揚州十日記(양주십일기)
明 :王秀楚 (명나라 사람 왕수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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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 속 글귀) : 원문에 있는 그대로임.
(괄호 속 글귀) :번역자의 譯註. 즉, 모든 회색 글씨는 번역자가 추가한 것이다.
원문은 따로 파일로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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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記 형식의 본 글은 청나라 군대가 산해관을 넘어 북경에 입성한지 대략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645년 봄에, 중국 양주성(揚州城)에서 열흘 동안 일어난 일의 기록이다.
-日記의 필자 왕수초(王秀楚)는, 그 당시 그곳 양주사람이다.
-‘揚州十日’은 ‘嘉定三屠(가정삼도)’와 더불어, 청나라가 중원을 접수한 후 저지른 각종 학살 사건 중에서 가장 유명한 두 사건이다.
(王秀楚) 1645년 順治(순치)2년 己酉(기유)년 夏(하) 4월14일(음력임), 督鎭(독진;관직명 ≒사령관) 사가법(史可法)이 백양하(白洋河) 방어전에 실패, 황급히 퇴각하여 양주(揚州)에 도착. 즉시 성문을 굳게 닫고 양주성 결사방어 태세에 들어갔다. 뒤이어 적이 도착하였고, 城을 공격하였으나 4월24일이 되도록 城을 깨뜨리지 못하였다. 이때의 양주성 안은, 수비는 삼엄하고, 각 성문은 모두 수비병이 있었다.
우리집은 西城(서성 ;성곽도시라 西門 일대 지역을 西城이라 불렀다?)에 있었는데, 楊(양)씨 성의 장교 관할이었고, (우리집 부근에는) 그의 手下의 관원 병졸 등이 각지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집) 전후좌우에 병졸이 좍 깔렸는데, 우리집에도 병사 둘이 묵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무슨 법도랄 것이 추호도 없어서, 마구 유린하고 손해를 끼치는 등 못 하는 짓이 없었다. 나는 매일 천 냥이 넘는 돈을 바쳐야 했다. 계속 이러기가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쩔 수없이 左右 옆집과 상의하여, 세 집 공동으로 그들의 楊장교를 술을 곁들인 식사에 초대하였다.
술자리에서, 나는 억지로 공경을 다하며, 거나하게 대접하며 비위를 맞추었다. 楊장교는 기분이 좋아졌고, 그들 병사 몇에게 여기에서 멀리 옮기고 더는 소란을 부리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楊장교는 보아하니 음률을 좋아하고, 비파도 튕길 줄 아는 듯했다. 그는 우리에게, 양주 현지의 名妓(명기)를 수배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드러냈는데, 군무 중 한가할 때 쉬면서 즐긴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에, 그가 답례로 나(와 일행)를 초대하였고 함께 술을 마셨다. 원래 나는 작정을 하고 실컷 놀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督鎭(독진) 사가법이 보낸 쪽지가 술자리에 전해졌고, 楊장교는 펴보더니, 낯빛이 확 변해서, 급히 몸을 일으켜 城으로 올라갔다(민간인 집에서 나와 성벽 위로 올라갔다). 우리 일행 또한 흩어졌다.
이튿날 아침(25일 ;10日 중 첫날)이 지나, 督鎭(독진) 사가법의 말씀패(牌諭패유)가 전해졌는데 그 안에는, ‘나 한 사람이 감당한다. 백성은 연루시키지 않는다’란 말이 적혀있었다. 이를 전해들은 자 감격하여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또, 순찰 돌던 아군이 적군에게 가벼운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며 얼굴이 펴졌고, 서로 축하했다.
오후에, 나의 처갓집사람 하나가, 적에게 투항해 반란군이 된 興平伯(흥평백 ;칭호)고걸(高杰)의 패잔병을 피하여, 과주(瓜州)에서 양주로 우리집까지 왔는데(흥평백고걸은 적에게 투항하여 반란군이 되었고, 사가법이 방을 붙여 그를 수배하였으며, 때문에 양주에서 멀리 도망쳤다), 나의 아내는 이 친정붙이와 헤어진 지 오래라, 두 사람은 만나자 탄식을 그치지 못했다.
