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바둑

[펌譯] 긴~~~~~~~~~~~~~~~~~~~~~~~~~~~~~~~~~~~~~~글


[나와 슈퍼대항전 公募]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먼지 덮인 옛일을 밝히다

 

 


 

출처 :양평(梁平) 新浪체육 -나와 슈퍼대항전 공모응모작 2015.07.22  

 




한국에서 한국현대바둑70년 회고 기념활동이 화제라면, 중국(특히 sina.com)에선 중일슈퍼대항전30주년 기념 회고가 한창입니다. 그리하여, 그 첫째가는 주인공인 섭위평이 저술한 책 섭위평 全書의 내용 중 다수가 소개되는 한편, 바둑팬 대중을 향하여 나와 슈퍼대항전 공모활동이 벌어졌습니다. 소개하는 글은 그 응모작 중 하나입니다. (다만 글의 필자는 말로는 슈퍼대항전 얘기를 한다면서, 실제 글의 무게중심은 응씨배 및 섭위평 개인事 얘기로 확연히 쏠립니다. 즉, 글의 주인공은 오로지 섭위평입니다.)


'응모작'이지만, 저술자는 그냥 사람이 아닌, 記者(기자)로 잔뼈가 굵은 사람, 즉 언론인 출신입니다(현직은 아닌 모양). 거기다 작가이기도 하다네요. 이렇든 저렇든 그게 크게 중요하진 않지만, 미리 알고 보심 좋겠죠. 

이렇게나 긴 글을?... 단시일에 쓸 수도 있겠지만, 짐작엔 30년 무렵 전에 메모해두었던 내용을 '창고대방출'하는 거 아닌가 싶네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먼지 덮인 옛일을'이거든요.

 

글의 핵심 낱말 중 하나는, 變態(변태)입니다. 글에서 話者(화자)누구나 인생에서 變態(변태)를 겪는다. 어떤 경우 순식간에 발생하고, 어떤 경우는 평생에 걸쳐 일어나기도 한다. 섭위평의 변태는 후자에 속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럼 여기서 변태’(중국어로는 蛻變태변;허물벗을태,변할변)를 긍정적 의미로 썼을까요, 부정적 의미로 썼을까요? 나아가, ‘섭위평의 변태에 어떠한 해석을 붙일까요


그렇습니다. 이 글은 섭위평의 變態를 두고 어느 중국인이 길게 늘어놓는 解明(해명)’입니다

화자는 참으로 길~~~~~~~~~~~~~~~~~~~~~~~~~~~~~~~~~~~게 써갑니다.

解明으로 읽힐지 다른 것으로 읽힐지는, 독자의 몫입니다.







필자 양평이 섭위평(聶衛平) 집 거실에서 취재 후 기념사진 -공상명(孔祥明) 촬영       sina.com

 

 


 


먼지 덮인 옛일을 밝히다

 

 

:梁平 -前 南京일보 체육기자

 

  


 

나와 中日슈퍼대항전공모 활동, 내 기억 속의 한때 일을 돌이켜보는 계기가 되었다. 30년 전, 나는 남경일보(南京일보) 체육기자로 中日바둑승발전의 일단 과정을 직접 겪어보는 행운을 가졌다. 30년이 지난 오늘, 수십 년 동안 이미 파편화된 기억을 한데 모아서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내 본다면, 이 또한 오랜만의 행복이리라.

 

누구나 인생에서 變態(변태)를 겪는다. 어떤 경우 순식간에 발생하고, 어떤 경우는 평생에 걸쳐 일어나기도 한다. 섭위평의 變態는 후자에 속한다.

 

젊은 날의 섭위평은, ‘누군가 自信하고 노력하기만 한다면, 결국에는 자기만의 성취를 이루게 된다라는 격언의 훌륭한 체현자였다. 그는 흔들리지도 굽히지도 않았으며, 자기 신념을 배반하지도 않았으며, 영예든 치욕이든 웃으며 마주하였다. 이러한 경지의 결과, 섭위평은 바둑계의 일 모범이 되었으며, 곳곳에서 이야기들을 양산했다.

 

일생을 바둑계에서 보내면서, 섭위평은 원래 자신에게 속하던 많은 것을 버렸는데, 그중엔 물질적인 것도 있고 정신적인 것도 있다. 그는 棋士로서 묵직한 우승컵을 여럿 땄으되, 백년가약 혼인 맹세를 지키지 못했다. 인생의 유감은 운명적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담담히 지내온 세월 끝에 결국에 정신의 행복을 얻었다. 이처럼, ‘때로는 상실의 순간이 수확의 시작이다라는 말이 실로 그럴듯하다.

 

어쩌면, 마음의 평안이, 바로 행복일지도...

 

그럼, 中日슈퍼대항전 당시에 발생하였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얘기들은? 필자는 당시 기사로 나갔던 원고들과 기사로 쓰지 못했던 기록을 종합하여 이 글을 쓴다. 먼지 덮인 지난 일로 돌아가 보자.

 

삶은 늘 변화막측이고 세상사 또한 예측 불능이다. 현실에 살다보면 각종 돌발 상황을 끊임없이 마주하게 된다. 30년이 흘러, 中日슈퍼대항전 관련 지난 일을 공개하는 이 순간, 기억은 마치 시냇물처럼 졸졸 흐르고, 매 굽이마다 튀어 오르는 물보라가 두 눈에 선연히 반짝거린다.

198995, ‘세계의 꽃밭으로 이름 높은 도시 싱가포르로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다. 중국대륙의 여럿 도시들이 싱가포르산 TV연속극 색섞판(調色板 Paint A Rainbow)을 다투어 방영하던 바로 그때, 棋聖(기성) 섭위평이 그곳에서 아차 실수로, 응씨배라는 세계바둑왕 대회의 우승을 놓쳤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거국적인 관심은 순식간에 비탄으로 변했고, 사람들은 바로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싱가포르의 별칭 사자의 도시(lion city)', 어쩐지 棋聖... 많은 이가 갑자기 떠올린 기이한 상상.

