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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저작권-저2-바둑4

080719 악곡vs악보, 바둑vs기보 - 3.단계화하는 이유

050216 악곡vs악보, 바둑vs기보」「080719 악곡vs악보, 바둑vs기보 - 2번째 글」에서 악보는 저작물이 아니라고 하였다.



 

喜ㆍ怒ㆍ哀ㆍ樂ㆍ愛ㆍ惡ㆍ欲(七-저작물이란 인간의 사상ㆍ감의 창작적 표현물이다)은 소리를 표현수단으로 하여 악곡으로 표현된다. 고로 악곡이 저작물이다.

악보는 소리(또는 악곡)의 고정수단에 불과할 뿐 악곡을 떠나서 그 자체로 독립하여 저작물이 되지는 못한다. 일종의 호가호위狐假虎威라 할까, 악보라는 여우는 악곡이라는 호랑이(;저작물)의 위세 없이는 위세(;복제권)를 부릴 수 없다.


다시 말하여 악보를 복제하면 복제권의 침해가 되는 까닭은 악곡의 저작권이 살아 있기 때문이요, 만약 악곡의 저작권이 죽은 상태(예:아리랑 악보)라면 해당 악보를 복제하여도 저작권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것이‘악보는 악곡을 떠나서 그 자체로 독립하여 저작물이 되지는 못한다’의 의미이다. 

(오선지와 음표는 그 바탕적인 성질상 일종의 그림 또는 도형이다. 따라서 악보의 저작물성을 다투고 싶다면 도형저작물성을 다투어야 비로소 일에 제대로의 계제가 된다고 하겠다. 물론 인정받기 어렵긴 하지만.)


바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바둑은 저작물성을 다툴 계제가 되지만 바둑의 기보는 저작물성을 다툴 계제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바둑의 경우는 조금 복잡하다. 악곡-악보의 2단계 대응이 바둑에 와서는 바둑-기보1-기보2로 3단계化된다. (누구는 또,‘너무 깊이 들어가서 헷가닥한 거 아니냐고 할 지 모르겠다.)


기보1은 무엇이냐, q4-d16-p15...식의 선형線形기보를 말한다. 음표기보(4편 참조)도 선형, 일반적인 악보도 선형이다.

기보2는 무엇이냐, 종이기보 즉, 판형板形기보(;종이 바둑판 위에 ③,⑥,⑭,⑮ 식으로 동그라미 친 숫자를 써 넣은 것. 여기서 3과 15는 검은색 바탕에 흰색 글씨라 치자.)를 말한다. 신문 등에 실리는 기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기보이다.


선형기보,판형기보의 공통점은 무엇이냐, 바둑 자체가 아니다는 점이다. 악곡이 소리를 표현수단으로 한 저작물이고 악보는 그 고정수단에 불과하듯이 바둑은 좌표를 표현수단으로 한 저작물이고 q4-d16-p15나 ③,⑥,⑭,⑮는 그 고정수단일 뿐이다.


왜 바둑 자체가 못될까? 바둑의 기록으로서 q4-d16-p15 또는 ③,⑥,⑭,⑮가 남았다고 하였을 때,  q4-d16-p15은 모양이 결여되었고 ③,⑥,⑭,⑮는 시간(;수순)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떠해야 할까. 우리가 판 위에 돌을, 시간적 순서대로 하나하나 옮겨서 어떤 모양을 만들어주는 작업을 다시 하여주었을 때 비로소 바둑이 된다. 머리 속으로만 하든 직접 판 위에 돌을 옮겨서 하든 바둑은 재현된다.

q4-d16-p15의 순서대로 모양을 머리 속으로 그려주어야 바둑이 되고(범인凡人은 힘들다. 그래서 왕적신의 고사가 탄생한다.) ③,⑥,⑭,⑮에 쓰인 숫자가 지정하는 순서대로 시간적 질서를 부여하여야 바둑이 된다.(우리는 수업시간에 종이와 연필만으로도 땡땡이친다. 그 순간이 바로 바둑이다.)


*여담으로, 리듬,멜로디,화음과 모양,수순의 각 위상, 상호간의 관계는 생각할수록 그 맛이 있다. 그래서 조금 더 말해본다. 악곡의 근원은 리듬, 바둑의 근원은 수순이다. 악곡에서 창작성은 주로 멜로디에서, 바둑의 창작성은 수순보다는 모양으로 발현된다. 그래서 멜로디엔 영감, 모양에는 감각!(‘리듬에 영감, 수순에 감각’이란 말은 없다. 참고로, 영감이나 감각은 창작성에 관계된다.)

멜로디가 좀 아니어도 악곡이지만 리듬이 좀 아니면 악곡이 아니다. 1초에 한 번씩 일정간격으로 장구를 치면 그게 뭐냐, 악곡이 아니다.

모양이 좀 아니어도 바둑이지만 수순이 아니면 그게 뭐냐, 바둑이 아니다. 우리는 붙이고 젖힌다. 젖히고 붙여보라.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악곡의 본질이 리듬이듯이, 바둑의 본질은 수순이다. 바둑에서 수순이 제거되면 형상(서 연구원의 표현, 바둑(학)에서는 보통 모양이라 한다.)만 남고 그건 바둑이 아니다.


q4-d16-p15나 ③,⑥,⑭,⑮에 위에서 말한 작업(머리 속으로 그려주거나 시간적 질서 부여 ;재현再現) 없이는 우리가 바둑을 느낄 수 없다. 여기서 느낀다는 것은 ‘악보만으로  모짜르트가 악곡을 느낀다’에서의 ‘느낀다’와 유사한 의미이다.