이때 바깥에서는, 적병이 이미 입성했다는 얘기가 파다했는데, 한두 사람이 이미 나에게 일부러 와서 그 소문을 알려주었더랬다. 그래서 나는 급히 바깥으로 나가서 소식을 탐문하였는데, 또 누군가 말하기를 :“적군이 입성한 것이 아니고, 靖南侯黃得功(정남후황득공)이 이끄는 援兵(원병)이 왔다는 겁니다.(靖정:亂을 가라앉히다, 정남후란 인물의 이름은 黃蜚황비) (당시 淸軍이, 황비가 이끄는 원군을 가장하여 수비군을 속여 성문을 열고, 양주 성내로 공격해 들어갔다고 한다. 사가법은 경솔히 믿다가 기만당했다고)”다시금 성벽 위의 수비군을 쳐다보니, 여전히 엄정하고 일사불란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헌데 대로에 도착하자, 사람들 하는 말이 흉흉했다. 돌연 흙먼지가 일면서, 맨발에 머리를 풀어헤친 자들이 미친 듯이 달려왔다. 무슨 일인가 그들에게 물었으나, 전부들 다급하고 숨이 차서 누구하나 제대로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홀연, 騎馬(기마) 수십 기가 북에서 남으로 질주, 낭패한 모습으로 달아다는데, 그 기세가 마치 파도가 밀려가듯 급박했다. 그 중에,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인 한 사람이, 바로 督鎭(독진) 사가법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원래 東城(동성 ;대도시라 同門 일대 지역을 東城이라 불렀다?)으로 달려가서 포위를 돌파할 생각이었으나, 만주군의 차단이 엄밀하여 돌파 불가능이라서, 남문으로 나가 포위를 뚫고자, 남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온 것이었다. 이때에 드디어, 적병의 입성이 의심할 여지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바로 이때, 또 기마 하나가 북에서 남으로 가는데, 고삐를 당겨 느릿느릿 걸어갔다. 말 위의 사람은 고개를 젖히고 슬피 부르짖었다. 말 앞에는 병졸 둘이 말의 굴레를 끌며 곁에서 못내 떨어지지 않았다. 이 광경이 지금도 눈앞에 선한데, 그 당시에 다가가서 성명을 묻지 않았던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 기마가 차츰 멀어진 후, 성을 수비하던 병정들이 죄다 투구갑옷 병기 등을 내팽개치고, 줄지어 성벽에서 뛰어내려 달아났다. 어떤 병사들은 뛰어내리다 머리가 깨져 죽거나 혹은 다리가 부러졌다. 다시 고개를 돌려 성루를 쳐다보니 이미 텅텅 비어 쥐새끼 하나도 없었다. (상자글 아래에 계속)
(譯註 ;이하 글은, 원저자/출처 불명으로서, 중국 웹 百度백과 ‘揚州十日記’ 部에, 각각 ‘屠城實錄(도성실록)’ ‘역사淵源(연원)’이라는 부제목으로 함께 실린, 두 글의 일부임. 성 함락 순간/직후의 묘사로서, 揚州十日記에 없는 내용 또는, 중복되나 다른 내용 또는, 중복되며 같은 내용 등이다. 양주십일기 내용의 보충 삼아 일독.)
다탁(多鐸 ;淸軍 총사령관)의 병사가 일단 이 重砲(중포)의 사정거리 내에 진입하면, 곧바로 수백 천의 사람이 대포에 맞아 죽거나 다쳤다. 그러나 다탁은 놀라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자기 쪽 대포부대를 지휘하여 성벽 서북쪽 모퉁이에 포격을 가했다. 뒤이어 淸軍 보병이 대포의 화력망을 가로질러 물밀듯이, 곧바로 성벽 아래로 들이닥쳤다. 거기에서, 사가법은 또 순간적인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의 활射手들이 성 아래의 이들 공격자들을 直射(직사)하였기 때문이다. 확실한 건, 다탁이 그의 병사들에게 어떤 대가를 무릅쓰고라도 서북 모퉁이를 뺏으라고 명령하였다는 것이다. 淸兵 하나가 화살에 쓰러지면, 곧바로 다른 하나가 그 자리를 메웠다. 순식간에, 시체가 쌓이고, 갈수록 높아졌다. 어떤 淸兵들은 심지어 사다리도 없이 성벽에 기어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성벽 위로 올라간 淸兵은 갈수록 많아졌고, 이 바람에 수비병들이 공황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성벽 방어시설 언저리의 수비병들은 앞을 다투어 나무 砲臺(포대)에 뛰어올라, 가장 가까운 집 지붕에 기어올랐고, 그대로 내뺐다. 곳곳에서 포대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렸고, 城을 방어하던 병사들은 만약 깔려죽지 않으면, 뒤이은 육박전에서 죽임을 당했다.