 

그러나, 중국의 진정한 바둑팬들은 이 날짜를 묵묵히 기억한다 :198995. 마치 중국 축구팬들이 비탄의‘5.19’를 묵묵히 기억하는 것처럼. (역주 :1985.5.19. 월드컵 예선 과정 중, 북경에서 홍콩과의 대결에서 중국이 패배, 탈락하며 관중난동사건 발생. 중국축구의 흑역사 중 하나.)

 

  


중국의 ()’, 천 길 벼랑 끝으로

 

섭위평은 평소 잘 웃는다.

 

많은 관중 앞이든, 手談으로 승부 중이든, 그는 늘 웃는 모습이다. 그러나 응씨배라는 세계바둑왕 쟁탈전에서 아깝게 실패하던 그 순간, 섭위평은 헛웃음만 나올 뿐 오래도록 침묵에 빠졌다. 어쩌면, 아차 하는 순간 승기가 연기처럼 사라지던 그 격투 순간을 곱씹는 듯, 어쩌면 자책에 빠진 듯.

 

돌연 그는 깨달았다. 후반에 느슨했음을. 만약 승기를 타고 추격했더라면, 반드시 바람이 구름을 쓸어버리듯, 반드시 세계바둑왕이란 우승컵을 딸 수 있었을 텐데, 반드시 조국을 위해 40만 달러 상금을 먹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가 물렀고, 棋聖은 영원히 잊지 못할 유감을 만들고야 말았다.

 

심판장이 조훈현의 승리를 선포하던 순간, 그의 고막을 울리는 소리는 조훈현의 웃음도 아니고 한국 기자의 박수 소리도 아니고 응창기(應昌期)선생의 탄식 또한 아니었다. 그건 어떤 소리였을까.

 

1988, 섭위평이 모험의 시대로 성큼 걸음을 내딛는다. 성공하려면 스스로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어야 한다. 死地에 빠졌을 때 비로소 삶이 있다. 세계의 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이러한 경험을 가졌다. 섭위평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이 해는 용의 해, 섭위평이 바로 용띠였다. 그리하여 그는 다툼의 여지 없이 중국의 용으로 불리게 된다.

 

314, ‘중국의 용이 바람을 일으키고 구름을 불러, 동경(東京)에서 번개 같은 속도로 가토(加藤正夫)를 메다꽂으며, 3中日슈퍼대항전 최종 승리를 거둔다.

 

이렇게 섭위평이 거센 흐름을 되돌려 천하에 대첩을 고했고, 중국은 거국적으로 경축했다. 12일이 지나 북경(北京) 인민대회장, 그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중국바둑棋聖 증서를 받는다.

 

방의(方毅)가 말하기를 :“섭위평은 중국바둑계의 孔子(공자)’이다. 섭위평이야말로 이러한 영예에 손색이 없다.” 이 모든 것이 섭위평을 향한 격려였다. 그러나 딱 이때 이후 섭위평은 내리막에 들어선다. (역주 :方毅, 국무원 부총리 역임)

 

일본인들이 승발전을 연속 3회 패배했지만 종합적 실력에서 중국에 미치지 못함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러나 승부 중의 미묘한 요인들을 종잡기란 실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패배로 입맛이 떨어졌는지 일본은 방법을 바꾸어, 세계 제일 규모의 후지쯔배(富士通)’라는 세계대회를 들고 나왔다. 같은 순간, 대만의 실업가 응창기선생이 후지쯔배 세 배 상금의 응씨배세계대회를 내놓는다. 갑자기, 大軍이 몰려들고 짙은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호시탐탐, 섭위평도 전투 대열에 가담한다. 그러나 후지쯔배에서 3위에 그치고 만다. 한 달 후, 4中日슈퍼대항전도 잃는다.

 

뭐든 갖다 붙이기 좋아하는 중국인들, 섭위평의 패전 추세를 보고서 자연스레 교만한 군대 필패라는 옛 교훈을 떠올렸다. 나아가 이런 상상을 한다 :

만약 棋聖에 봉하지 않았다면, 섭위평이 이렇지 않았을지도 몰라.” 

종신 棋聖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온갖 소리가 여기저기,..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한 개인이 혹 건망증이 있을 순 있지만 한 민족이 건망증이 있을 수는 없다. 결국 응씨배에서 섭위평이 4강에 짓쳐들어가고, 준결승에서 후지사와(藤澤秀行)를 이기고 한국의 조훈현과의 생사결전이 결정되는 상황, 이들 일순간 비관에 빠졌던 사람들에게도 확실히 낭보였다. 동시에 섭위평 본인의 자신감 또한 대폭 상승하였다.

 

어떤 경우라도 사람은 자신감을 잃어선 안 된다. 다만, 자신감이 고집의 지경에 이른다면 곧 비극의 씨앗을 배게 된다.

 

많고 많은 중국인들 눈에, 조훈현은 전혀 못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들은 단지 섭위평 마효춘(馬曉春) 고바야시(小林光一) 후지사와...만 알았다. 고로, 사자의 도시 싱가포르에서 벌어지는 선생의 전투는, 탄탄대로 행군과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노심초사하는 사람도 또한 있게 마련, 다만 극히 아주 극히 소수였다.

 

그러면, 이 당시 우리의 棋聖은 어떠했을까?

 

그해 8월 하순, 장춘(長春).

 

섭위평, 학극강(郝克强)이 왕림한다. 지역 바둑계 인사들이 더할 나위 없이 기뻐했다. 응씨배 결전이 눈앞인 시점, 棋聖이 바쁜 와중에 짬을 내어 바둑을 위해 이렇게 멀리까지 달려오다니, 실로 훌륭하다.

