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바둑으로 돌아와 보자. 흉내는 더러운 행위이고 꼼수이며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인가. 그래서 금기의 행위가 되어야 하며 나아가 성문화하여 규제하여야 하는 반칙인가.
비슷한 취지로 이미 말하였지만 스포츠의 테두리 내에서는 그 어떤 행위라도 선악이나 도덕윤리판단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여기서의 ‘그 어떤 행위’에 마테라치의 더러운 욕설이나 지단의 박치기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오해하실 분은 없으리라 믿는다. 확실히 하자면, 필자는 흉내바둑은 축구의 오프사이드에 유사하다 믿는다.)
만약 오프사이드가 허용된다면 승부결과를 바꾸게 된다. 오프사이드는, 그리하여 결국에는 축구의 본질을 파괴할 수밖에 없는데, 때문에 오프사이드는 우리가 다른 축구를 찾지 않는 한 허용할 수가 없다.
질문은 간단하다. 흉내바둑을 허용하면 승부결과를 바꾸게 될까? 그리하여 우리가 두고 있는 바둑의 본질을 파괴하게 될까? 오프사이드처럼 말이다.
기성 오청원이 목곡실(木谷實;기타니 미노루)과의 정선바둑에서 흑으로 첫 수를 천원에 두고 이후 백의 흉내를 내었다. 그래서 목곡은 몇 번이나 대국실을 뛰쳐나와 제3자(기자?대국 입회인?)에게 오청원 좀 어떻게 해달라고 하소연하였다.
그리고, 주원장과 이여송이 있긴 하지만 흉내바둑(물론 흑번바둑)의 세칭 원조는 삼국지의 조조가 아닌가 기억하는데 어떨지는 모르겠다.
목곡의 하소연과 우리에게 비치는 조조의 이미지는 이상하게도 흉내바둑에 선악을 개입시키고 시비를 개입시키게 만든다. 적어도 그렇게 오해함에 상당한 근거가 되어 준다. 그러나 이는 진실로 오해이다. 목곡이 대국장을 뛰쳐나와 항의할 정도로 흥분하게 된 이유는 승부에 대한 압박 때문이다. 덤이 없는 바둑이기 때문이다.
처음 당하는 흉내가 황당했을 수는 있겠다. 만약에 그 바둑에 덤이 있었다면, 황당하긴 하나 그대의 삽질 진정 고맙소 고맙소 하며 빙그레 속으로 웃고 말지 않았을까. 고맙소 고맙소 이 따위 기록 남기러 대국장을 뛰쳐 나가기까진 않았으리라. 아니 덤이 있는 바둑에서 애초에, 후대에 기성이라 불리는 분께서 흑번 흉내바둑을 시도하진 않았으리라.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거나 질려고 작정하지 않고서는 말이다.
(목곡은 오청원과 더불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포석의 제안자이다. 신포석은 발상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도 쾌거인데 바둑의 본질은 수의 자유, 착수의 자유이다. 이 자유의 첨단에 있는 이가 바로 목곡인데 그가 흉내를 접하여 흉내라는 수법 자체를 치사하다거나 부도덕하다 여겼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불가능이다. 물론 승부의 압박이라는 측면에서 오청원 당신 치사빤스요 했을지도 모르지만.)
조조의 흉내바둑도 마찬가지, 기민한 두뇌로 소문난 조조가 흉내를 착안했다면 바로 딱이라, 후대에 그런 전설이 만들어졌을 게다. 물론 덤이 있었는데 불구 흑번 흉내를 두었다면 그 사람은 우리가 아는 영악한 영웅이 아니다. ‘인덕’ 유비라면 몰라도 그가 조조일 수는 없다.
덤제도 이후 흑번 흉내는 사라지고 백번 흉내가 등장했다. 백번흉내는 승부를 바꾸는가. 승부를 바꿀 정도로 유력한 전법인가.
