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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091029 관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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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에게는 평생의 恨이 있습니다. A는 어릴 때 몸이 아파 학교를 한 해 유급을 하였습니다. 게다가 대학 입학 때에는 재수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위 친구라고 모두 한 살 적은 나이거나 대학 친구는 두 살, 심지어 세 살 차이가 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괴롭지만 이 정도까지는 견딜 만하겠는데 더 괴로운 것은 동갑이거나 한두 살 어린 상대에게까지 선배랍시고 깍듯이 형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점입니다. A는 생각다 못해 선배들 개인을 하나하나 붙잡고 일대일 대화를 하였습니다. 사정 설명을 해서, 우리끼리만 있을 때는 즉, 비공식적으로는 야자를 트곤 하였으나 이런 방법도 한계가 있고,..


A만큼은 아니지만 B에게도 비슷한 고민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B 자신 탓이 아니라 친구 탓입니다. B의 고등학교 친구 C가  재수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친구 놈 C는 B가 먼저 들어간 대학교로 들어왔네요. 그리고 둘이 워낙 친하다 보니 B는 C의 동급생을 자주 접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C의 동급생이라면 바로 같은 학교의, 즉 B에게는 1년 후배들입니다. 그러니 B는 근엄하게 선배행세를 하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같이 야자를 틀 수도 없고..이래저래 B의 작은 고민입니다.


우리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동양인들 全般)에게 있어, 인간관계는 삶의 많은 부분을 결정합니다. 게다가 하나의 인간관계는 다른 관계까지 관여합니다.


甲과 乙이 無의 상태에서 만나 관계를 맺습니다. 甲과 丙이 또한 무의 상태에서 만나 관계를 맺습니다. 형 동생의 관계, 친구의 관계, 선생과 제자의 관계가 됩니다.

이 상태에서 甲을 매개로 하여 乙과 丙이 만난다 합시다. 그럼 어떻게 되나요. 乙과 丙의 새로운 관계는 기존의 甲과 乙, 또는 甲과 丙의 관계에 의하여 좌우됩니다. 이런 일은 우리들에게,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납니다.


앞에서 ‘하나의 인간관계는 다른 관계까지 관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위에서 A의 고민은 (한국 사람들이) 無의 상태에서 관계를 맺음에 있어 반드시 위계(또는 上下) 질서를 명확히 하는 경향이 많음에 있습니다. 근데 B의 고민은 기존 관계가 후속관계까지 결정지어버린다는 데 불만(?)이 있는 거지요. 말하자면 ‘부분이 다른 부분까지 영향을 준다.’이것이 B의 불만입니다.

아무튼 한국인(뿐만 아니라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동양인들 全般)의 인간관계의 특징은 位階(위계)와 관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글의 주제는 후자인 관계입니다.)


조금 더 볼까요. 우리말의 친인척 호칭은 참으로 다양하게 발달되었습니다. 이것들 하나하나가 관계를 지정하는 호칭 즉, ‘관계칭’입니다.(관계칭은 존칭어와 함께 우리말의 양대 특징이겠지요. 일본어와 중국어도 정도의 문제이지 비슷하다 추측합니다.)

부와 모 및 형과 제를 비롯하여, 숙부, 백부, 숙모, 이모, 고모, 당숙, 당고모, 삼촌, 처삼촌, 사촌, 고종사촌, 이종사촌, 재종, 삼종, 처남, 매제, 자형, 조카, 생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숙모를 고모라 부른다든지 백부를 숙부라 부른다든지, 그런 사람 가끔 보긴 합니다만 친척들 촌수를 제대로 헤아릴 줄 모른다든지 하면 이 땅에서 좀 피곤해지지요.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동양인들 全般)에게 관계(와 그것이 지시하는 위계)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친인척 간에 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서도 마찬가지이지요. 후배니 선배니 上士니 부하니 선임이니 후임이니 고참이니 쫄병이니 이것들도 역시 관계칭들 아닙니까. 게다가 사장과 직원, 선생과 제자, 집주인과 세입자 이런 명칭들마저, 원래는 직위나 자격의 명칭이지만 우리들은 이런 직위칭호에까지 관계칭의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들은 언제나 관계를 의식하고 있고 의식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들 한국인(동양인)이란 ‘관계의 그물망’ 속의 존재가 되겠습니다. 동양인은 태어나면서부터 (혈연)관계망의 단단함 속에 놓이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공유하는 기억을 만들어가며 타인과 새로운 관계를 맺습니다. 피와 기억을 매개로 하는 우리들의 이 관계망은 기회만 주어지면 확장하려는 속성을 지닙니다. 확장의 수단은 ‘부분이 다른 부분까지 결정 짓는다’또는 ‘하나의 인간관계가 다른 인간관계까지 관여한다’는 원칙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 그물망은 튼튼하며 조밀합니다.