 

중국의 바둑팬들은 축구팬들과 마찬가지로 격정적이다. '한마디 해주시오', 그들이 섭위평에게 요청했다. 섭위평이 상냥하게, 봄바람 같은 미소를 띠며 바둑팬에게 속내를 드러냈다 :만약 응씨배 우승을 한다면, 이후 젊은 기사들을 일선에 내세우고 자신은 총감독을 맡아 전력을 다하겠다고. 공을 세운 후 은퇴한다, 갑옷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뭐 그런 느낌이었다.

 

순간 학극강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바둑계 원로이자 中日슈퍼대항전 기획자 중의 일인은 섭위평의 이 말의 속뜻을 잘 알았다. 학극강은, 이제 37살의 섭위평은 몸이 허락하는 한 응당 바둑판 위에서 힘껏 분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보지 않았는가, 일본의 허다한 바둑인들이 사오십 살이 되어서야 실력이 절정에 들어서지 않던가? 걸출한 후지사와가 바로 그런 대표적 인물이 아닌가.

 

섭위평아. 승패를 초월하라. 학극강은 면밀하게 생각하고 사려 깊고 신중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그는 섭위평의 그런, 소용돌이 속의 용퇴에 찬성하지 않았으며, 소용돌이 속의 용감한 전진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심지어 :은퇴라는 발상은 섭위평의 본성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허나, 그 당시 그 순간의 섭위평은 확신에 차 있었으며 일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바둑,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싶은 순간이면, 때때로 감각과 경험이 따로 따로 놀게 돼버리곤 한다.

  

비슷한 꼴이 언론계에서도 벌어졌다. 거의 일방적인 예상평이 쏟아졌다. 더욱이 서자호숫가(西子湖畔)에서의 2:1이란 전적은, 평론가들마다 제각기 이야기꽃을 피우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섭위평의 싱가포르 결전을 낙관했고, 응씨배 우승컵이 거의 손안에 들어온 듯 누워서 떡먹기인 듯 보였다. 까놓고 말해서, 이런 상황과 섭위평의 당시 심리는 은연중에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섭위평은 결국, 절기를 펼쳐 세상을 놀라게 할 임무를 진 채, (자의 반 타의 반천 길 벼랑 끝에 놓이게 되었다.

 

이 당시, 또 다른 목소리 또 다른 관점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중국바둑협회 주석인 진조덕(陳祖德)의 서울 三國鼎立論(삼국정립론)이 그것이다. 그의 말인즉, 한국이라는 복병의 불쑥 등장으로 세계바둑계는 이미 중국과 일본이 천하를 반분하는 국면이 아니게 되었다, 이제는 중국 일본 한국의 三國鼎立국면이다.

아쉽게도, 이 바둑계 고위인사의 벽력같은 호통조차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고, 섭위평은 여유만만하게 사자의 도시로 날아갔다.

 

98일 저녁, 큰 꿈을 이루지 못한 섭위평이 소파에 기대어 솔직하고도 성심껏 나의 질문에 응했다. 그는 거듭 말했다 :“조훈현은 필사적이었다. 나로서도 시작할 때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그런데 우세를 잡게 되자 곧바로 투지가 풀어져져버릴 줄이야..... 당시 난 이렇게 두어도 되고 저렇게 두어도 된다고 생각했고, 그게 안전운행을 불러왔다. 사실 당연히 그 순간에 가장 사나운 수단을 동원했어야 했고, 단숨에 해치웠어야 했다.”

 

棋聖의 심중에는 못 다한 느낌, 못 다한 뒷맛이 있었다. 그중 대부분이 쓴맛이었다.




아득한 大地에 묻노니, 누가 흥망성쇠를 주관하는가 


                                (역주 :모택동(毛澤東) 沁園春·長沙중 일부)

조훈현이 이겼다.

 

섭위평이 졌다.

 

누가 세계의 바둑왕인가, 말이 필요 없다. 다만, 만약 두 棋士의 일본 초일류 棋士에 대한 승률을 살펴본다면, 섭위평이 확연히 조훈현보다 높다. 바둑의 내용에서, 마찬가지로 섭위평이 조훈현보다 좀 더 풍부하다. 바둑 각 방면의 역량에서, 이 둘은 그야말로 난형난제이다. 이런 백중한 실력의 대결에서는, 많은 경우 棋士의 전투 의지 및 임전태세, 그리고 棋士 주변의 정서 등 여러 요인에 의해 승부가 결정된다.

 

싱가포르 결전의 두 판 바둑에서 섭위평은 전반에 매우 잘 두었다. 문제는 후반에 나왔다. 은 이런 식으로, 조훈현에게 기회를 허용했다.

 

화이강(華以剛)과 라건문(羅建文)은 둘 다 싱가포르 결전의 목격자이다. 나는 그들에게 결전 시각의 정황을 최대한 돌이켜보도록 요청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래도록 침묵을 지켰는데, 필시 그런 회고가 매우 고통스러웠으리라. 섭위평의 이전의 모든 공로가 도로 아미타불이 돼버렸는데, 많은 부분 당연히 그의 주관적 요인 때문이겠지만, 객관적 요인이 꼭 없겠는가? 그들 각자 마음 한 구석 나름의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역주 :완곡하게나마, 패전에 대한 일말의 책임을 묻는 듯)

 

조훈현이 바둑판 위의 묘수로 기사회생하자, 한국 기자들이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대회장 안팎 여기저기에서 서로 호응해가며, 아주 시끌벅적해졌다. 상대적으로, 중국 쪽 섭위평은 찬밥이었다.

 

이전에, 섭위평이 국제대회에 참가할 경우 항상 국내기자들이 수행 취재했다. 그런데 이번 세계바둑왕결전에서, 대륙에서는 한 사람의 기자도 오지 않았다. 이는 서울에서의 준결승전, 그리고 항주(杭州) 결전에서 기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던 모습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이런 커다란 차이는 당연히 사람이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게 만든다.

