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옌데, ‘세계 최초의 선거로 선출된 사회주의 정부’는 그들이 원하던 바 인민 친화적인 정책을 강행한다. 이건 물론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원하는 국내, 국외 세력의 바램과는 애초부터 양립을 모색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다.
마침내 9월 11일 (1973년) 쿠데타가 일어난다. 세계 최강국의 물밑 사주와 육해공 경찰을 망라한 반란병력과 압도적인 화력 앞에 인민의 지지는 당장에는 힘이 되지 못했다. 쿠데타 발생소식을 들은 직후, 아옌데는 19인의 경호원과 함께 소총으로 무장한 채 자신의 (대통령)궁으로 들어간다.
항복하고 해외망명을 떠나라는 반란군의 최후통첩을 거절하고 대통령은 전투기와 탱크에 맞서 소총을 들고 저항하기로 한다. 결국 공군 전투기에 의한 폭격이 있은 후 탱크가 궁으로 진입한다.
얼마 후 몇 발의 총성이 들렸다. 누군가는 "대통령의 유해는 머리가 갈라지고 뇌 속의 것들이 마루와 벽에 튀겨져 있었다"고 전했다. (「다시 아옌데를 생각한다」로부터 발췌인용)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비잔티움 제국이란 물론 동로마 제국이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갈라지고 그 중 한 붙이인 서로마 제국이 일찍이 멸망한 이래, 榮枯영고와 성쇠를 거듭하며 제국의 명맥을 이어온 천년 여, 제국은 마침내 종말을 맞이한다.
투르크군의 공세에 맞서 45일을 끌어오던 수성전투, 수비측은 삼중성벽의 외성과 내성을 연결하던 통로를 스스로 폐쇄하고 그 열쇠를 황제에게 맡기는, 일종의 배수진을 친 상태였다. 이런 상태로 백병전이 이어지기를 몇 시간여,.. 원군으로 온 용병부대의 대장이 어느 순간 부상을 당한다. 대장은 황제에게 자신을 내성 안으로 옮겨 주기를 요구하고, 황제는 거절하지 못하고 내성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 주고야 만다. 대장의 나약한 모습에 일순 용병들의 동요가 일고 이를 눈치챈 투르크군이 이 때다 하고 노도와 같은 공격을 가한다.
제국의 지나온 세월은 길었지만 운명은 짧은 순간에 결정되었다. 순식간에 외성벽 안에 수비자보다 공격자가 많아진다. 모든 것이 틀어진 순간, 콘스탄티누스 11세는 황제로서의 기장을 모두 벗어던지고 칼을 든 한 사람의 병사로서 전장으로 몸을 던진다.
역사란 것이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그래도 그것 말고도 남는 인상이 있다면 패자의 뒷모습일게다.
의자왕은 당으로 끌려가 죽을 때까지 살았으며 경순왕은 왕건에게 머리를 조아렸고, 고종은 적에게 독살의 기회를 주었고, 송나라 휘종은 금나라 병사들에게 끌려가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명 황제 숭정은 매산에서 그나마 스스로 목을 맴으로써 스스로의 존엄을 지켰을까.
항복 후 망명을 하거나(아옌데) 술탄의 요구에 응함이 순리였을지도 모르지만, 소총을 들고 저항하다 대통령 궁의 벽에 뇌수를 뿌리거나(아옌데) 한 자루 칼에 의지하여 백병전에 뛰어드는 쪽(콘스탄티누스 11세)을 택했다. 아마도 그들은 스스로의 존엄을 지켰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 말해보아야겠다. (그것이란 엊그제 세돌과 공걸孔杰의 대국이다.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알다시피, 바둑은 우여곡절 끝에 극미한 국면으로 흘러갔고 마지막까지 팽팽한 긴장국면이 이어지던 순간에 느닷없이 수십 집이 오가는 대 바꿔치기기 일어나더니 의외로 세돌의 넉넉한 승리로 끝이 났다.)