등택붕재(藤澤朋齋;후지사와 호사이)백번 흉내의 원조, 평생 대부분의 백번을 흉내로 일관했다 한다. 그러나 나는 등택붕재가 백번 흉내의 비법을 터득하였다(그래서 성적을 내었다)거나 흉내를 당한 상대가 ‘치사한 수법에 분노’하였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승부결과에 대한 영향력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흉내바둑을 당하는 기분이 유쾌할 리는 없다. 그렇다고 불쾌할 것도 없다. 호오 그 수법도 쓸 만한가 보지요? 어디 한번, 같이 가 봅시다. 정상적인 프로라면 이렇게 기꺼이 공동의 항해자가 되어 주리라.
이십여 년 전, 서명인이 왕위전 도전기에서 백번 흉내를 들고 나와 그 바둑들은 다 이겼다. 서명인은 말하기를 ‘조국수에게 늘 초반이 딸린다. 그런데 끝내기바둑은 나도 해 볼만 하지 않느냐 그래서 판을 좁히기 위해 흉내를 시도했다’고 하였고 우리가 알다시피 성공하였다.
서명인은 흉내의 비법으로 이긴 걸까? 끝내기 바둑의 강함으로 이긴 걸까? 서명인은 치사한 수법으로 승리를 구걸하였는가? 전략/전술상 발상의 전환으로 승리를 쟁취하였는가? 박승철 프로는 흉내바둑을 들고 나왔기에 그 세 판을 이겼을까? 흉내를 떠난 그 자신의 실력으로 이겼을까? (참고로 박승철 프로의 세 판째의 흉내에서 흑은 두 개의 축을 중앙에서 충돌시켜 흉내를 타파하는데, 관전기는 상대인 흑번이 포인트를 얻었다고 결론지었다.)
초중반은 약하고 끝내기는 상대적으로 자신 있다 고 했을 때 흉내는 유력한 전법이 된다. 미세하게 기력이 기울 때는 더욱 유력하다. 반점이나 한점쯤 상수를 만나 그의 기력을 미리 알고 둔다 했을 때 시도해 봄직하다.
필자는 천원바둑도 그렇지만 반점이나 한점쯤 상수를 만나 그의 기력을 미리 알고 있을 때조차 흉내바둑을 둬 본 적이 없다. 천원바둑은 유리해진다는 보장이 전혀 없기 때문이고 또, 후자의 경우 상당히 유력하다 생각은 하지만 왠지 좀 껄쩍지근.. 다시 말해, 뭐 그렇게까지 이겨야 하나 그런 생각이 무의식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비슷한 맥락(으로서 결정적인)의 이유인데,(이하 박승철 프로의 흉내바둑기사에 달린 꼬리글이다.-사이버오로)
바티즌A:흉내바둑 어떻게 보면 정말 치사한 수법이지요.. 흉내바둑에 제한을 두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B:바둑계 스스로가 성문화된 금지규정이 없더라도 불문률로라도 금기시해야 할 행위라고 봅니다. 상대는 장고하고 머리를 싸매는데, 아무런 고민도 없이 약올리듯이 툭툭 던져 놓는 흉내바둑... 그것이 진정 바둑입니까?
승리도 중요하지만, 바둑계가 먹고 사는 기반인 바둑팬의 정서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흉내바둑을 보면서 구역질이 나올려 합니다. 아주 안 좋은 단어들만 연상됩니다.
C:얼마나 실력이 없으면 따라서 두나요. 한국바둑 창피합니다
그러시는 분들을 만날까 그래서 괜한 시비에 말릴까 싶기 때문이다.
하나 확실히 해 둘 것은, 필자의 짐작이지만 하급자일수록 흉내를 부정적으로 보고 상급자일수록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문용직 프로의 글 흉내바둑에 대한 오해를 보면 알겠지만 거의 모든(전부라 해도 된다) 프로가 흉내에 대한 반감이 전혀 없으며 아마추어들도 고수일수록 반감이 희미해진다. 문프로는 기사에 달린 네티즌의 대세에 가까운 반감에 약간 뜨악한 인상을 받았음을 감추지 않는데, 인터넷상의 증폭이라는 특성을 고려해보면 피상적으로 나타나는 만큼 반감이 그렇게 극단적일 리는 없다.