 

결전 시작 전에, 일본 한국 등의 국가와 대만 地區의 여러 기자들을 마주하여, 싱가포르 바둑계 인사가 학극강에게 물었다 :“어째서 대륙은 기자를 보내지 않았는가?” 학극강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한마디로 설명하기 곤란하다는 듯이.

 

뭣 때문에? 모른다!

 

중국은 ()‘()’기자가 없다? 그리하여 안 그래도 극도로 흥분한 상태인 한국기자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그들의 수행 기자들은 하나 둘이 아니었고, 떼를 짓고 앞뒤로 호위를 이루었다. 그들의 말로 표현하자면 조훈현의 기를 살리기 위해 왔다’. 과연, 그들은 대회장 안팎에서 중계에 바쁘다가도, 일단 조훈현의 형세가 유리해지면 한층 더 법석을 떨었다. 이런 극히 중요한 순간에, 우리의 棋聖은 흥분도에서 확실히 부족한 상태에 있었다.

 

섭위평에게 승리를 거두고, 한껏 위풍당당하게 걸어 나오던 조훈현, 한국 기자들이 한편 좋아서 날뛰며 한편 오열하며 서울로 소식을 보내던 광경을 보고서는 자신도 모르게 눈자위가 붉어졌다.

 

역사적 이유로, 일본인들은 한국 棋士들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설령 근래에 적잖은 초일류 棋士들이 조훈현과 판 위에서 대결을 벌인 역사가 있긴 하지만, 역시 바둑 강대국이란 거만함을 내려놓지는 않았다. , 중국인들은 한국 棋士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조훈현은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만약 일본에서였다면 그는 분명코 초일류 棋士라 말할 수 있다.” 섭위평이 나에게 말했다.

 

적잖은 한국 棋士들이 일본 棋士들의 여유 만만한 멸시적 태도하에 열등감이 생겼지만, 조훈현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줄곧 바둑을 인생의 일부분으로, 생명과 관련한 분수령으로 여겼다. 바둑에 대한 그의 몰입은 그야말로 보통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중요한 국제 대회에서 한 판 싸울 때마다 나의 체중은 2,3킬로 빠졌다. 만약 지금까지 바둑 대결로 빠진 살만 해도 아마도 수백 킬로는 될 것이다.” 조훈현의 이 말, 감탄스럽다.

사자의 도시 결전, 조훈현은 어디서 왔냐고 나에게 묻지 마오氣像(기상)을 풍겼다. 비록 바둑 전반전에는 여의치 못했지만 후반전에 들어가서 극도로 호흡을 죽이고 정신을 집중, 바둑에 취해 넋이 나갔다 할 정도였다.

(역주 :어디서 왔냐고 나에게 묻지 마오. 내 고향은 먼 곳이라오. -노래 가사 일부)

(역주 :우리의 초중종 삼분법과 달리, 중국 바둑인들은 바둑을 전반/후반 양분하는 경우가 많다)

 

폐막식에서 조훈현이 말했다 :“원래 내가 질 바둑인데 선생이 컨디션이 안 좋아서 이겼다.” 그의 말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사실 당시의 세계바둑계는 막 구름이 일고 뭇 영웅들이 용트림하기 시작하던 시대였으니, 그로선 한바탕 고상한 소리를 늘어놓을 수도 있었던 바, 그렇게 공손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화이강이 나에게 말하기를 :“조훈현이 이겼는데, 한국에서의 흥분은 섭위평이 이겼을 때 중국에서의 그것보다 클 것이오. 만약 조훈현이 졌다, 그가 한국에서 받는 부담감은 섭위평이 졌을 때 중국에서 받는 부담감보다 작을 것이오. 믿어지오?”

 

그러한 음미할 만한 밝은 통찰을 내가 어찌 믿지 않을까?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믿어야 한다. 어쩌면 어떤 艱苦(간고)한 과정이 있을 수 있음을. 예를 들어 경기 시작 전에 많은 사람들이, 조훈현 겁낼 거 없다 그는 이미 막판에 몰렸다, 라고 생각했다.(역주 :5번기의 3판이 두어져, 1-2) 그러나 라건문의 관점은 완전 달랐다. 그가 보기에 진짜로 막판에 몰린 사람은 섭위평이었다. 아쉽게도, 믿지 않는 사람이 반드시 있기 마련. 현실을 보자, 섭위평은, 일단 4국을 지면서 막판이라는 곤경에 완전 철저히 빠져버린다. 일본의 삼번기 오번기에서, 앞서던 한쪽이 일단 추격을 허용하게 될 경우 보통 결과가 안 좋은 경우가 많다. 그런 사례는 셀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해 연초의 신체육배에서 바로 섭위평이 먼저 두 판을 잃은 상황에서 연속 세 판을 따내어 패세를 되돌린 바가 있지 않은가.

 

5국 대결, 나건문은 관전실에서 대형바둑판 해설을 맡았다. 이때, 전쟁 경험 풍부한 이 명장은 바둑판을 보고서 멍~해졌다. ‘섭위평, 어떻게 된 거야?’ 두는 수가 그야말로 아마추어 화가의 습작 같지 않은가. 허허실실도 없고 오묘한 입신의 경지도 없고 책략도 전술도 없지 않은가. 실패를, 결국 피하기 어려웠다.

 

만약 만약이라는 말이 허락된다면, 그래서 만약 섭위평이 브리지를 조금 덜 쳤더라면, 만약 칠번기였더라면, 만약 모든 판이 항주 영파(寧波)에서 마무리되었다면..... 상황은 이렇지 않았을 텐데.

