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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071015 말과 글


글 잘 쓰는 진중권도 말하기 기술에서는 평범해진다. 마찬가지로, 말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글까지 잘 쓰는 것도 아니다. 말도 잘하고 글까지 잘 쓰는 사람들을 보면  남모르는 노력이 상당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자연히 든다.

말을 잘하려면 어떠해야 할까. 사석(私席)이나 여타, 말을 잘 ‘들이대’는 경우가 있는데 말이 많다 소리는 듣기 십상이겠지만 말을 잘한다 소리는 듣기 어렵지 생각한다. 말을 잘하는 사람을 보면 말에 있어서의 조리(條理)도 조리이지만 말하는 도중의 임기응변에 능하다. 말은 말(馬)처럼 방향을 정해서 가는 것이 아닌데다가 ‘순간의 기술’이기 때문에 반드시 임기응변이 필요하고, 이것은 메모나 다른 여하한 수단으로도 대체되지 못한다.

또 하나 요건이 숫기, 말을 잘하려면 ‘숫기가 없지 않’아야 한다. 앞에서 예로 든 진(陳)씨의 말 실력이 평범해져 버리는 까닭은, 아마도지만 숫기가 약간 부족해서이지 않은가, 말을 잘하려면 아무래도 얼굴이 뻔뻔해질 필요가 있지 않은가 이걸 어느 정도는 타고 나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성교육 명강사’ 구성애씨도 그랬고 영어 강사로 시작해서 교수가 된 정덕희씨도 그랬다는데, 타고난 말 실력에 각고의 노력이야 당연하다 하겠다. 한참 예전에 구성애 씨가 한 말이, 자기는 어릴 때부터 이야기하기를 좋아해서 아빠랑 가족들 앞에서 수다를 잘 떨었다.. 그랬는데 자기가 이야기만 하면 다들 재미있어들 했고 그게 아무튼 좋아서 아예 연구를..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구성할까 이 대목에서 말투니 표정이니를 어떻게 할까 이런 것들을 아예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더 잘하게 되었다 그런 고백을 들은 기억이 난다. (근데 왜 ‘그쪽’으로 풀렸냐 ㅡ.ㅡ)


그 사람이 싫으면 그 사람의 말 실력이 뛰어나도 그 사람의 말은 싫다. 허나, 그 사람이 싫어도 글이 좋기만 하면 그 사람의 글까지 미워하지는 않는다. 말은 순간의 기술이기에 사람이 타인의 말을 두고서 느끼는 미감(美感)은 말을 하는 사람의 정체성(正體性)이 주는 미감 그 자체로 여기고, 숙성시켜 나오게 마련인 글이 주는 미감은 그래서인지 좀은 다른 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까. 여하든지 간에, 말의 미감은 말의 미감 글의 미감은 글의 미감. 둘은 다르다.  

글을 잘 쓰려면 도대체 어떠해야 할까. 감성과 논리,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겠지 하는 당연한 소리를 할 수는 있겠지만, 시간은 그렇다 치고 이놈의 감성은 어떻게 해서 잡을 것이며 그게 도대체 잡으려 해서 잡히는 고기인가 (돔도 아닌데) 하는 문제가 남으며 나름의 조리(條理)에 어떻게 설득력까지 ‘장착‘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마저도 간단하지가 않다.


미운 사람의 말이 싫어지는 이유는 그 형식이 말이기 때문, 글의 경우 이와 달리 싫어도 싫지 않을 수 있는 이유도 형식이 글이기 때문, 사람은 불가피하게 형식의 얽매임을 받는다. 본질에 대한 호불호와 다른 차원에서 반드시 형식의 구애(拘碍)를 받는다.

영어는 형식에 민감한 언어, 수학도 형식의 학문, 인터넷은 (태생상) 모양에서 불가피하게 글의 형식을 띈다. 그렇다면, 인터넷 세계에서는 모든 사람의 모든 말은 (말이든 글이든) 글이라는 형식에게 구애(拘碍)당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말하고 있고 단지 그 말을 글로 옮긴데 불과하다 할지라도 일단 형식을 바꾼 이상 형식의 얽매임을 피해가지 못한다.

웅변대회에서 원고(原稿)가 좋아도 ‘이 연싸‘ 하면서 두 팔을 높이, 그리고 표정을 달뜨게(?)하지 못하면 ’당국‘이 상을 주지 않는 이유, 앞의 진모 논객이 백분토론에서 그런 걸 못해서 앙숙(?)인 유씨민보다 말빨이 좀 딸린다 소릴 들어야 하는 이유는, 당초 글이었던 것이 말로 형식이 바꿔져 있거나 기존에 글쟁이이지만 말하는 자리에 나왔기에 불가피하게 말이라는 형식의 구애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이 글마당 공화국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라 생각한다. 이 연싸~ 


 

*‘이곳’이란 오로烏鷺CyberOro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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