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강박
한글이 세계 최고의 문자 라고, 제일로 배우기 쉽다 라고 시작한다. 또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우선으로 사용하기 위해서’한글을 만들었다 라고 주입한다. 여기서부터 강박이 싹트기 시작한다. (최종 목적지는 ‘한글 만능’이다.) 양반네들, 중국 숭배와 계급적 배타 의식과 먹물근성에 찌든 이들, 창제 시부터 반대로 일관하더니 창제 후에도 언문이니 상놈글자니 무시하고 한문만 진서眞書라 하여 사용하였음도 빠뜨리지 않는다. 이리하여 일차, 한글 우월주의와 한자 혐오의 인이 박히기 시작한다.
조상들의 한자/한문 숭배, 말과 글의 괴리를 비웃는 후손들, 한글(문자)과 국문國文의 대중화, 말과 글의 일치라는 쾌거를 이루긴 하였으되, 한자 혐오의 역 폐단弊端을 낳았다. 후손들은 게다가 새로운 폐단까지 끌어들였는데, 조상들의 한자/한문 숭배 이상으로 하는, 우리의 말에서의 영어 숭배가 그것이다. (유의할 것이, 우리는 글자와 글, 말을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
‘하늘 천 따 지’를 대체代替한 건 에이 비 씨 디, 한자/한문을 내치고 새로이 상전이 된 건 영어다. 과거‘우아한 미인’보다‘優雅한 美人’이 뭔가 있어 보였듯이, 지금은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하죠 보다‘엘레강쓰한 분위기를 프로닥뜨하죠’라 말해야 더 세련되어 보일 거라고 여긴다. (그런 사람이 많아졌다.) 한자는‘남의 것’이라 하며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왜 더 남의 것인 영어에는 죽어라 우리들의 언어생활에 섞지 못해 안달일까.
왜 우리가 타는 버스의 표가 토큰이 되어야 하고 우리가 가는 동사무소가 왜 주민 센터가 되어야 할까. 외국인들도 우리 버스를 타고 외국인들도 우리 동사무소에 가니까?
우리말 단어의 칠십 퍼센트가 한자어라고 한다. 한자를 모르면 한자로 된 단어의 뜻을 즉시 파악함에 지장이 온다. 미분ㆍ적분에 옆집 서분이 얼굴 밖에는 생각나지 않는 학생(사는 데 지장은 없다지만)과 미분=잘게 잘게 자름, 적분=쌓아 올림이 즉시 떠오르는 학생, 누가 조상으로부터 혜택 받은 학생인가? 微分ㆍ積分의 한자를 반드시 알아라 고 강요하는 행위가 폭력이긴 하지만, 미적분을 업으로 삼아 살아갈지도 모를 미래의 전문가로 하여금 (한자를 몰라) 정확한 개념파악에 쓸데없는 노력을 들이게 만드는 일 또한 폭력이다.
우리 것이니 남의 것이니..한자는 남의 것이라 배척하겠다 배척하여 우리 얼을 살려야 한다는 논리라면 영어는 우리 것이라서 숭배하는 것이며 우리 것이라서 그토록 ‘얼’이 빠지도록 국어에 섞어 넣지 못해서 안달인가. 궁극적으로 말해 보자. 한자가 설사 남의 것이었다 하더라도, 이천년이나 우리가 써 왔다면 이젠 우리 것 아니던가. 우리의 얼에 깊숙이 배어 버렸다면 우리 것이다.
효용면에서 토박이‘말’은 장점과 단점 양면을 지니고 있다. 이 토박이말에 적합한 한글이라는 문자 역시 장점도 많지만 단점도 많다. 만능은 더더욱 아니다. 토박이말이 반드시 선善은 아니고 한자어가 반드시 악은 아니다. 한자어를 토박이말로 대체시키는 국어순화가 지고지선도 아니다. 효용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토박이말도 우리말, 한자어도 우리말이다 했을 때,‘미분’이라 할 것인가‘잘게 잘게 자름’이라 할 것인가 는 전적으로 효용의 문제이다. ‘잘게 잘게 자름’으로 하겠다면 (고전의 해석문제는 별론,) 한자는 필요 없다. 미분이라 하겠다면 적어도 학창 시절에 微자와 分자를 접해볼 기회는 주어야 한다.
과연 우리가 우리말 속의 모든 한자어를 ‘잘게 잘게 자름’식으로 바꾸어 쓸 수 있을까?