물론 바둑의 급수는 피라미드형일 터이므로 반감을 갖는 이가 우세하긴 할 것이다. 그러나 말하였다시피 프로라면 반감이라는 단어조차 떠올리지 않으며 아마추어 고수급이라면 낯설음에서 오는 황당함은 몰라도 흉내바둑을 적어도 적대시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바둑수준이 있기에 흉내에 농락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 그런데 전적으로 짐작일 뿐이다. 이 짐작은 설문조사를 해보면 간단히 밝혀질 일이긴 하다. 그러나 필자가 ‘당국‘도 아닌 처지에 직접 설문조사까지 하긴 귀찮고, 간단한 실험을 해보기로 하였다. 간단한 실험이란 직접 백번 흉내바둑을 두어 반응을 살피는 일이다.
070720 밝은 대낮, 이유도 모르고 ‘재수 없는’ 일을 당한 분은 yanzh*dong, 성의*현, awowo**, 아*거 네 분이었다.
(당초 실험을 10국 이상 할 요량이었으나 이런 저런 여건상 4판으로 그만두고 말았다.)
yanzh*dong: 중국기우, 15수째에 천원을 두어 흉내를 중단시킴. 백승
성의*현: 25수를 완착으로 보고 26수 째에 (오히려)백이 (스스로) 흉내를 중단, 흑승
awowo**: 중국기우, 13수에 천원 점령, 흉내 강제 중단. 백승
아*거: 26수에서 흑이 기권 후 즉시 퇴장
네 분 모두 공통적으로 흉내가 확실해지는 8수나 10수 쯤에서 살짝 장고, 대응 전략이나 대응 태도를 고민하는 시간이었다고 추측됨. 감상이라든지 불쾌감이라든지 여하 간에 어떠한 발언이라도 하신 분 아무도 없음. 재대국 요청이 오면 당연히 받을 작정이었으나 요청한 분 없었음.
26수 째의 기권은 아마도 부정적 감정의 표현이라 추측되고 나머지 세 분이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모니터 대국의 특성상 전혀 알 도리가 없다. 단지 흉내가 중단된 15수, 26수, 13수 째에는 승부에 영향을 미칠 어떠한 결과도 발생하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승부는 그 이후에 판가름 났고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게 호선의 흉내이기 때문이다.
왜 많은 아마추어들이 흉내를 치사하다거나 기타 부정적으로 여기며 더욱이 (필자의 막연한 추측이긴 하지만) 하급자일수록 그 비율이 높을까?
이유를 다 늘어놓아 보자
1.승부에 영향을 미친다. 공평하지 못하다. (하급자일수록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고 본다.)
2.바둑은 지력(智力)을 다투는 게임이다. 그런데 상대의 수를 흉내 내다니 이는 공평하지 못한 행위이며 두뇌를 베끼는 행위 아닌가. 고로 흉내는 바둑의 본질을 파괴한다. 반칙이다.
3.타파법을 모르니 더 신경질 난다.(하급자일수록 타파법을 어려워한다 고 본다.)
4.사술(邪術)이기 때문이다.(위 모두의 최종결론인 셈, 역시 하급자일수록 그렇게 생각하는 비율이 높다 고 본다.)
(하급자, 하급자..하급자 무시하는 걸로 비춰질까 걱정이 되긴 하는데..이거 참..)
1.승부에 영향을 미친다 에 대하여 그렇지 않음은 이미 말하였다. 그렇다면 공평하지 못하다 할 건 아니다.
2.일종의 표절이요 도둑질이다. 이 문제제기는 바둑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로 귀착되는데, 그럼 바둑의 본질이 무엇인가? 무엇이 바둑인가? (동어반복 하여 보자) 바둑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앞에서, 축구가 「일정시간 동안, 일정 수의 팀원들의 협력으로, 팔이나 손 이외의 신체를 이용하여 공을 상대편의 문에 넣는 득점의 다소로 승패를 가리는 스포츠」로 정의된다고 하였다. 또 오프사이드가 원래의 정의이자 그 정의에 의한 본질에 어긋나지는 않지만 어떠한 기원에 의해 금기시되었고, 급기야 반칙으로 규정되었고 이 규정은 축구의 본질을 재규정하였다(‘축구는 오프사이드에 의해 축구가 되었다‘를 상기하시길)고 하였다.