뒤이어, 이런 류의 공황이 성내에 만연하기 시작했다. 이는 叛徒(반도)들의 선동질 때문 말고도 어떤 뜬소문 때문이기도 했다(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수비군은 만주군을 황득공장군이 보낸 증원부대로 생각했다 한다), 순식간에 주요 성문이 나 몰라라 방기되었다. 뒤이어 淸軍이 물밀듯이 들어왔고, 南明의 사병들은 투구와 창을 버리고, 낭패 가득한 모습으로 남문으로 달아나, 그쪽 방향으로 도주를 시도했다. 다른 일부 사람들은, 이 도시가 이미 완전 포위됐음을 알고, 차라리 어떠한 희망조차 품지 않았다. 일찍이, 뒤이어 일어난 재난을 日記로 적은 왕수초가 기억하기를 :“바로 이때, 또 기마 하나가 북에서 남으로 가는데, 고삐를 당겨 느릿느릿 걸어갔다. 말 위의 사람은 고개를 젖히고 슬피 부르짖었다. 말 앞에는 병졸 둘이 말의 굴레를 끌며 곁에서 못내 떨어지지 않았다. 이 광경이 지금도 눈앞에 선한데, 그 당시에 다가가서 성명을 묻지 않았던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림이 흐릿하면 딸깍) 淸軍 서북 모퉁이 공략, 성공, 南明 수비군 동문으로 도주 시도,.. 실패, 남문으로 도주 시도...성공? 실패??... 뒤에 나오는데 本 日記를 쓴 ‘王씨’란 인물의 집은, 집 바로 뒤가 성벽이라 하며, 그 지역이 西城이라고 앞에서 나온바 있다. 王氏집, 대략 초록색 점선 구역 어디쯤.
그리하여 성을 방어하던 병사들이 투구갑옷을 버리고, 급히 城 내의 민가로 들어가 몸을 숨길 곳을 찾던 그 순간에, 사가법은 그가 있던 城 북문의 砲臺(포대)를 떠나, 말을 타고 內城(내성)을 가로질러, 곧바로 남문으로 달려갔다. 그는 그곳으로부터 나가서, 만주군 옆날개를 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어버려서, 이미 청군이 城 남문에 도달해버린 상태였다. 이때에 이르러, 사가법은, 그가 양주성을 이미 잃었으며 더 이상의 저항은 그 의의가 전혀 없게 되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하루이틀 전에, 사가법이 장자고(莊子固)에게 직접 물었던 바, 만약 양주성이 함락된다면, 자네는 爲主盡忠의 준비가 되었는가(爲主盡忠위주진충, 문맥상 여기서는 -나를 죽여주겠는가). 장자고가 망설임 없이 답하여 말하기를, 그러겠습니다. 이 시각, 사가법이 정말로 莊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요구한다. 허나 막상 때가 닥치자 장자고는 모질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가법은 별안간 자기 칼을 빼어 목을 그었다. 그러나 그는 치명상을 입지 않았고, 장자고의 품에 넘어져 피만 계속 흘릴 뿐이었다. 사가법은 큰 소리로 양아들을 불러 빨리 죽도록 도와달라고 하였지만, 사득위(史得威or德威)는 두세 차례 망설이다 손을 쓰지 못했다. 그 결과 성 북문으로부터 도망온 패잔병들이 그들을 휩쓸어갔다. 그 뒤를 만주인이 포기하지 않고 바짝 쫓았다. 혼전 중에, 장자고가 죽음을 당했고, 사가법은 그를 알아본 어느 淸軍 장교에게 사로잡혔다. 사가법은 자신을 그들의 지휘관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달라고 요구하였다.