서양인들도 위계질서가 있겠고 관계도 맺겠습니다. 피와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위계도 그렇고 관계도 그렇고, 당연히 서양사회에서의 ‘관계의 그물망’은 동양사회의 그것만큼 튼튼하지도 조밀하지도 않습니다. 아빠 엄마 다음에 uncle, aunt. 그리고 older 또는 younger brother 정도 밖에 생각나지 않는군요. 그리고는 모두 you 아니면 이름으로 부르지 않습니까? 하긴 형제간에도 이름으로 부르지요? 또 한국의 김영옥씨는 철수엄마라는 관계칭으로 살아가지만 서양의 Jane's mom은 제인엄마가 아닌 本名이 우선이지요. 그만큼 그네들의 위계에 대한 의식과 관계에 대한 민감도는 무디다는 얘기지요. 즉 서양사회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그냥 그 사람, 개인으로서의 나(我)이겠습니다. 서양 사회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관계의 그물망 속의 존재가 아닙니다.

이러니 위 B의 사례처럼 ‘기존 관계가 나중 관계를 결정 짓는다’ 또는 ‘부분이 다른 부분까지 결정 짓는다’는 사고방식은 있을 수 없지요. 형의 친구는 단지 '형의 친구'이지 ' 형'이 되긴 힘들겠지요. 그네들에겐 말입니다.


사람을 소개받습니다. 그런데 관계까지 지정받는 경우가 있지요. 이런 경우 저는 당혹스럽습니다. 예를 들어 친구가 아는 형을 소개할 때가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소개받는 거야 좋은 일인데, 여러분은 바로 형 소리가 입에서 떨어지던가요? 저는 그렇지 못하거든요? 처음 만난 그와는 피든 기억이든 아직 아무것도 공유하지 못한 상태 아니나요? 앞으로 같이 어울려서 공유하는 기억을 만들면 무언가 호칭이 자연스레 나오는 거고 그러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거고.

아무튼요. 누군가를 無의 상태에서 만났을 경우에는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관계를 만들어 가면 되는데, 기존 관계를 전제로 하여 누군가를 덧붙이는 경우에는 관계형성에 가끔 애로가 있기도 하더군요. 이런 저는 ‘관계의 그물망 속의 존재’로서 결격인가요?


저기 ‘나이를 많이 먹은 남성’이 지나간다 합시다. 나와 별다른 관계가 없다 했을 때(관계가 있다면 당연히 그 관계칭으로 부를 테니까, 또는 내가 서양인으로서 그의 이름을 안다면 이름을 부를 테고) 그를 무어라 부를까요? 조선시대라면 ‘노인~’하고 불렀을 겁니다. 높여서 ‘노인장’-하고 불렀을지도 모르지요. ‘나이를 많이 먹은 남성’을 부르는 일반명칭이 노인 또는 노인이라는 얘기겠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부르나요? 할아버지~ 하고 부르지요? 관계칭이 동원된다는 얘깁니다. 다른 얘기로 노인이나 심지어 노인장 이런 일반명칭(관계칭이 아닌)은 사람들이 꺼린다는 얘깁니다. 자 그래서 할아버지라는 관계칭이 일반명칭의 역할까지 겸하게 되었습니다. 몇 십 년? 백 년?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확실히 할아버지 할머니는 관계칭이자 동시에 일반명칭이지요.


아저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제(경상도 사투리)나 아저씨는 원래 「부모와 같은 항렬에 있는 친척 남성을 이르는 말」이라 알고 있습니다. 아지매 아주머니 아줌마도 원래는 「부모와 같은 항렬에 있는 친척 여성을 이르는 말」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지금은 둘 모두 일반명칭으로 쓰이지요.


현대로 올수록 사람들은 일반호칭을 부르기 주저합니다. 아줌마는 물론이고 아주머니 나름 정중한 호칭마저 꺼립니다. 당사자가 혹 기분 나빠할까 봐 또는 좀 더 친근하게 들리게 하려고,..일종의 현대인 소심증이죠. 그래서 동양 특유의 관계 문화와 현대인의 소심증이 보태져 호칭은 자꾸만 인플레이션(;관계칭化)됩니다.

노인이 점점 회피되어 할아버지로, 아저씨가 회피되어 다른 호칭으로, 식당이나 가게 이런 곳에 특히 아주머니나 아가씨가 회피되어 언니 이모 고모로..여기까지는 그렇다 치고 요즘은 아예 ‘호칭의 포스트모더니즘’인가요? 테레비를 보니 이젠 할아버지 할머니조차 물러나고 더 친근(?)하게 아예 아버님 어머님이라 부르더군요. 요즘 테레비에 예를 들어 「여섯시 내 고향」을 보면 젊은 리포터나 늙어빠진 리포터나 상대가 조금만 나이 들어 보이면 아무나 붙잡고 아버님 어머님.. 우웩 저것이 뭐하는 짓인지 원. (2편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