 

사실, 이는 일종의 일방적인 바램에 불과하다. 우리가 섭위평의 컨디션을 훑어본다면 곧바로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용의 해 연말, 광동(廣東).

 

위급 시기가 닥치자 명을 받은 섭위평, 탁자를 치며 분연히 일어서자마자 요다(依田)생포하고 다시 아와지(談路)꽁꽁 묶은, 그러나 깃발을 더 이상 드날리지 못하고 하네(羽根泰正)라는 생각지도 않았던 암초에 걸려 좌초했다. 4회 슈퍼대항전이 거기서 멈추었다. 실패, 섭위평의 용의 해가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바둑팬을 만난 섭위평이 미안해 어쩔 줄 모르며 말했다 :“헛고생했어요! 헛고생했어요!”

 

중국 바둑팬은 도리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안면을 바꾸지 않았으며 오히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쳤다. 중국의 여론 또한 마찬가지로 선을 넘지 않았다. ‘명예로운 패배’,‘千慮一失(천려일실)’ 등등의 글귀와 평론이 잇달아 각종 신문지상에 실리며 섭위평에 대한 이해를 표시했다.

  

사회 각계인사의 이해는 이해, 대회가 용두사미’가 돼버린 현실을 회피할 수는 없다. 왜 바둑을 졌나? 사람들은 자초지종을 알고 싶었다.

 

어째서 졌나 :

 

섭위평의 표현을 쓰면 :유치한 실수를 했다.

 

학극강의 표현을 쓰면 :혼초가 나왔다.

 

바둑계의 표현 :떡수를 두었다.

 

용의 해에 섭위평이 저지른 이런 떡수,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고... 전혀 드물지가 않았다. 응씨배 8강전 조치훈과의 바둑에서도 나왔고 후지쯔배 고바야시(小林光一)와의 판에서도 나왔다.

 

그해 2월로 돌아가서, 섭위평은 신체육배를 들어 올린 후, 곧바로 제2회 후지쯔배 세계프로바둑대회 대열에 참가하는데, 이 대회는 그의 워털루 전쟁(역주 :나폴레옹 패망 확정)이라 말할 수 있다. 뒤이어 진행된 중국 名人戰에서 선생은 3강 대열에서 밀려난다. 건력보(健力寶)배 초청전에서는 2회전에서 탈락한다. TV아시아속기전에서서도 마찬가지로 수확이 없었다. 3전 전패, 섭위평의 정력이 얼마나 소모되었을지 충분히 알 만하다.

 

일본 棋士 사라이시(白石裕)가 중국 棋士에게 탐색 조로 물었다 :“선생은 눈코 뜰 새 없을 때에도 끄떡없이 버텨내는 대단한 사람인데, 어째 요즘은 전황이 별로이니 혹시 정신이나 체력상 너무 피로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지?”

 

뼈있는 말이었다.

 

총명한 중국인이 이 문제에 직접적인 답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를 아무도 끄집어내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이건 어쩌면 딱 이럴지도 모른다. , 이 문제가 더 오리무중일수록 사람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바둑 패배. 이에는 판단상의 실수 이외에도, 棋聖이 잘못된 전철을 밟게 만든 다른 간접적인 요인이 있지 않을까?

 

모두가 알다시피 섭위평은 브리지와 상당한 인연이 있다. 국제 국내 중요 브리지 대회면 항상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또한 자신의 브리지 수준이 브리지 國手급과 맞먹는다고 자신한다. 그게 지나친 말이 아닐 수도 있지만, 단지 브리지는 절대 그의 전공 종목이 아니지 않은가. 과연 오청원선생이 농담으로 말하기를 :“선생,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순 없소이다!” 말뜻인즉, 설령 신선이라 할지라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긴 어렵다는 말이다.

  

섭위평의 싱가포르 결전 전후로 두 마당의 브리지 대회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령 그 자신은 브리지는 제일가는 휴식이라 생각한다지만, 결국 그것을 위해 체력과 두뇌를 소모해야 하는 바, 역시나 체육대본부의 누군가가 물음을 던졌다 :그는 브리지 하러 가는 건가, 바둑 두러 가는 건가?

 

섭위평은 자기의 브리지 효과를 여전히 자신한다. 저런 질문에 신경 쓰지 않는다.

 

응씨배가 끝난 후의 브리지 대회는, 대만의 유명한 바둑심군산(沈君山)이 섭위평이 응씨배에서 승전을 거두길 기원하며 신경 써 기획한 것이다. 결국 사자의 도시에서의 패전으로 선생과 사부, 상황이 애매하게 돼버렸지만 다행히도 一口一言, 브리지 대회는 예정대로 치러졌다. 다만 진조덕 학극강 공상명 등은 人馬를 수습하여 먼저 북경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우울한 결말은 마치 아침 일찍 일어난 사람이 태양의 욱일승천을 못 보고 어두침침한 안개 속에 갇혀버린 상황과 흡사하다.

  

섭위평이 졌다.

 

조훈현이 이겼다.

 

어쩔 소냐. 꽃은 떨어져버렸다.

 

어쩌면 우린 옛사람들이 말하던 바, ‘바둑의 , 엄밀할 손 그 귀함이여를 부단히 宣揚(선양)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린 섭위평이 신이 아님을 일찌감치 강조했어야 할지도 모른다. 학극강이 나에게 하던 그 말처럼 :만약 섭위평이 이라면, 만약 절대로 안 진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소. 무슨 경쟁이 있겠소.

 

어쩌면 우린 섭위평의 실패를 유물변증법적 관점에서 사고하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단지 부정적 일면만 보지는 않게 될 텐데.