사가법은 즉각 豫王(예왕) 다탁이 있는 곳으로 보내졌다. 豫王 다탁. 몸에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호신 갑옷을 입고, 타는 말은 화려한 장식에, 수행원 여럿, 비록 만주인이지만, 신체용모가 심히 위용 있으며 俊秀(준수)하고, 턱이 튀어나왔고, 이마가 넓고, 수행원 중에는 만주인이 여럿. 만주인 총독(總督 ;총사령관)이자 황제의 숙부.
다탁이 20일(;5월20일 = 음력4월25일) 사가법 심문에 어떤 차림을 하였는지, 이 자료로는 우리가 알 수 없다. 다만 이 점 하나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즉 훤칠한 몸집에 화려한 옷차림의 만주족 王公(왕공)과, 튼실한 몸집에 어두운 얼굴빛에 핏자국이 묻은 옷을 여전히 입고 있는 중원의 장군 간에, 참으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겠음을. 그들의 만남에 대한 온예림(溫睿臨)의 기재에 의하면, 예왕은 사가법을 매우 호의적으로 맞이했다 한다.
다탁 :“전에 서신으로 간청했는데, 선생이 따르지 않았소. 지금에 충의를 이미 이뤘으니, 마땅히 중임을 던지고, 나와 함께 강남을 수습합시다.”
사가법이 답하여 말하기를 :“이 마당에 뭐가 있겠소. 오로지 죽음을 구할 뿐이오.”
다탁이 묻기를 :“그대는 홍승주(洪承疇)를 보지 않았소? 투항인즉 부귀올시다.”
사가법이 답하여 말하기를 :“그는 先帝의 깊은 은혜를 입고도 죽음으로 節義(절의)를 지키지 못했소. 나아가 그대 朝廷에 몸을 담은 그 불충은 해처럼 밝소. 내가 어찌 그를 본받겠소?”
그리하여 다탁은 의이돈(宜爾頓)장군에게 명하여 사가법이 굴복토록 ‘권유’하였으나, 사흘이 지나도록, 사가법은 여전히 투항을 거절하였다. 결국 명을 내려 그를 살해하였다.
사가법의 私人 막료 19인은 혹은 자살 혹은 시가전에서 피살 혹은 사로잡혀 처형, 그들 전부가 난을 피하지 못했다고 한다.
(상자글 위에서 계속)
저번에, 독진 사가법이 성벽 윗부분(의 폭)이 너무 좁아 대포 설치가 곤란하다 하여 영을 내려, 성벽 돌출부에 목판을 설치하여, 한쪽은 성벽에 걸치고, 다른 한쪽은 민가에 잇닿도록 하여, 여유공간을 만들어, 대포를 설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헌데 그 공사가 이제껏 미완성이었고, 먼저 올라온 적군 병사들이 병기를 휘둘러, 창칼이 난무하였고, 성을 지키던 兵民들이 어지러이 도망치다 한곳으로 몰렸고, 그래서 성벽 위의 도로가 즉각 막혔으며, 그러자 사람들은 목판 위로 뛰어올라, 기어올라가서, 민가 지붕으로 도망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 목판이 견고하지가 않아서, 사람 수가 일단 많아지자, 바로 붕괴해버렸고, 사람은 낙엽처럼 추락하였고, 죽은 자가 십중팔구였다 ;민가 지붕에 도달한 사람들이, 지붕에서 내달리며 기와를 밟아 깨뜨렸고, 쨍강,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고, 또는 우박이 쏟아지는 소리 같기도 했는데, (그 소리가) 도처에 끊이지 않았고, 집안의 사람이 놀라 어찌할 바 모르는 온갖 모습이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집들의 객청과 안방내외에서부터 침실까지에는, (지붕으로 내빼지 않고) 집안으로 내려온 수비군 兵民들이, 허둥지둥 빈틈이며 숨을 곳을 찾아 몸을 감추고자 하였고, 주인이 큰 소리로 꾸짖고 욕을 해도 막을 수가 없었다. 이때 양주성 내 집들은 전부가 문이 닫혔고, 사람들은 죄다 찍 소리도 내지 않았다.
