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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071023 아버지 忌日을 치르며


-아버지


12년 전 그날, 토요일,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총에 맞던 날 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일요일 대낮의 빈 방을 쩌렁쩌렁 울리던 벨소리와 그 수화기 너머 들려오던 큰 형님의 울음 섞인 고함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연하다.

그 며칠 전인 수요일은 아버지 꿈을 꾸다 깨었고 깬 순간, 마침 아버지가 전화를 주셨다. 거 참 이상하구나..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꿈을 간간이 생각하곤 했다.


엊그제인 일요일은 아버지의 기일(忌日)이었다.

어머니가 계시는 시골집에 당도하여 먼저 오신 집안 피붙이들에게 인사를 드리는 중, 큰고모께서 유난히 반가와 하신다. 덥석 손을 잡으며 아이고야 니를 몇 년 만에 보노..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에 뵙는 셈이다.

할머니의 성정(性情)을 제일 많이 받아서 뵈올 때마다  아이고야 니가 아이고야 니가 왔나.. 잔정이 많은 큰 고모는, 고모부에게 일찌감치 바람이 오는 바람에 ‘남편한테 돈이라곤 평생 한 푼 못 받아보고’ 자식 둘을 생으로 건사하시느라 젊어서부터 고초가 많았다. 다행히도 고종 사촌 형(兄) -재미있고 참 순하다 싶은 兄이다. -이 사회에 준수하게 자리를 잡으셔서 고모의 지금 여생은 평안하시다.

이런 생각을 해 가며 밥을 먹다 또 꿈 생각이 난다.(주위는 집안 어른들의 얘기꽃으로 시끌벅적하다.) 한 사흘 전에 바로 이 형(兄)이 꿈에 나타났었네...형이 내 꿈에 출연하기가 싶지 않은데 어째서였을까.. 아 내가 오늘 고모를 보려고 그랬구나.


밥을 다 먹고 고모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고모께서 그러신다. 아이고야 나도 메칠 전에  꿈인가 아인가(아닌가) 시피(싶게) 꿈을 꾸었다 꿈에 오빠가 배는(보이는) 기라 그래 오빠아 오빠아 부르다 깼는데 시계를 보이 두시 반이 아이더나 하시면서 또 오빠아 오빠아 하시며 두 팔을 내밀어 허우적거리는 시늉을 하신다.

그러고 보니 내가 고종 형(兄) 꿈을 꾼 시각이 이른 아침녘, 아버지께선 누이를 먼저 보시고 막내아들을 보러 오셨나 보구나.


아버지와 고모, 6남매의 장손 장녀. 6살 터울 오누이가 어린 시절 일본에서 찍은 사진을 본 기억이 난다.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 교복에 모자를 쓴 왼쪽의 오빠는 제법 의젓해 보이고 (딱 보면 아버지) 그 옆에 무릎까지 당긴 하얀 스타킹에 짧은 치마에 가지런히 빗은 짧은 머리, 조그마한 누이동생은 약간 수줍어 보이면서도 밝게 웃고 있는 모습이 볼수록 귀엽다. 각이 약간 지면서 아담하게 돌아간 똑같은 턱선에 똑같은 미소, 자그마한 소년과 너 댓 살의 어린 꼬마 아가씨가 손을 잡고 찍은 흑백 사진 한 카트, 다정한 오누이 사진.  


사진 속의 저 미소 띤 얼굴은 언제나 또 막내를 찾아 주실런가. 꿈속이라도.



원폭 -할머니


어무이가 살았으모 원폭피해 보상을 받으낀데.  제수(祭需) 음식으로 배를 채운 후 숙모님이 그러신다. 무슨 말씀인가. 할머니와 큰 숙부는 피폭 당사자였단다.


증조할머니가 ‘정신이 이상해져 딸을 들쳐 업고 집을 나가 소식이 끊어져 버리는 바람에 ’ 나의 증조부께서는 홀아비 아닌 홀아비로 늙으셨다. 거기다 방랑벽까지 있어서 평생 타지를 전전(轉轉)하셨는데  어쩌다 뒤늦게 애 딸린 과수댁(나의 친 증조모)과 혼인을 하여 환갑동이인 할아버지를 얻으셨고, 곧바로 돌아가셨다. 어머니까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는 성씨 다른 집안에 덩그러니 혼자, 찬밥 신세로 청년기에 맞으셔야 했다. 그래서 일종의 돌파구로 부관선(부산-시모노세키)을 타셨다.

당시 방직공으로 와 있던 처녀(;나의 할머니)를 맞아 결혼을 하였고 해방이 될 때까지 거기 일본에서 살았다.


숙모님께서 계속 말씀하신다. 원폭이 떨어짔을 쩍에 할배 할무이가 나고야(숙모님의 착오, 실제 떨어진 곳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사랐다 카는데..

