바둑팀 집단 훈련 방식을 고수해왔고, 한국바둑은 바둑도장의 역량에 전폭 의존하는 바, ‘3대 도장’인 권갑룡도장, 허장회도장 및 김원도장은 한국 기사들의 ‘요람’으로 찬양된다. 한국랭킹 최신판 순위 10위 이내 기사 중에 7명이 권갑룡도장 출신이다. 일본바둑의 육성 방식은 전통계승이다. 지난 세기 20년대 이전 시대에 중앙기원, 비성회(裨聖會) 및 방원사(方圓社)가 정립(鼎立)한 바 있으며, 현재는 또 일본기원과 관서기원이 바둑계 쌍두마차...

재미로운 것이, 중일한 3국 바둑계의 교류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인재 육성에, 장점을 빌려와 단점을 보충하고, 나 없는 것 너 있는 것 서로 융통하는 등, 삼국 바둑계의 공감대가 점차 넓어지는 중이라는 점. 예를 들어 한국은 작년 광주(廣州)아시안게임 준비를 위하여 최초로 바둑대표팀을 구성하였는데, 양재호9단이 총감독, 윤성현9단이 감독을 맡았다. 중국적인 특색의 국가바둑팀 모델이 한국바둑계로부터 (드디어) 인정받았다 하겠으며, 또한 세계바둑스포츠 발전에 있어서 중국바둑계가 기여한 하나의 공헌이 아니겠는가!  (노동자일보, 북경 6월21일)

***중국어로 ‘공인(工人)’이란 (육체)노동자, 노동자일보(工人日報)는 ‘중국-전국노동조합총연합회(中華全國總工會)’의 기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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