우리집 後廳(후청)은 바로 성벽을 마주한다, 창틈으로 밖을 엿보니, 城 위에 병사들이 남쪽에서 서쪽으로 행진하는 것이 보이는데, 보무가 엄정한 것이, 설령 폭우 속이라 한들 조금도 어지러워지지 않을 듯했다. 속으로 짐작하기를, 기강이 엄하고 절도 있는 군대구나. 조금 안심되었다.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웃사람이, 우리 의논하여 壇(단)을 차려 향을 살라서 王師(왕사 ;王의 군대)의 도착을 영접하자, 감히 대항하지 않음을 보이자는 것이었다. 비록 그렇게 한들 별 소용없음을 내 알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중론을 거스를 수도 없으니, 예예 일단 따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옷을 갈아입고, 모여서 목을 빼고 군대의 도착을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군대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또 집 후청으로 가서 창문으로 성벽을 엿보았는데, 만주군 행렬이 좀전보다 조금 드물어졌고, 행렬이 가다 서다 했다. 돌연 눈에 띄는 것이, 만주군 병사들이 부녀자들을 에워싸고 어울려 가는데, 부녀자들의 옷차림을 보니, 모두가 양주 현지 풍속이었다. 이제 나는 크게 놀라게 되었고, 고개를 돌려 마누라에게 말하기를 :“군사들이 입성하였으니, 만약 무슨 나쁜 일이 생기면, 당신은 스스로 끝을 내어(자살하여 치욕을 면해)야 할 것이오.” 아내는 말하기를 :좋아요! 그리고 목이 메어 말하기를 :제가 이전에 주머닛돈을 좀 모았어요, 지금 당신에게 드리니 알아서 처리하세요, 한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는데, 이런 재물을 남겨서 어디다 쓰겠어요? 그리곤 울면서 돈을 다 꺼내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바로 이때, 누군가 들어와서 급하게 고함을 쳤다 :왔소! 왔소! 나는 급히 뛰어나갔다. 저 멀리 북에서 오는 기마 몇 기가 보이는데, 고삐를 살며시 잡고 천천히 다가왔고, 王師(왕사 ;왕의 군대)를 맞이하는 자들과 맞닥뜨렸고,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여 뭔가를 말하는 듯했다. 이때에, 全 양주성 사람들은 낌새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기 시작했고, 왕래가 끊어졌으며, 그래서 지척지간에도 숨소리 하나 안 들렸다.
그들이 더 가까이와서야, 결국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바로 집집을 돌며 돈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허나 그래도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는데, 조금이라도 소득이 있게 되면, 더 캐묻지 않고 그만두었으며, 간혹 불응하는 자가 있다 해도, 비록 칼을 휘둘려 위협하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을 해하진 않았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누군가 헌금 만 냥을 바쳤는데, 그럼에도 갑자기 죽임을 당했다고, 이는 양주 현지인 내통자가 초래한 일이라 한다. 우리집 차례가 되었을 때, 만주군 기병 하나가 나를 콕 집어 가리키며 뒤쪽의 기병에게 말하기를 :“이 쪽빛 옷을 입은 사람에게 돈을 받아내 가져오라.” 뒤쪽 기병이 막 말에서 내렸을 때, 이미 나는 잽싸게 멀리 도망쳐버렸다. 그는 나를 포기하고 말에 올라 가버렸다. 나는 속으로 따져보기를 :“내 옷차림이 남루해서 시골뜨기 같은데, 왜 하필 나에게 그러지?”때마침 아우가 왔고 큰형님 또한 왔기에, 함께 의논하기를 :“제가 사는 집 좌우가 모두 富商(부상)이라, 그들이 저까지 富商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이제 어떡하지요?”모두들 초조 불안하였고, 가능한 한 빨리 이동하기로 결정, 그리하여 큰형님이 집안 부녀자 등을 이끌고 외진 좁은 길로 비를 무릅쓰고 둘째형님 집으로 가게끔 맡겼다. 둘째형님이 사는 곳은 何씨가문묘지 뒤로서, 좌우가 모두 가난뱅이 주거지라, 더 안전할 것이다. 나는 뒤에 혼자 남아 동정을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큰형님이 와서 말하기를 :“大路 상에는 이미 만주군이 도륙을 시작했다, 여기에 남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우리 형제들은 함께 있자, 태어남과 죽음을 함께 하면, 비록 다 죽는다 해도 한이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先祖(선조)의 神主(신주)를 모시고 큰형님과 함께 둘째형님 집에 도착하였다. 당시 큰형님과 아우, (둘째)형수 및 조카, 또 집사람과 아들, 두 처제, 처남 하나, 총 12인이 둘째형님 집에 피난 중이었다.(12人 =11人+뱃속아이)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고, 적군이 사람 죽이는 소리가 문밖에 울려퍼졌다. 놀란 집안사람들은 도저히 집안에 있지 못하고 지붕으로 피해 올라갔다. 비가 갈수록 세차졌고, 십여 人이 뭉쳐서 담요 한 장을 같이 덮었고, 온몸이 빗물에 폭삭 젖었다. 바깥의 애통한 비명소리는 머리카락이 쭈삣하도록 파고들며, 혼백이 나가게 만들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차츰 조용해졌고, 그때서야 처마를 붙들고 내려와, 돌을 두드려 불을 피워 밥을 지었다.