하나 더 말하자면 토박이말만으로는 세월이 유수같이 빨리 흐르는 이 시대에 무시로 창출되는 신개념에 맞추어 새로운 말을 즉시 대령하기가 힘들다. 한자어(조어력과 축약력이 탁월하여 신개념에 대응하는 힘이 좋다 한다.)는 그렇게도 싫기에, 토박이말로는 힘이 닿지 않으니 별 수 없이 영어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결국 한국어는 영어에 점점 침식당하고 있다. 한글 전용론의 입장에서 보기에 이런 상황은, 한자어든 영어든 표기만은 한글로 하고 있으니 만사형통, 최고의 문자 한글의 순수혈통이 이렇게 고이 보존되고 있지 않느냐.. 정히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모든 게 노무현 탓이라더니 웬 걸. 이 ‘엘레강쓰하고 뷰우티퓰한’상황, 오늘날 한국어 오염은 한자강박(혐오)과 한글강박(만능)과 영어강박(숭배), 한 마디로 말해 모든 게 한글 전용론 탓이다.
고력古力을‘구리’라 부름은‘엘레강쓰하고 뷰우티풀’한 짓이다
한자 혐오를 기저基底에 깔은 한글 전용론이 필경 가지 않을 수 없던 지점이 「현지 원음주의」이다. 외국 고유명사의 표기에 있어「국립 국어원」주도하 현재의 준칙인 현지 원음주의를 일본과 중국의 고유명사만 놓고 말하자면, 「한자만은 죽어도 쓰지 못 하겠다 주의」에 다름 아니다.
한자를 버릴 수도 없고 버릴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고유명사는 특수한 경우이니 달리 생각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현지 원음주의가 옳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또한, 평소에‘엘레강쓰하고 뷰우티풀’에 혀를 차던 사람도, 원래가 구리이니 우리도 구리라 불러 주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어떨까.
외국인 사람의 이름을 그 사람의 발음대로 불러 주자 - 일견 타당하고 아름다운 대접인가 싶고 그래서 그렇게 하고도 싶지만, 그렇게 하고 있는 나라가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 1개 나라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재차 숙고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인 Henry를 우리가 앙리라고 원음에 최대한 가깝게 표기/발음해주는 이유는 우리는 알파벳과 다른 문자인 한글로 표기/발음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인 Henry를 굳이 영어식으로 헨리라 할 이유가 없기에 말이다. 역으로, 그네들이 ‘노무현’을 표기/발음할 경우 (각각 표기/발음이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공통적으로 ‘노무현’에 가깝게 발음하려 할 것이다. 그네들의 문자가 어차피 ‘노무현盧武鉉’에 사용되는 문자와 다르다면 한국 사람을 굳이 중국식으로 발음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결국 이 부분은 현지 원음주의에 따름이 옳다.
그런데 프랑스인 앙리를 영미인들과 독일인들은 현지인 프랑스의 문자와 같은 문자(;알파벳)를 사용하는 덕에 그것으로 표기하되 자기식대로 표기하고 자기식대로 발음한다. 해서 앙리가 헨리/하인리히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고력古力과 같은 문자(;한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지 원음인‘구리’라 불러 주어야 한다고 자승자박하고 있다. 우리 문자(;한자)로 표기하고 우리식(한자의 한글 발음)대로 발음하면 될 것을 말이다.
남들이 앙리를 헨리라 하든 하인리히라 하든, 언어생활의 효용상 ‘구리’가 낫다면 설사‘전 세계 나라 중 단 하나의 나라’가 된다 한들 수용해야 하리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구리보다 고력이 낫다. 빛날 요 빛날 엽의 진요엽陳耀燁이 ‘천야! 오예’로, 준걸 걸의 공걸孔杰이 ‘콩쥐(가) 에에’로 둔갑되어 버렸을 때, 이것들은 이름의 본뜻을 전혀 내포하지 못하게 된다.
‘외국인의 이름에 뜻타령은 하지 말자 친숙하게 다가오고 기억하기 쉽다면 그것이 정답이다’라고 반박한다면, 그래도 (한자와 상관없이) 예내위, 주예양, 진요엽이 루이나이웨이, 저우루이양, 천야오예보다 한결 친숙하고 기억하기 쉽다고 말하겠다. 꾸이저우 커쑤팅이나 런민르빠오가 나을까 귀주 해속정이나 인민일보가 나을까. 어느 것이 친숙하게 들리고 기억하기 쉬운지.