오늘날도 축구는 여전히「일정시간 동안, 일정 수의 팀원들의 협력으로, 팔이나 손 이외의 신체를 이용하여 공을 상대편의 문에 넣는 득점의 다소로 승패를 가리는 스포츠」이지만 오프사이드 없는 축구는 상상할 수 없다. 오프사이드는 정의에는 없지만 정의이며 결국 현대축구의 본질인 셈이다.
바둑은 어떻게 정의될까. 흉내를 염두에 두지 않은 단계에서 (대충) 정의하여 보자. 「두 측의 대국자가 일정 규칙에 의해서, 그리고 번갈아서, 돌(바둑의 도구)을 19×19의 관념적 공간에 착수하여 종국 후 돌에 의해 둘러싸인 영토의 다소로 승부를 가리는 게임」정도면 그럴 듯한 정의가 될 터이다. 일정 규칙의 대표적 예는 사활규정이며 기타로는 제한시간,착수금지, 패 등등이 된다.
누구라도 흉내가 위 정의에 의한 바둑의 본질에 배치된다 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일종의 숨겨진 본질로서,) 바둑은 지력의 고하를 다투는 게임인데 남의 수를 본뜨다니, 상대의 지력을 훔치는 행위이고, 그렇다면 반칙이 아닌가 라고 문제제기할 것이다. (위 네티즌처럼)
지력의 고하는 어떻게 판가름날까? 당연하게도 승패로서 판가름난다.
앞에서 말하였다 스포츠는, 승리의 추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당한 경쟁 수단에 의한 승리의 추구이다. 이 ‘정당한 경쟁 수단’ 이라는 제약은 금기를 만들고 자유를 구속한다. 허나 이 ‘정당한 경쟁 수단’은 원래 또는 보편적으로 또는 모든 스포츠를 관통하여 ‘정당하지 못한 경쟁 수단’이라 정하여지거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해당 스포츠의 틀, 즉 그 스포츠의 본질 위에서 정하여진다.
몸동작 스포츠는 몸과 그 동작기술의 고하를 다투는 게임이며 그 고하는 승패에 의해 판가름난다. 축구의 오프사이드는 그 승패를 바꾸는 파괴력이 있으므로 규정으로 금지한다.(물론 허용하여 ‘다른 축구’를 즐길 수도 있다.)오프사이드는 ‘그 자체로 부도덕하여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우리축구’의 본질을 파괴하므로 ‘정당하지 못한 경쟁수단’으로 취급받는다.
두뇌 스포츠, 바둑, 흉내도 마찬가지이다. 바둑은 돌의 수순과 모양을 둘러싼 지력의 고하를 다투는 게임이며 그 고하는 역시 승패에 의해 판가름난다. 바둑의 흉내는 그러나, 축구의 오프사이드와는 달리 승패에 전연 무관하다. 특수한 경우(위에서 예를 든 서명인 사례, 같은 예로 반점 내지 한점 상수를 만난, 끝내기는 자신 있는 하급자의 경우) 미미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으나 상대방보다 나은 끝내기 실력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다르게 말하면 흉내 그 자체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자살에 다름 아니다. 승리의 주요 동인은 상급자에 못지않거나 오히려 앞서는 끝내기 실력이지 흉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흉내는 유력한 전략이 되어야지 사술이 되지는 않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유희의 추구라는 속성에서 도출되어지는 ‘금기보다는 자유’ 라는 스포츠(또는 게임) 궁극의 본질도 흉내정당화의 일 근거가 된다.