이때, 城 곳곳에 불이 났는데, 가깝게는 십여 곳, 멀게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붉은 색 火光이 서로 비추는 것이 마치 번개가 번쩍이는 듯했고, 타닥 타다닥 소리가 끊임없이 귀를 울렸다. 거기다 공격당해 부상 입은 자들의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끊어지다 이어지다 하는 애처로이 돌보는 소리들, 그 처참함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밥이 익었으되, 사람들은 서로 멀뚱멀뚱, 겁에 질려 누구 하나 젓가락을 못 들었고, 아무도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내 아내가, 저번에 나에게 주었던 주머닛돈을 가져가서, 네 뭉치로 나누었고, 형제들이 각기 하나씩 숨겼는데, 상투며 신발이며 허리띠에 챙겼다. 아내는 또 헤진 옷과 낡은 신발을 찾아서 나를 가난뱅이로 변장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은 뜬눈으로 밤을 샜고, 아침을 맞았다.
그날밤에, 기괴한 새들이 공중에서 마치 생황(笙簧, 피리 종류) 같은 울음소리를 내었고, 또는 으아 어린애 울음 비슷한 소리도 내고, 죄다 사람과 들짐승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인 듯했다. 후에 물으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가 들었다 한다.
26일(10日 중 이틀째), 城 내 불길이 급속히 약해졌다. 하늘이 차츰 개었다. 우리들은 다시 지붕으로 기어올라가 숨었고, 이미 십여 사람이 지붕과 지붕 사이의 배수통 안에 엎드려 숨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돌연, 동쪽채에서 사람 하나가 벽을 기어 집 위로 올라 내뺐다, 병사 하나가 칼을 들고 바짝 쫓는데, 마치 나는 듯했다, 그러다 멀리 우리들을 발견하고, 쫓던 사람은 팽개치고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놀라고 당황하여, 즉각 지붕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 큰형과 둘째형이 뒤를 이었고, 아우 또한 뒤를 이었다. 우리들은 백여 걸음을 달린 후에야 멈추었다. 이리하여 처자식과 헤어졌고, 그들의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때, 교활한 병사들이, 사람들이 다들 숨어버릴까 걱정하여 거짓으로 소리쳐 사람들을 속이기를, 순순히 나오는 자에겐 安民符節(안민부절 ;부절이란 일종의 증표)을 주고 건드리지 않는다, 더 이상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그러자 숨어있던 사람들이 다투어 튀어나와 그들을 따라가는데, 다 모이니 오륙십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에 부녀자가 반이었다. 둘째형님이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고작 네 사람이니, 만약 흉폭한 병사라도 만나게 되면, 요행을 얻기 어려울 터, 저 사람들 떼에 묻어감이 낫다. 그러다 보면 도망치기도 더 쉬울 것이고, 설사 불행을 당한다 해도, 우리(형제)가 생사를 같이 함이니, 한스러울 것이 없으리라.”이 당시, 우리는 죄다 마음이 어지러워져, 그 외의 목숨을 구할 좋은 방책을 찾을 수 없었고, 예예 다들 동의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도 나와서 사람들을 따라갔다. 우리를 호령하는 사람은 세 만주병이었다. 이들은 먼저 모든 사람들의 재물부터 뺐었다. 나의 형제들은 죄다 탈탈 털렸고, 나 한 사람만 (그들이 빼먹어서) 수색을 면했다. 갑자기 부인네 중에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쳐다보니, 나의 친구 주서(朱書)兄의 두 첩실이었다. 나는 급히 그들을 제지했다. 두 첩실은 모두 머리카락이 흩어졌고, 살이 밖으로 드러났고, 발은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 무릎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그중 한 첩실은 女아기 하나를 그때까지도 안고 있는데, 만주병이 발각하고서, 채찍을 휘둘러 아기를 때리고는 뺏어서 진흙탕 속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곤 그 부인을 쫓아내버렸다.