그 몇 수가 공걸의 시간에 쫓긴 깜빡인지, 분노의 자폭인지, 이도 저도 아닌 흔히 말하는 꼬장인지 당사자가 아닌 다음에야 자신할 수는 없다. 그 막판의 순간이 공걸이 시간벌점을 이미 받은 상황인지 받기 전의 상황인지조차 모르는 국외자로서 더욱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긴 해도...
(이하는 필자가 상당한 개연성을 자신하는, 그렇지만 일종의 ‘소설’이다. 만약 바둑이 두어지는 현장의 분위기를 직접 보았다면 제대로 알 수 있었겠지만.. )
반집패를 해 보셨는지? 나아가 막판에 ‘눈물을 머금은 가일수’를 하고서 반집패를 하여 보셨는지?
棋理기리상 가일수가 순리라 할지라도 그 가일수로 반집을 지는 경우, 많은 사람들이 가일수를 거부한다. 심정적으로 가일수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여주기를 원하는 그런 심리이다. 때문에 가일수를 거부하고 조용히 상대의 처분을 기다린다. 순리대로 가일수를 하고 반집을 지는 방식이라 해도 존엄을 잃지는 않겠지만, 그것과는 다른 이 방식도 승부를 마감하는 일 방식이요 존엄을 지키는 하나의 방식이다.
세돌과 공걸의 그 바둑은 정상적인 끝내기라면 「반면 흑 7점승」(덤을 고려하면 백 1점승 또는 백 반집승, 쌍방 시간 벌점 없다고 가정했을 때)이 예정되어 있었다. 흑은 4,6방면(백 대마 사활 관계/아래 기보 참조)과 우하 방면에 가일수가 필요하다. 이 가일수의 필요 여부와 그로 인한 승부의 결과를 세돌도 알고 있었고 공걸도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다시 말해 공걸은 자신의 반집패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운명을 알고 있는 공걸의 선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바둑의 手수에 감정은 없다지만 그건 理想이상이고 실제 바둑의 수에는 감정이 있다.
해프닝(이라 보인) 순간이 지나가고서 공걸의 마지막 몇 수를 한 수 한 수 찬찬히 놓아 본 결과.. 뭐랄까..바둑 두는 자의 진한 슬픔, 분노 같은 것이 느껴왔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필자가 수많은 바둑을 그렇게 져보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의 아픔..공걸의 심정을 어찌 모를손가! 그러면서 한편으로 아옌데나 비잔틴 황제에게서 느끼던 그 감정이 함께 겹쳐졌다. 역사란 것이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기보를 보자. 백5에 흑은 귀에 가일수함이 ‘순리’이다. 그러나 아까도 말하였듯이 흑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빤히 반집패(응씨룰이라도 이건 마찬가지이다.)가 보이는데 그렇게 하는 건 바로 항복선언이기 때문이다.
온 하루를 바친 승부의 서글픈 종막(백의 강요에 가일수하여야 하고 그래서 반집패)을 필자가 추론하기에 공걸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공걸은 승부는 졌지만 존엄만은 지키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하나의 음모를 예비하고 실행에 옮긴다.
필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2와 4의 수 때문이다.
고수는 단수에 민감하다. 그래서 공배를 메울 때도 내 돌이 단수에 가까와지게 하는 수는 가급적 뒤로 미룬다.(고수에는 못 미치지만 필자도 그렇게 한다.) 그래서 보통의 경우 백1에 (2,3 교환은 그렇다 치고,) 흑은 좌하쪽 공배를 메움이 常例상례이다.
그럼에도 공걸은 하고 많은(?) 공배를 내버려 두고 무엇이 그리 급한지 굳이 4자리를 메꾼다. 고수의 생리에 맞지 않은 수이다. 결국 내 손으로 내 돌이 단수(백 대마 사활상 절대 선수이다.)에 가까워지게 만들어 놓는다. (이건 명백히 6을 위한 예비동작이다. 다시 기보를 보라. 고수의 기보에 흑 4,6은 얼마나 이례적인가!) 그리고 당연한 5가 온 순간 공걸은 그의 방식으로 하루를 다 바친 처절한 승부를 마감한다.
아옌데, 콘스탄티누스 11세가 그랬던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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