 

 

 

첨예한 갈등

  

섭위평에 대해 쓰면서 공상명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몇십 년 전, 일본인들은 타도 오청원이라는 깃발을 들어올렸다. 왜냐하면 오청원이 가는 족족 죄다 쓸어버리는 무쇠팔 무쇠다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中日슈퍼대항전에서, 일본인들이 마찬가지로 타도 섭위평이라는 구호를 드높이 외친다. 왜냐하면 섭위평이 이 승발전에서 11연승을 거두며 세계를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들을 공상명은 빤히 알았다. 그녀 눈에 이게 이상하지도 겁나는 일도 아니었다. 바둑의 거장이 뒷사람에게 타도된다 함은, 즉 흑백세계에서 지금 신구세대의 교체가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녀가 진정 걱정하는 것은 능히 피할 수 있는 희생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달갑게 침묵할 수 없었고, 바둑계 고위인사를 향해 호소했다, “섭위평이 가능한 한 빨리 물러나게 해달라.”

  

바둑계 고위인사도 이 목소리를 들었다. 듣고 동시에 19851121, 공상명이 북경 인민대회장에서 싱글벙글하며 賢妻內助賞(현처내조상)’을 받던 광경을 떠올렸다. 그들은 얼핏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공상명,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공상명과 바둑계 고위인사 간에 갈등이 생겼다.

 

응씨배 사자의 도시 결전, 공상명은 눈썹을 찌푸렸다. 대회장이 싱가포르의 70층 마천루에서 진행되었지만 그녀는 그 유혹적인 풍광을 즐기고픈 흥취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섭위평과 나란히 전투를 벌였다. 그녀와 그는 휴식을 위한 외출 한 번 없었고, 딱 한 차례 섭위평의 약을 사기 위해 공상명이 급히 거리로 나갔다 들어왔다.

  

섭위평이 패하고, 그녀는 괴롭고, 억울했다. 절반은 스스로 때문에, 절반은 섭위평 때문에.

 

1987년 초부터, 공상명과 섭위평은 바둑계 여타 고위인사들과 갈등이 발생했고, 슈퍼대항전 시작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심지어는 응씨배 이런 중대한 대회의 정책 결정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4中日슈퍼대항전 출전 명단 협의할 때, 공상명은 진지하게 나에게 터놓았다 :“섭위평은 물러나야 해요!” 그러나, 호응하는 자는 극히 드물었고 반대하는 자가 수두룩했다. 그리하여 누군가 단언하기를, 4회 슈퍼대항전의 패배는, 때가 되면 조용히 올 것이다.

 

공상명의 관점은 :슈퍼대항전은 매년 치러지지 않느냐, 그러니 4회 대회에선 섭위평이 한 발자국 물러날 수도 있다. 이는 절대 패배가 두려워서가 아니다, 바둑을 두다보면 결국 질 수밖에 없다. 고금에 걸쳐 조물주가 필승장군을 만든 적이 없다, 소위 필승장군이란 한갓 사람들의 기대요 바램일 뿐이다.

  

공상명의 말, 그녀는 섭위평의 아내이자 한 사람의 棋士이기도 하다. 생활과 棋士 인생의 어려움을 잘 안다. 사람의 인생에서, 나라의 영광을 위해 분투함은 하나의 영광이다, 설령 목숨을 바친다 해도 가치 있는 일이다. 당연히, 섭위평은 그런 상황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그의 나이 37, 바둑 두며 산소를 많이 마신다. 남은 반평생에 어떤 결과가 있게 될지, 당신들은 생각해보았는가?

 

공상명의 생각, 만약 대담하게 젊은 棋士를 주장으로 기용하여, 천지를 질주케 하고 최후 아무도 없는 순간에 오로지 목숨을 걸고 앞으로만 돌진해야 하는, 그런 경험을 쌓게 한다면, 그들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그녀는 여러 차례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연히, 당시엔 능히 중임을 짊어질 선수를 찾아내기란 상당히 곤란했다. 최소한 심리적으로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으므로. , 영원히 그에게 이런 부담을 지운다면 젊은 棋士는 언제 성숙할 것인가? 더구나 미성숙으로부터 성숙까지엔 반드시 과정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유감스러운 건, 현실에서 사람들은 늘 마음을 놓지 못하며 이해하지도 못한다는 점.

 

섭위평이 물러난 이후엔, 차분히 젊은 棋士들 양성 업무에 매진할 수 있다. 우리는 시선을 더 멀리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상명이 진지하게 말했다.

 

바둑계 고위인사는 자기만의 사고방식과 이론을 가지고 있다. 그들 생각에 :뛰어난 棋士라면 도망가선 안 된다. 몇 판 이기고 영광을 유지하려 들어선 안 된다. 좋지 않다. 후지사와가 기성을 5연패하는 영광을 누린 후,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바둑판 위에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창칼을 휘두르지 않는가. 운동선수의 생애는 잠시잠깐이 아니다, 진정한 경기선수는 때로는 실패자이다. 실패로 끝낸다고 해서 원래의 광채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역주 :반복해서 나오는 표현, '고위인사'란 결국 바둑계 수뇌부일 텐데, 직접 들먹이진 않지만 진조덕 학극강일 가능성이 많다. 숨은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그리 높지는 않을 듯.) 

 

물론 어느 나라 어느 종목에서나, 큰 솥을 들다 무릎이 부서지는 문제라면 당연 능력의 문제이겠지만, 지금 잘나갈 때 얼른 물러나야겠다, 이런 건 결국 의지의 문제이다. 진정한 경기선수란, 심장이 뛰는 한 분투, 또 분투하겠다는 기개가 있어야 한다. 만약 몸이 건강하고 중요 국제대회에서 뛸 수 있는 상황이라면 한창 때의 용퇴는 매우 아까운 일이다.

 

하나하나 듣자니, 이 또한 맞는 말이다.

 

결과는 어찌 됐나? 4회 슈퍼대항전을 지고 만다. 공상명의 말이 불행히도 현실로 적중하고 말았다. 잠시, 바둑팬이 당시 어떻게 말했는지 살펴보자.