다른 어떠한 스포츠보다도, 바둑은 (착수의) 자유가 극대화된다. 기착점, 패나 착수금지구역 말고는 어떠한 좌표라도 우리는 착수할 수 있다. 착수의 자유는 (자기 완결성과 더불어) 바둑만의 특징적 자랑이다. 본질의 수호를 위해 인위적으로 오프사이드 규칙과 심판을 두어야 하고, 이 규정과 심판의 판정 때문에 온갖 잡음이 생기는 축구보다, 우리가 바둑을 더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불가피하지도 않은데 불구 착수의 자유를 제한하여 금기를 만들고, 결국에는 바둑의 자기완결성을 해친다면 결국 바둑을 해침에 다름 아니다.
바둑에는 표절이 없다. 표절이란 나의 것이 아닌 것을 무단으로 이용하여 내 것의 가치를 높이는, 정당하지 못한 행위이다. 집필자의 입장에서 도서의 가치는 판매부수이다. 대국자의 입장에서 바둑의 가치는 당연히 승패이다. 흉내하여 보았자 승리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면 도둑질이란 비난을 붙일 수도 없으리라.
3.승부에 영향을 미치고 안 미치고 간에, 나는 상대가 흉내 내는 꼴 못 본다, 게다가 타파법을 모르니 더 신경질 난다.
타파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두 개의 축을 만들어 천원근처에서 충돌시키는 법이 하나, 천원의 가치를 극대화시켜서 적당한 시기에 내가 천원을 차지하는 법(이후에 내가 역으로 흉내하는 보너스도 있다.), 아 또 하나, 마지막으로 이 꼴 저 꼴 보기 싫어 던져 버리는 법이 있다.
고수가 아닌 바에야 두 번째로 충분하다. 18급도 할 수 있다. 필자의 ‘실험‘에 '순순히' 응한 세 분이 모두 이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근데 이럴 수는 있을 터이다. 서명인의 흉내를 당한 조국수, 아마도 ‘초반에 그대에게 한 방 먹이지 못하니 심히 불쾌하오’ 라 내심 혀를 찼을 수 있고, 우리 평범한 아마추어라면, 나는 삼연성도 써보고 미니 중국식도 쓰(서 우세해지)고 싶다 나 연구 많이 했다 이랬는데, 상대가 흉내를 해오는 바람에 이건 미니중국식인 것도 아니요 미니중국식이 아닌 것도 아니게 되어서 내가 고생하여 연구한 거 써먹어 보지도 못한, 쥐랄 개판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거 괘씸하다 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게 괘씸하다면 괘씸하지 않은 상대가 어디 있겠는가 삼연성 해볼려는데 그 이연성 가운데다 턱하니 갈라쳐 오는 상대도 괘씸, 중공식 할려는데 걸침에 협공해오는 상대도 괘씸, 그러다 보면 오늘따라 너무 잘 두는 상대, 그대도 괘씸하구나?
4.사술(邪術)이기 때문이다.
축구의 시저스킥도 사술, 농구의 덩크슛도 사술, 야구의 번트도 사술, 탁구의 회전 최대로 먹인 캇트도 사술이다.
그러나 위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흉내바둑의 부정은 위 예와는 좀은 다른 지점에서 온다. 그 지점이란, 공포감 내지 두려움을 주고 그래서 짜증을 돋구는, 바둑만의 지점을 말한다. 바둑에는 분명히 그런 지점들이 있다.
상대가 초반에 (대)외목,(대)고목에 둘 때, 초반에 나의 화점이나 소목에 붙이거나 어깨를 짚는 등 변칙으로 두어 올 때, 그대와 나 둘이 정석으로만 둔다면 화목하여 좋겠는데 ‘정석과정’에 없는 수 즉, 함정수를 두어 올 때, 안되는 곳에 수작을 부리거나 방심을 기대하는 수 흔히 말하는 꼼수를 두어올 때, 대국자는 본능적인 거부감과 짜증에 휩싸인다.