큰 고모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에서 부우여이(뿌우연 것이) 머어가  하아항거이(많이) 내려오는 기라, 그래이(그래서) 오마(;할머니)가 내는 다른 사람한테다가 맡기고.., 야아(;숙부)하고 내만 (집에) 있었는데, 너거 아부지는 핵교 갔고 초등학교 육캉년..,  아이(아 글쎄) 오마가 나는 내비 두고 야아(;숙부)만, 이기(이것이) 그때 세 살이었는데, 둘리매고(둘러매어 업고) 피난을 가삐린다 아이가, 내 이자삐도 않는다(그때 어린 맘에도 서운했던 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 오마가 피난을 가다 머어를(아마 원폭의 후폭풍을) 맞았는데 아아(아기)는 발가락에 맞고 오마는 아를 들쳐 업고 있으니까 그 밑으로 (허리 뒤로 손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시며) 맞은 기라. 고모는요? 내는 옆집 아주매하고 대나무밭에 가따. 내는 괘안코.

듣고 계시던 작은 아버지께서 내는 평생 발톱이 안난다 아이가 하신다. 네에? 발톱이 없어요? 올매나요 하였더니 양말을 벗어 발가락을 보여 주시는데 오른발 가운데 발가락이 약간 작고 그 발가락만 발톱이 없다.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할머니께서도 허리나 엉덩이나 어디 심한 흉터가 있었으리라.

고모가 또 말씀하신다. 수백 수천 명이 죽어 안 나자빠졌더나 머얼거이 어린아이가 두 쪼각이 나서 자빠져 있고.. (일나가셨다 돌아오신) (너거)할아버지하고 아부지가 (너거) 할무이하고 내하고 3살 짜리가 안보이께너 그 시체들을 저언부 다 디리다 밨다(들여다 보아 확인했다) 아이가.


일본에서 사신 시절 때문인지 할머니도 바둑을 두셨다. 나의 ‘첫판’(스물다섯 점을 놓고 몰판을 당하였는데)은 아버지 차지였지만 더 많이 둔 상대는 할머니셨다. 바둑 두는 사람들에게는 ‘첫판’도 그렇지만 특히 초보자 시절의 ‘돌 따먹던 재미’, 손맛의 기억은 평생을 가는데,  그 ‘돌 따먹는 재미’에 어떤 동네 형이랑 참 많이도 두었는데, 그랬던 시절, 제법 가끔씩은 할머니랑도 두었지 싶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해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초상을 치르던 날이 3월 2일이었던가.. 함박눈이 펑펑 오고 추웠던 기억이 난다.



타해이 -


제사상을 준비하는 동안 안방에선 얘기꽃이 피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작은 숙부께서 얘기를 끌어가신다. 한 동네서 자란 당신의 작은 형수(피폭 맞은 3살짜리 아기의 부인;나의 숙모)랑 마주 앉아 옛 이야기를 하시다가는, 그 연세 언저리 우리 동네에서 자란 이들을 초청하자 우리 함 다 함께 모이 보자 얘기가 나온다. 그래서 두 분이서 하나하나 이름을 꼽아 보신다. 누구 누구..하다 ‘타해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이름이 타해이(타현, 경상도식 발음이라)가 머고. 숙부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무신 노무 이름이 타해이가 머꼬.

대략 수무 명 정도 꼽아서 초청 날짜까지 잡아 놓으시고는 만족해하시더니, 거 어릴 때 타해이가 마리야 초등학교를 못댕깄는데 마리야 열세 살 때 목(멱)을 감다가 (산골 십여 호, 우리 동네 바로 앞에는 태평양만한 저수지가 있었다.) 그 때는 열세 살 짜리도 빤쓰도 안 입고 목(멱)감고 그랬는데 타해이가 거무리(거머리)한테 여어(여기) (손을 약간 내리시며) 아래를 물리삔기라 (나도 어릴 때 멱감다 거머리에게 많이 물리곤 했다.)

그래 가꼬 타해이가 엉엉 아이고 움시로(울면서) 물에서 뛰이(뛰쳐) 나오니깐 타해이 아부지가 집에 이따(있다가) 얼른 나와 가꼬 거무리를 잡아떼에 주어따 아이가 하신다. 이 소리를 듣고 죄다 웃는다.

(나도 속으로) 어찌 거머리가 거기를 문다냐 그럼 둥그스름한 데 -알을 물었을까 뭉둥한 데 -나온  데를 물었을까 상상을 하며 웃었다. 이렇게 왁자하니들 웃고 있으니 정지이(부엌)서 제사상 준비에 ‘감독 일 보던’ 엄마가 같이 웃어 볼라고 무슨 일이요 하며 늙은 몸을 이끌고 뛰어 오고. 삼촌(원래 입만 열면 우스개다)께서 한 번 더 얘기를 하신다.

다 들은 우리 엄마, 허억 하며 시작하는가 싶더니 너무 웃음이 터져서 아예 웃지도 못할 정도일 때 하는 그거, 입만 턱 벌리고 그윽 그윽 허억 허억 헛숨을 내면서 상체를 앞뒤로 흔들며 팔만 휘휘 내젓는 그거를 하신다. 한참을 그럭하다 드디어 소리를 낸다. 이윽고 마지막에 숙부님께서 한 번 더 보태시는 말. 무슨 노무 이름이 타해이가 머꼬.


아, 둔한 난 그제서야 그게 여자 이름이었음을 알았다. 우째 좀 엄마가 심하게 웃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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