 

중국인은 매우 이기고 싶었다. 때문에 바둑계 지도층은 또 한 번 섭위평을 사령관으로 밀고 갔다. 다수 대중의 심리에 순응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터, 그러나 결국 논란거리를 남기고 말았다.

 

당신도 보았듯이, 관련 인사들은 한편으로는 성공이 있으면 실패가 있기 마련’, ‘승리가 달콤한 만큼, 패배 또한 감당해야 한다내지 승패에 너무 목매지 말자라고 강조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 섭위평이 병권을 장악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질까 봐 무섭다!

 

근원을 살펴보면 이 무섭다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일본인들이 우리를 쪼잔하다말할까 봐 걱정된다는 말이고, 또 하나는 바둑 대결을 져서 체면이 안 설까 봐 무섭다는 말이다. 이건 사실, 그야말로 杞憂(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설마 패배를 두려워한다고 패배하지 않는단 말인가. 딱 반대로, 때로는 패배를 무서워할수록 더 지기 쉽다.

 

만약에 공상명의 의사대로 組閣(조각)’을 할 수 있었다면 상황은 아마 많이 달랐으리라. 명백히 풍부한 꾀에 선견지명이라 하겠는데, 어찌하여 사람이 교활하고 음흉하다며 꺼려야 했을까!

 

중국에 이런 속담이 있다 :과거 일은 과거 일일뿐이다! 정말 그럴 수 있다면 그게 좋을지도 모르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가 없다.

 

별들이 돌고 세월은 흘러. 5中日슈퍼대항전 봉화가 타올랐다. 섭위평이 출전하느냐 마느냐, 전국의 관심이 쏠렸다. 북경의 주간기패(棋牌週刊)’ 남경의 週末(주말)’ 상해(上海)의 신민석간(新民晩報) 광주(廣州)의 양성석간(羊城晩報)이 각각 토론을 벌였다.

 

바둑계지도층 또한 이 때를 맞추어 북경에서 토론회를 거행, 수도의 신문사 체육기자를 불러 섭위평을 올리느냐 안 올리느냐 방담을 나누었다.

 

때마침, 체조왕 리녕(李寧)이 체육계에 고별을 알렸다. 고별기념 만찬, 상당수 초면의 친구들 앞에서 리녕이 나지막이 말했다 :“사람들이 여전히 나를 인정해주었을 때 행복했다!”

 

사실, 만약 그가 제24회 올림픽에서 망가지는 일만 없었다면 여전히 인정이란 말 자체가 그에게 해당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원래 가득한 영광 속에서 아무런 유감이 없이 절정 속의 용퇴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기어코 절벽에 헤딩을 하고서야 고개를 돌리게 된 바.

 

공상명이 갑자기 탄식했다 :섭위평도 리녕의 뒤를 밟게 되는가?

 

섭위평, 참전 여부를 자기가 결정하는데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일체를 조직의 안배에 맡기길 원했다. , 신문지상의 토론 결과 대다수 의견은, 섭위평이 형세를 고려하여 태도를 표시토록 하고, 섭위평 본인의 의견을 참고하여 최종 결론은 당국이 내려야 한다고 보았다.

 

결과.


섭위평, 出山. 공상명 또 실망.

 

 

 

바둑판 밖에 감도는 풍운

 

중국 바둑 역사상, 1988820일은 듬뿍 진한 글씨로 굵게 써진다. 이날, 세계를 호령하는 특급 바둑스타들이 북경에 모여 응씨배 개막식에 참가한다.

 

진조덕은 매우 흐뭇했다. 세계 최고 규모의 바둑대회 후원자가 중국인이기 때문이다.

 

진조덕보다 한층 더 흐뭇한 사람이, 거액을 내놓아 이번 대회를 주최하는 대만 실업가 응창기선생이었다. 참을 수 없이 기뻐하는 모습이, 천군만마를 지휘하는 元帥(원수)가 투지로 끓어오르는 모습을 방불케 했다. 그는 귀를 늘어뜨린 채 주의 깊게 고수들 각각의 개막소감을 경청했다.

 

열여섯 고수들이 즉석 발언을 했다. 조치훈 가토 조훈현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2회전에 진입하고 싶다고 말했고, 다케미야(武宮正樹)는 희희낙락, 중국인과 일본인 누가 우승하던 마찬가지라고, 자기 딴에 번듯한 소감을 밝혔다. 대조적으로 임해봉(林海峯), 이렇게 많은 고수들의 대결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 한 판 한 판 두어갈 뿐이다, 라고 느릿느릿 말했다. 고바야시 순서가 휙 지나가고..... 섭위평은 어떻게 말했을까? 그는 나름의 계산이 서 있는 듯, 중국인이 제일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응창기는 풍채 당당한 모습으로 박수를 연달아 쳤다. 그가 보기에, 우승 준우승 대결은 마땅히 섭위평과 임해봉 간에 펼쳐질 것이다. 만약 진짜로 그렇게만 된다면 그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일이다.

 

이튿날, 북경 샹그리라 호텔 바둑 대회장.

 

응창기는 섭위평의 대국 거의 전부를 구경했다. 섭위평은 불과 125수만에 미국의 마이클 레드몬드를 무릎 꿇렸다. 대국실에서 나온 응창기는 상당히 기분 좋은 모습으로 신나게 만리장성 유람을 떠났다. 그의 기획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현실이 되어갔다.

 

며칠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섭위평과 조훈현이 결승 진출권을 획득했다. 이 결과는 비록 응창기의 의도와는 달랐지만 그래도 섭위평이 들어갔으니, 어떤 각도에서 본다면, 응창기가 130만 달러를 들여 응씨배를 개최함은 바로 섭위평을 위하여 개최함이라, 이렇게 본다면 그래도 역시 절호의 상황, 이제 모든 것은 415일 항주 결전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늘에 풍운은 예측 불가능하다. 응창기 섭위평을 불안케 하는 상황이 닥쳐왔다.

