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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펌譯] 중국인이 쓰는, 한국현대바둑 70년 (上)


출처 :소소풍(蕭蕭風) 새물결체육(新浪體育 sina.com) 201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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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棋事란 새물결체육 바둑을 취급하는 일종의 팀인 듯하다. 棋事는 근래 일 년이 채 못 되는 시간 동안 수십 건의 바둑 관련 인물 인터뷰를 게재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평소와 달리 인터뷰 형식이 아닌, 敍事文(서사문) 형식으로 글을 실었다. 또한 棋事특약기자형식으로 소소풍에게 글을 맡겼다.


국경/비인기종목이라는 현실적 여건상, 이런 글은 결국 간접취재(책 취재,인터넷 취재 등)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운 바, 한국의 웬만한 바둑인이라면 어차피 대략 알고 있는 내용의 나열에 불과하다, 이런 폄하의 여지가 없지야 않겠지만, 

래도 자료의 취사선택 및 글의 基調(기조) 설정이나 他者(타자)에 부여하는 색깔 등에 있어서 저자의 視角(시각)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바, '중국인이 보는 한국바둑'의 관점에서 우리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원문 편집을 충실히 재현하기 위해, 그 사진 배치까지 그대로 따르면서 번역하여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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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天(구천) :가장 높은 하늘, 또는 하늘 위 







[棋事九天으로 날아오르다 -한국현대바둑 70년 ()


                                                                        글 :소소풍(蕭蕭風 2015.07.13

 

                                                    조치훈 조훈현

 

  

올해는 한국현대바둑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바둑계는 일련의 기념활동을 내놓았는데, 두 전설적 巨星 조치훈과 조훈현의 기념대국이 그중 하나이다. 이 기념경기는 원래 712일에 치러질 예정이었지만, 사정이 생겨 726일로 연기되었다. 사실 이 판의 최대 의의는 승패가 아닌 한국현대바둑 흐름의 구체적인 회고에 있다.



                                                   개척자 조남철

 

 

한국현대바둑의 발단은 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한국현대바둑의 아버지조남철이 거의 혼자 힘으로 허허벌판 황무지에서 미지의 희망을 일구어냈다.

 

1937, 조남철은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갔고, 바둑계 왕별 기타니(木谷實) 문하로 들어가며 훗날 바둑계 안팎에서 명성이 자자해지는 기타니도장의 초기 구성원이 된다. (그런데) 바둑이 당시에 일본에서는 國技(국기)’였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名士들의 소일거리로 치부되는 상태였다. 조남철의 棋才가 최상급이라 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만약 일본에 머무르면서 힘껏 발전한다면 일류棋士의 명성을 얻기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름의 포부를 지닌 조남철은 귀국을 선택한다. 그리하여 1943, 서울 거리. 바싹 마른 체구의 조남철, 그리고 바둑용구 바둑책이 실린 외바퀴수레가 등장한다. 사람과 수레는 일종의 광고판 격이 된다. 이 장면은 현대 바둑 역사상 기억에 남을 명장면이라 할 만하며, 이 순간 돌아봐도 여전히 무한한 감회를 자아낸다.

 

일본에서 공부할 당시의 조남철은 설령 순조롭게 입단을 했지만 실력이 일류에 이르지는 못한 상태, 스승 기타니에게 두 점을 깔고도 이길 힘이 없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온 조남철의 수준은 한국 棋士 최고 수준이었다. 한국바둑 전체의 도약을 이끌기 위해, 조남철은 바둑 보급 및 후진양성 외 또한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아야 했다.

