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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091029 관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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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기가 가능한 이유는 돌이 놓인 좌표를 외우기 때문이 아니다. 돌들의 관계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 환타지 소설「피를 마시는 새」의 주인공 제이어 솔한


처음으로 복기가 되었을 때 아 된다 된다 나도 된다.. 그 기쁨을 기억한다. -맹물국수 


돌들의 관계는 변한다.

돌 하나의 위치는 다른 돌들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한다. 점점 더 복잡해지는 돌들 사이의 관계는 속속 변모해 처음에 의도했던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법이 거의 없다. 바둑은 계산을 비웃고, 상상력을 조롱한다. 구름들의 연금술만큼이나 변화무쌍한 모양 하나 하나가 모두 최초의 의도에 대한 배신인 셈이다.  - 山颯산삽ShanSa「바둑 두는 여자」中에서, 


바둑에 있어서 우리는 돌과 돌 간의 변동하는 관계에 관심이 있다.(맹물 註 ;고수 반열에 오르려면 관계 그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나아가 관계의 변동에 극도로 민감해져야 한다.) 바둑에서 말하는 모양이란 바로 돌들 간의 관계이다. 모양이 좋다 라는 말은 돌과 돌의 관계가 적절하고 효율적이라는 의미이다. ‘수나누기’란 결국 돌과 돌의 관계를 관찰하여 이 관계들을 비교하는 것이다.

관계는 부분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全局적인 관계 또한 중요하다. 정석 선택의 요령이자 우리가 마주치는 어려움이란 바로, 부분으로서 선택된 모양(정석)이 전체 속에서 효율적 관계를 맺는가 여부를 판단하는 데 있다. 이처럼 바둑적 사고의 핵심은 ‘부분은 전체와 연결되어 있으며 부분은 전체 속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바로 이것이다. -문용직「바둑의 발견」p8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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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쩌라고?

「관계-1」편과 위 2까지 읽었다면 말입니다.‘그래 인간관계가 그렇고 돌間관계가 그렇다 치고, 그래서 어쩌라고, 그 관계와 이 관계를 연결 지으려는 시도는 좀 억지 아니야?’ 하고 반문을 할 법 합니다. 맞습니다. 우연히(100% 우연은 아니지만요) ‘관계’라는 용어가 겹쳐서 등장한다고 해서 바로 두 용어를 결부시킨다면 흐리멍텅한 思考라는 소리를 아무래도 들어야겠지요.

그러한 행위는 마치, 이세돌의 백 136은 무리수(無理)였다 설명을 한답시고 19줄 바둑판 위에서 A13 자리는 무리수(無理)이며 어쩌구 저쩌구,.. 수학의 무리수(無理)를 들이대는 짓...만큼은 아니지만, 여하 간에 뻘짓임에 틀림없지요.


만약 인간관계와 돌間관계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렇게 쉽게 연결 지을 수 있다면 클린턴과 모니카 르윈스키가 신포석을 연구하다 주화입마에 걸려서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더라 하는 헛소리조차 진지하게 검증해주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말이 되냐 이 말입니다.


원래 재미로 우리 한국인의 인간관계와 바둑에서의 돌間관계를 ‘그냥’ 하나의 글에 적어볼 생각이었습니다. 재미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이걸 보고는...


언젠가 다큐 프로(EBS)에서 하더군요. 서양 엄마의 교육은 名詞(명사)를 들이대는 교육방식이고 동양 엄마의 교육은 動詞(동사)를 들이대는 교육이라 합니다. 교육방식의 이런 차이가 어떻게 작용을 하는지는 잊었지만, 다큐 프로가 말하는 요지는 동양인과 서양인 간에는 사고방식에 있어 근본적인 차이가 있고, 교육방식의 차이가 문화적 차이, 思考방식의 차이를 가져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서양인은 분석적 思考, 부분과 전체를 자연스레 별개로 보는 방식의 思考를 하고 동양인은 머라든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제 방식으로 말하자면 관계에 민감한 사고, 전체를 조감하는 사고, 부분들을 연결시키는 식의 사고를 한다는 겁니다.


서양인은 그래서 사물 하나하나를 완결된 주체로 보며, 현상(물이 끊는다든지, 설탕이 달다든지..)을 설명하기 위하여 개별 사물의 내적 속성을 연구한다는 겁니다. 분자니 원자니 쿼크니 이러한 분석적 사고의 커다란 성과이죠.

그런데 동양인은 사물을 우주 속에서 타 사물과 연결(;관계)된 (객체적) 존재로 파악하며, 현상의 원인을 사물을 둘러싼 상황에서 찾고자 한다, 고로 사물 그 자체보다는 사물을 둘러싼 인과관계와 맥락에 주목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業(업)이니 緣(연)이니 결국 맥락이나 관계의 다른 표현 아닐까요?


여기 원숭이와 바나나, 그리고 팬더(곰熊이죠)가 있습니다. 셋 중 둘을 묶어보세요. 당신은 무엇과 무엇을 묶겠습니까?