 

선형기보, 판형기보의 차이점은 무엇이냐, 바로 위에서 말한 대로, q4-d16-p15은 결여된 것이 모양이고 ③,⑥,⑭,⑮는 결여된 것이 시간(;수순)이다.

혹자는 말하리라. ③,⑥,⑭,⑮에 쓰인 숫자는 뭐냐, 그게 수순(의 지칭) 아니고 무엇이냐 라고. 맞는 말이긴 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겠다.

판형기보, 종잇장에 적힌 ③,⑥,⑭,⑮.....만 보고 한 판의 바둑의 감상이 되시느냐고? 딱 보고 잡히는 건 모양뿐이 아닌가 말이다. 3,6등의 숫자가 의미를 띠기 위해선 우리가 머리 속에서 그 순서대로 죄표점을 떠올려야 함이 분명하지 않은가. 사정이 그러하다면 판형기보는 수순이 결여되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숫자조차 적히지 않은 판형기보, 예를 들어 다 둔 바둑(판과 그 위의 돌들)도 수순이 결여되었음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악곡-악보, 바둑-선형기보-판형기보. 2단계화, 3단계화. 아아니, 왜 이리 단계화를 하시오?


하지 않으면 개념의 형성에 지장을 받기 때문이다. 악곡-악보 구별이 없는 경우에, 그래서 악보까지 저작물인 줄 오해하게 된다.(주로 저작권에 관하여 잘 모르는 이에게서 이런 사례가 발견되는데, 부지기수이다. 어쩌면 대다수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악곡이야 (다행히) 기존에 워낙 저작물로 인정되고 있는 바라 그다지 상관은 없다.


근데 이 개념 미분리 상태가 바둑까지 오면 상황이 심각해져버린다. 바둑저작권 부정론 중의 하나인 기록론(:기보는 야구 기록지에 불과하다는 논리)이 어디서 올까. 바둑과 기보의 구별이 없다는 데서 온다.

형상론(:바둑을 형상의 일종(만)으로 파악, 바둑이란 형상은 기획자의 의도에 무관하게 만들어지는 우연물일 뿐이라는 논리로서 저작권 위원회 서달* 연구원의 의견), 판형기보(더 정확히는 바둑의 모양)를 바둑 자체로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순이란 요소를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둑의 저작권 문제를 논할 때 처음엔 바둑 자체로 논論을 시작한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논의 도중에 바둑 자체를 놓쳐버리기 일쑤다. 기록론은 기보만 남기기 예사이고 형상론은 모양만 남기고 수순을 잃어버린다.

저작권을 논하는 이는 바둑 자체를 놓치지 않겠다고 끊임없이 자각하면서 논해야 한다. 그러려면 단계화가 필요하다. 


형상론에 대해 좀 더 말해 보자. 서 연구원은 ‘바둑은 창작적 개성의 표현이라 할 수 없는, 사람의 사상,감정이 담겨져 있지 않은 우연한 형상일 뿐’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여기서 ‘형상일 뿐’은 且置차치하자.

사람의 사상,감정이 담겨져 있지 않다니, 대국자의 개성이 담겨져 있지 않다니, 이 무슨 소리인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바둑꾼들이 들으면 펄쩍 뛸 일이 아닌가.




판형기보
에는 모양이 100% 담겨져 있다. 그러나 웬만한 바둑꾼이라 해도 판형기보만 보고서는 바둑을‘느끼지’못한다. 모양은 시각만 자극하기 때문이다. 바둑꾼으로서 제대로 자극을 느끼려면 수순을 느껴야 한다.

수순이 悟性(:오성. 오감 또는 오각은 시,청,후,미,촉각인데 수순에 자극을 받는 것이 이것 중 하나일 순 없다. 고로 수순이 자극하는 것은 다른 무엇인데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여 悟性이라 하였다. 사실 수순의 자극을 받는 것이 보통의 감각 즉, 感이나 覺은 아니리라. 性 정도면 적당하다고 본다.)을 자극하니 우리가‘느끼는’것이다.

물론 리듬 혼자서 청각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듯이 수순도 모양의 도움을 받아 오성을 자극한다.


조훈현의 오성은 극도로 발달되어 있다. 그는 바둑을 두면서도 우리보다 더‘느낄’것이고 선형기보나 판형기보만 보아도 제대로‘느낄’것이다.


나는 아름다움을, 노래를 들으면서는 쉽게 느낄 수 있다. 고수의 바둑을 보면서도 이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노력해도 (재미는 무한정 느끼겠는데) 아름다움은 느낄 듯 느낄 듯만 하는 수준에 머물 뿐이다.

내가 고수가 못되기 때문일까. 조훈현은 아름다움을 느낄까.(그렇다면 悟性이 아니라 悟感이 맞으리라.)

느낄까...


*형상론은 거의 서 연구원 고유의 것이다. 비슷한 주장을 접한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형상론 때문에 기존의 2단계에서 3단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즉, 3단계화 논리는 형상론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