 

1948, 조남철은 제1회 한국바둑선수권전에서 우승을 하였고, 이후 5連覇를 달성한다. 한국바둑 최초 타이틀전이 이때 서막을 열었다. 1956國手전을 창설했으며, 조남철은 단숨에 9連覇를 하며 자신의 바둑 인생 전성기에 도달한다. 당시 단에 이른 조남철은 일본바둑의 대표인물 사카다(坂田榮男)와 겨루게 되는데, 두 영웅이 다 전성기 시절이었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의 최고 수준의 차이는 확연했고, 을 접히고도 조남철이 사카다의 예리한 면도날 아래 승기를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추격과 추월의 임무는 뒷사람에게 미뤄야 했다. 당시, 한 무리의 소질 있는 한국 소년들이 이미 일본 바둑 유학의 길에 오른 상태였고, 한국바둑의 희망은 이들의 어깨에 지워진다.

 

  

정식으로 걸음을 떼는 한국현대바둑

 

1945, 조남철은 심혈을 기울여 漢城棋院(한성기원)을 창립한다. 초라하게나마, 한국바둑의 正統(정통)’이 이렇게 첫걸음을 뗀다. 한국현대바둑 70년 또한 이를 시작점으로 삼아 그 유구한 이야기 史를 써나가게 된다.

 

1947년 한성기원은 통일동으로 옮겼고 조선기원으로 이름을 바꾼다. 1949년 다시 대한기원으로 개명하였고, 한국 최초의 승단전을 시행한다. 1954년 1, 사단법인 자격을 갖춘 한국기원이 창립되었고, 1970년 3월에 이르러 재단법인으로 전환, 한국바둑은 번영의 시대로 진입한다. 1974년 기원 이사진과 棋士들과의 갈등으로 기원이 분리된다. 이 풍파는 1976년에 가라앉는데, 이렇게 통합된 한국기원이 지금까지 이르게 된다. 도중 1968-1994년 한국바둑관철동시대로 불리던 시절에 다수의 실력자가 떠올랐고 이들이 한국바둑을 세계정상으로 이끌게 된다.

 

조남철 이후 일본 유학을 갔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棋士, 김인 하찬석 윤기현 등이 한국바둑 2세대 棋士의 대표가 된다. 김인은 일본 시절에 촉망을 받아 임해봉(林海峯) 오오타케(大竹英雄)과 함께 金竹林으로 불리며 스승 기타니의 총애를 얻었다. 2세대 棋士의 대두로 조남철이 한국바둑 절대자 지위를 잃게 되고, 김인이 새로운 대표자가 되었다. 일본과 한국의 친선전에서 서울의 신세대 棋士들은 차츰 일본의 일류 강호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감각을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그 당시 중국 棋士들 또한 中日 대항전에서 끊임없이 실력을 쌓아올렸다. 이렇게 중국바둑과 한국바둑이 동시에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나갔던 시절이었다.

 


                                                      한국기원

 

 

兩大 高峯(고봉

  

한국의 일본유학파 棋士의 최고봉은 당연히 조치훈과 조훈현이다. 그들은 일본으로 건너갈 당시의 나이, 그리고 획득한 바 성취의 높이에서 이전 세대를 압도한다. 이 둘의 출현으로 한국은 단번에 현대바둑의 중심지가 되었다. 조치훈은 일본 최연소입단 기록을 세웠으며, 기타니의 최고 애제자로서 스물이 되기도 전에 프로 타이틀보유자로 군림하였고, 1980년에는 일본 최고 권위의 名人을 획득하며 名人이 되기 전에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맹세를 실현했다. 한국정부는 조치훈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고 한국에서 바둑붐이 일어났다. 일본에 남으면서 발전해나간 조치훈은 일본현대바둑 역사상 최성공 棋士영예의 유력한 후보자이다.

  

조훈현은 일본 경력 9년을 끝으로 병역 때문에 귀국한다. 당시엔 그의 인생에 커다란 좌절에 가까웠다. 하지만 한국 본토에서 불쑥 튀어나온 서봉수의 한국 名人탈취는 조훈현의 투지를 자극했다. 십여 년 조서시대의 서막이 이때 열린다.

 

...계속...

 



 

:棋事특약기자 소소풍 蕭蕭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