동양인은 (물론 대체로겠죠)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는답니다. 동양인은 관계에 주목하거든요. 서양인은 (역시 대체로) 무엇에 주목하나요? 사물 자체의 속성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동물인 원숭이와 팬더를 묶습니다. 여기서 동일하게 ‘묶는다’고 표현했지만 제대로 말하려면 동양인은 원숭이와 바나나를 ‘연결(관계맺음)’시키는 것이며 서양인은 원숭이와 팬더를 바나나와 ‘구분’한다 해야겠습니다. 아무튼 사고방식의 차이가 이런 식으로 드러난답니다.


인물 사진이 있습니다. 정 가운데에는 웃는 인물 한 사람이 크게, 주위에 (모두) 찡그린 인물들이 여럿 보입니다. 정 가운데의 웃는 인물은 행복할까요? 그렇지 못할까요? 어떻게 판단하시겠습니까? 서양인의 판단은 ‘저 인물은 행복하다’입니다. 동양인의 판단은 ‘그렇지 못하다’입니다. 서양식 사고는 분석적이기 때문에, 부분을 전체와 별개로 보기 때문에, 동양식 사고는 관계에 민감하기 때문에 전체와 부분을 연결시키기 때문에... 어떻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 관광지에서 사진 찍기 참 좋아하죠. 한 곳에서도 여러 장, 여행 한 번 다녀오면 몇 십 장 심지어 몇 백 장도 찍곤 합니다. 다큐 프로의 설명대로라면 일본인과 중국인들도 마찬가지겠습니다. 그럼 왜 동양인들은 이렇듯 관광지에서 사진을 여러 장 찍어야 직성이 풀릴까요?

名勝地(명승지)에 갔습니다. 서양인이라면 어디 명승지에 간 기념이다,..팡! 한 장이면 족하겠지요. 그런데 명승지라 해서 절경이 딱 하나입니까? 많잖아요. 때문에 동양인은 그 명승지의 절경 절경마다 사진이 각각 필요합니다. 각 절경 속의 나는 각각 다른 맥락 속에 있고 나와 각각의 배경은 다른 관계를 맺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동일한 그림이나 사진, 광경을 본다 했을 때 各人들의 눈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는 비슷하겠지요. 그럼 사람들 각각은 동일한 세상을 보는 걸까요? 그렇지가 않다는 얘깁니다. 눈앞에 놓인 세상은 동일하지만, 눈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나름의 해석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결국 제각기 다른 세상을 본다는 얘깁니다. 이 점은 개인 간뿐만 아니라 동서양 간에도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그럼 바둑판 위에서는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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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직입적으로 말해봅시다. 서양인들이 바둑에서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요? 푸른 눈의 바둑 세계 챔프 탄생이 가능할까요? 이 질문을 달리 표현하자면 「서양인의 사고방식은 바둑적 사고에 불리한가 」라는 질문이 됩니다.


즉,

「나란 존재는 관계의 그물망 속의 나인가? 개인으로서의 나인가? 사물의 관계에 주목하는가? 개체 그 자체에 주목하는가? 세계를 하나로 연결된 거대한 場으로 파악하는가? 세계를 개체의 집합으로 보는가? 이런 동 서양 간 사고방식의 차이가,

관계의 그물망(;바둑판) 위에 놓인 돌들 간의 관계에 능통해야 하고, 그 관계의  변화에 극도로 민감해야 하는 바둑이란 게임의 수행에 차이를 가져올까」 라는 질문이 되지요.


(만약 체스란 게임 또한 관계란 키워드로 파악되는 게임이라면 이 글이 제기한 가능성은 바로 휴지통에다 처박아야 합니다. -그런데 체스에 있어 말(馬)들 간의 관계가 그렇게 중요하다 여겨지지는 않는군요.)


아무튼 질문의 답을 생각해봅시다. 저 자신 이 질문을 던져놓고 생각해보았습니다. 결과  결론은 역시 No였습니다. 만약 Yes라 답한다면 이는, 성급하다 또한 일종의 결정론으로서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겁니다.

Yes란 답과 같은 논리로 누군가, 동양인의 사고방식은 서양인에 비해 합리적(;과학적) 사고에 불리하다 고로, 동양인은 ‘과학 세계 챔프’(간단한 예를 들자면 노벨상)가 될 수 없다 라는 결론을 내린다면 어떻게 반박할 수 있겠습니까?


합리적 사고는 교육에 의해 당연히 계발가능하지요. 다시 말해 동양적 사고방식이 설사 합리적 사고를 수행함에 불편을 끼친다 해도 이는 훈련에 의해 충분히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아야지요. 실제로도 그렇고요. 현실에 있어 동양 각국의 과학 실력이 아직 부족하다면, 그 이유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겠지요. 


바둑도 마찬가지라 봅니다. 바둑에 있어 푸른 눈의 바둑 챔피언’등장이 요원하다면 이는 동서양 간의 사고방식의 차이(-훈련에 의해 극복 가능한) 말고 다른 차원의 이유 때문이라 해야 할 겁니다. ‘ 동서양 간의 사회문화적 차이, 문화 역학상의 非 평등함 등의 문제가 서양으로의 바둑 전파에 실질적인 장애일지도 모릅니다. 축구나 야구처럼 서양에서 동양으로 전파되기는 쉬워도 동양에서 서양으로 전파되어 대중화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거죠.


먼 훗날 언젠가 서양에 바둑이 대중화된다면 그들 중에도 이창호도 나오고 이세돌도 나오겠지요. 그 대중화가 문제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