병사 하나가 칼을 빼들고 앞에서 인도하고, 병사 하나는 긴 창을 가로쥐고서 뒤에서 몰고, 병사 하나는 중간에 자리잡고 사람이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였다. 수십 사람을 마치 양떼를 몰 듯, 조금이라도 주춤대면, 즉각 채찍질이요, 혹은 바로 죽여버렸다. 부녀자들은 긴 밧줄에 목이 매이어 줄줄이 구슬이 꿰어진 듯하고, (발이 작으므로) 한 발 걷고 한 번 넘어지고, 온 몸이 진흙투성이였다. 거리에는 온통 버려진 아기들 천지인데, 혹은 말굽에 짓밟히거나 혹은 사람 발에 밟히거나 하여, 肝腦(간뇌)가 쏟아져 온 땅을 덮을 지경이고, 울음소리가 온 들을 가득 채웠다. 개울 하나와 못 하나를 지나는데, 그 안에 시체가 쌓였고, 팔다리가 서로 포개졌고, 핏물이 흘러들어가 물빛이 울긋불긋 대여섯 갈래가 되었고, 못은 시체로 메워져 평평해졌다.
사람들은 어느 집 대문 앞에 이르렀는데, 원래 정위(廷尉) 영언요(永言姚)公의 거처였다. 후문으로 들어가니, 저택 깊숙하니 곳곳마다 시체가 있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여기가 바로 내가 죽을 곳이구나. 구불구불 더 나아가 앞채에 도착하여, 도로로 나가서 다른 주택으로 들어갔는데, 바로 서양상인 교승망(喬承望)의 저택이었다. 이곳이 바로 세 병사의 소굴이었다.
문을 들어가니, 병사 하나가 보이는데, 미모의 여자 몇을 지키면서 광주리에 산처럼 쌓인 색무늬비단 의복을 뒤적이다가, 세 병사의 도착을 보고는 으하하! 웃었고, 우리들 수십 명 남자를 몰아 후청으로 갔다. 부녀자들은 곁방에 남겨졌다. 그 방에는 탁자 두 개가 있고, 옷 匠人(장인) 셋과 중년 부인 한 사람이 옷 만드는 중이었다. 이 부인은 양주사람이었는데, 짙은 화장을 곱게 하고, 산뜻한 색의 옷이며 화려한 장식에, 웃는 말로 지휘하는 것이, 자못 득의양양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값나가는 물건이 나올 때마다, 병사에게 애걸하여 수중에 넣는데, 갖은 아양을 떠는 것이, 수치를 몰랐다. 나는, 병사의 칼을 빼앗아 이 요사스런 물건을 베어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지경이었다. 여기 병사가 훗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고려를 정복할 때에, 고려 부녀자 수만을 포로로 잡았는데, 몸을 내맡기는 자 한 명도 없었다. 어찌하여 당당 중국이, 수치를 모르기가 이 지경에 이르렀나?” 오호라, 이게 바로 중국이 大亂(대란)을 당하는 이유이다. (병사가 말하는 ‘고려’란, 조선을 말한다. 정묘호란 또는 병자호란에 참전했던 병사이리라.)
(==> 下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