조지 부쉬나 웨인 루니가 친숙하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가 학창 시절에 영어 고문拷問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부모 세대 중 그런(영어 고문) 경험이 없는 분들은 조지 부시가‘좆이 붇 이’로 들리고 웨인 루니가‘왜 인(서) (오줌을) 누니’로 들린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늘그막에 그렇게 학대당하신다.
우리들은 어떤가, 중국어 고문의 ‘복’이 없는 사람에게 꾸이저우 커쑤팅 런민르빠오가 어떻게 들릴까? 어떻게 들리는지? 우리가 기어코 우리 스스로를 학대하여야 할까?
현지 원음주의 거부를 두고 그 현지인에게 무례한 행위이다 말한다면 그러한 예의는 극도의 허위의식이라고 말하겠다. 외국 사람의 이름을 현지 원음대로 쓰고 읽어야 한다는 의식, 평생 한 번이나 만날까 말까 하는 그 현지 사람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심지어 그 현지 사람이 우리 발음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경우도 무척 많다 한다. 우리가 아무리 꾸이저우 꾸이저우.. 아닌가? 꿔이저우?..한들 귀주 사람들이 퍽이나 알아듣겠다.) 사용자인 우리를 위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한자 배척 감정에만 봉사하는 허위의식이다. 우아한 미인을 굳이 優雅美人이라 적는 한자 숭배의 허위의식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허위의식이다. 조상님이 웃으신다.
행여 한국기원에 갈 일이 있어 예내위 아줌마를 그곳에서 만난다면 ‘루이 사범님’하고 부르겠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毛澤東이 모택동(마오쩌둥이 아닌)인 시절에도 후쿠다는 후쿠다요 다나카는 다나카였다. 왜 그렇게 되었던가, 우리의 아픈 역사 때문이다. 일본 제국은 총독부령(기묘년1939) 으로 이 땅의 말과 글에 있어 일본의 인ㆍ지명을 현지 원음으로 사용하도록 강요하였다. (우리에게 원래 현지 원음주의가 없었는데 불구,) 이렇게 강요에 의해 잘못 시작된 규정 아닌 규정이 해방이 됨에도 바로 잡혀지지 못하고 관행으로 굳어져 전중田中이 다나카로 되어버렸다.
그래서 毛澤東은 모택동으로 田中은 다나카라 하는 기이한 상황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래도 일부 사람들은 우리의 주체적인 언어생활을 견지하였는데 바둑계의 예를 들자면, 필자 어린 시절에 사카다보다 판전坂田을 기타니보다 목곡木谷을 조금이라도 더 자주 접하게 된 사유이다.
그러나 상황은 더 나빠지고 말아버린 지금인데, 권유 수준에 머물던 현지 원음주의가 전면 관철되는 상황이 그것이다.(1989) 그리하여 그나마 혼용되어 오던 소림-고바야시, 무궁-다케미야가 각각 후자로 완전히 정비되었고, 별 무리 없이 잘 써오던 마효춘 섭위평이 갑자기 마샤오춘 녜웨이핑이 되어 버린 상황이다.
영어에 약한 사람에게‘엘레강쓰한 분위기를 프로닥뜨하죠’라고 알량한 영어실력을 과시하는 행위는 폭력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무지렁이’어머니들에게 이렇게 말해 보라.) 마찬가지로 일본어나 중국어에 약한 사람에게 꾸이저우 커쑤팅이나 런민르빠오를 들먹이는 행위도 폭력이다.
구리나 뤄세허나 후야오위, 야마시타, 다카오 등은 쉽지 않은가 라고 반박할 수는 있겠으나 이야말로 고소苦笑를 머금게 하는 헛소리이다. 그 누구도 그것들이 고력, 라세하, 호요우, 산하, 고미 보다 쉽다고는 못하리라.
후자가 가령 두 번 만에 기억창고에 입력된다면 전자는 반드시 세 번 네 번 다섯 번 정도는 반복해 주어야 한다. 구리, 야마시타...등이 우리에게 익숙하게 들리는 건 바로 우리가 짧게는 십여 년, 길게는 몇 십 년을 고문당해왔기 때문이다.
총독부령으로 시작되고, 한글이 최고라는 조작된 신화에 기반한 한글 전용론의 함정에 빠져 현지 원음주의의 망령에 고문당해 왔기 때문이다.
고력古力을 ‘구리’라 부름은 그러한 고문을 계속 받자고 하는 짓이며, 그야말로‘엘레강쓰하고 뷰우티풀’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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