위 모든 수들을 통칭하여 꼼수라 했을 때, 상급자이든 하급자이든, 프로든 아마추어이든 공통적으로 꼼수를 싫어한다. 다만 전자는 바둑에 꼼수는 없다 수에는 감정이 없다 하면서 분을 자책으로 삭이는 경향이 좀 더 많고 후자는 자책보다는 그러한 수를 두는 상대에게 감정을 전이시킴로써 분을 삭이는 경향이 많다. 왜냐하면 전자는 피해경험이 희미해졌고 앞으로 당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고 후자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당하고 있고 언제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나의 예로, 1수에 어깨 짚는 2수를 두어오는 상대는 대체로 본 실력을 감추고서, 상대를 갈구는 수를 두어 이김으로써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하는 (진정한 비매너인 자다.)인 자가 많다. 그래서 그런 상대에게 지면 정상적으로 졌을 때 보다 더 화가 난다. 동수에게는 지면, 그저 지나보다 하지만 급수를 속인 자에게 지면 더 화나는 현상과 마찬가지다.
하급자일수록 흉내를 위에서 통칭된 꼼수와 동일시한다. 자꾸 노파심에서 나서 하는 말이지만 바둑의 수에 감정은 없고 수에 비매너는 없다. 실력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필자같은 보통의 인간은 상대가 1수에 외고목을 두면 2수에 걸쳐가고, 2수를 어깨 짚는 변칙을 두면 3수로 반드시 더한 짓을 함으로써 늘상은 아니지만 ‘불쾌감을 표시’한다. 아직도 가끔은 외고목의 함정수에 당하여 초반 이르게 바둑을 버린 적도 많고, 또한 변칙수를 두는 자는 대체로 진정한 실력이 가늠이 되지 않는 고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흉내는 다르다. 그 타파법은 매우 간단!하고 또, 몇 십 수 흉내를 허용한다 하여 (꼼수에 당한 경우와는 달리) 딱히 유불리가 갈리지 않는다. 보통의 꼼수보다는 ‘용서’의 여지가 매우, 훨씬 크다. 하긴 ‘꼼수를 금지한다’ 는 규정조차 없는데 ‘흉내를 금지한다’ 는 규정이 말이 되는가.
뻥패스를 받아 골을 넣는 행위는 축구의 원래 본질에 어긋나지는 않지만, 그 단순함이 축구의 묘미를 반감시킨다. 때문에 오프사이드라는 인위적 규정을 두어 금지시킨다.( 이 금지는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으로, 이 금지에 의해 재차 축구의 본질이 변화된다.) 뿐만 아니라 경기 내의 각종 반칙을 통제하기 위해 선수가 아닌 심판을 (인위적으로) 두고 핸드볼 백태클 시물레이션 등 반칙여부를 판정케 한다. 심판은 사람이므로, 같은 행위가 어떤 심판에 의해서는 반칙이 되기도 하고 그게 아니다 판정되기도 한다. 그리고 시물레이션이나 (마라도나나 메시가 행한)손으로 골을 넣는, 축구의 본질을 파괴하는 ‘극악한’ 행위도 심판이 간과하면 ‘정당하지 못한 경쟁수단’이 아닌 것으로 취급받게 된다.
결국 선수가 아닌 심판이 ‘몸과 그 동작기술의 고하를 판단‘하는 결과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반드시 생기는데 이런 회피불가능한 축구의 근원적 모순을 축구인들은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 하며 정당화한다. (비난이 아니다. 축구를 계속하는 한 불가피하며 그저, 그렇다는 얘기일 뿐이다.)
바둑은 바둑 자체의 규칙에 의해 완결된다. 선수가 아닌 제 3자가 승패를 결정하는 경우가 없는, 바둑은 자기완결적 게임이다. (초읽기는 예외이다. 그래서 필자는 초읽기를 기계에 의해야 한다고 본다. 이는 축구에서 기계에 의한 판정을 거부하는 이유와는 반대의 이유 때문이다.)
바둑의 규칙에는 바둑 자체로부터 파생되지 않는 것이 없다. 만약 ‘흉내를 금지한다’ 는 규정을 만든다면 이는 바둑 자체에서 파생되지 않는, 축구의 오프사이드와 같은 규정이 되어버린다. 오프사이드 규정은 축구를 살리지만 흉내금지는 바둑을 파괴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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