 

그해 3월 중순, 응창기는 홍콩에서 조훈현의 긴급 전보를 받게 되고, 그가 대결 시간과 장소에 이의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한국 쪽에서 말하기를, 조훈현이 후지쯔배 후 완충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대회를 425일로 늦추어 진행했으면 한다.

웅심에 가득 차서 창을 베개 삼아 베고 전투 개시만을 학수고대하던 섭위평은, 크게 놀랐다. 약간의 불쾌함과 함께 은근한 심리적 지장을 피할 수 없었다.

 

소위 완충 기간이란, 한국인의 일종의 수단으로서, 술꾼의 꿍꿍이는 술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울에서의 준결승 당시 한국인들은 응창기에게, 5번기 결전 중에 최소한 한두 판은 서울에게 거행했으면 하는 본심을 암시한 적이 있다. 당시 응창기는 완곡하게 거절했는데, 응창기 생각에 준결승이 이미 서울에서 치러지며, 게다가 대회의 기획 또한 여의치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또 요구해오는 바, 참으로 떡 하나 떡 둘..갈수록 냠냠거리는 심보였다.

 

협의는 바로 파투가 났다.

 

한국인이 새로운 계책을 들고 나왔다. “만약 한두 판을 서울에서 치르지 않는다면 조훈현은 대회를 보이콧한다.”

 

응창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훈현은 410일 이전까지 결단을 내려라, 안 그러면 그의 대회 자격을 박탈하겠다.

 

양쪽 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섭위평은 줄곧 사태의 발전을 줄곧 주시했다. 그는 응씨배 결전의 무산을 원치 않았다. 그는 세계바둑왕이란 타이틀을 정정당당하게 그리고 순리대로 쟁취하고 싶었다.

 

응창기는 사람됨이 시원시원했는데, 거의 고집의 정도에 이를 정도로 시원시원했다. 그는 여러 번 헤아려본 끝에, 섭위평이 전투 없이 승리한다면, 싸우는 족족 이겨서 얻는 광채와 감동보다 못할 것이라 보았다.

 

또 한 번의 심혈을 쥐어짜는 흥정끝에 양쪽은 각기 한 발자국씩 양보했다. 항주에서 두 판, 영파에서 한 판. 만약 3:0이 나온다면 중국에서 폐막식 거행, 만약 2:1이 나온다면 이후의 경기는 대북(臺北)이나 동경 또는 홍콩(香港)에서 거행한다. 결국 응창기는 서울에 가지 않겠다는 바램을 지켜냈다.

 

응창기가 승리했다.

 

그것은 바둑판 밖의 겨룸, 그럼 바닥판 위에서의 겨룸은? 424, 섭위평은 서자호숫가에서 2:1로 앞선다. 응창기는 피가 끓어올랐고 곧바로 리등휘(李登輝)에게 글을 올려 응씨배 최후 두 판을 대북에서 치르자고 역설한다. 그러나 대만 당국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듣고 섭위평이 흥분한다, 그 의 말 :“이건 역사를 연장하는 것 아닌가? 그의 감정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오래 오래 끈 풍운의 변환이 결국, 섭위평에게 승리만 허락되고 패배해선 안 되게 만드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승리를 위하여 응창기는 고심을 거듭했고, 홀연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섭위평이 올해 정월에 싱가포르에서 역전승을 거두었다. 유빈(兪斌)에게 두 판을 이기며 신체육배 제패의 꿈을 이루었다. 거기서 치르지 못할 게 뭔가?

 

바둑을 잘 알지 못한 사람은, 바둑 두는 사람들이 괴벽이 있음을 모를지도 모른다. 바둑 둘 때 사용하는 바둑알, 앉는 방향 및 돌 가리는 손 등등이, 다 매우 중요하다.

 

응씨배 준결승, 섭위평과 후지사와 간의 대결에서 돌을 가릴 때였다. 그날은 19881120일이었다. 삼년 전 그날, 섭위평은 첫 회 중일슈퍼대항전 결전에서 흑으로 후지사와를 꺾고 중국바둑 역사상의 한 이정표가 되었다.

 

돌 가리기에서 행운의 여신이 도와 흑백을 선택할 권리가 섭위평에게 왔다. 그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흑을 달라고 말했다.

 

진행자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섭위평이 흑을 달라니, 그들은 매우 놀랐다. 응창기선생조차도 놀라서 말하기를 :“섭위평이 흑을 원한다고? 아주 좋아, 아주 좋아!”

 

어떤 점에서 오묘한가? 응씨배가 채용한 규칙은 응창기선생이 15년을 고심하여 연구한 計點制(계점제)’이다. 이 규칙은 나중의 數子制(수자제)’ 點目制(점목제)’ 규칙과 다른 부분이 있다. (역주 :각각의 첫 글자 //은 크게 보아 비슷한 의미, 그래서 차례대로 풀이하면, 을 계산하는 방식/를 세는 방식/을 따지는 방식) 數子制/點目制와 달리, 計點制는 응창기가 흑의 선착의 이득이 매우 크다고 보아, 비록 다른 두 규칙도 흑이 덤을 내어 보상토록 하지만, 그래도 매우 불충분하므로, 따라서 계점제의 요점은 흑이 8점이라는 큰 덤을 내도록 한 데 있다.

 

물론 棋士의 심리는 각기 달라서 仁者을 보고 智者를 봄은 당연한 고로, 섭위평으로 말하자면 이전에는 무조건 백을 택했다. 그는 흑의 덤이 너무 커서 백이 이득이라고 여겼다. 그런 섭위평이 이번에 흑을 잡자 주위가 죄다 놀랐다! 허나 실상을 말하자면, 이번에 섭위평은 흑이니 백이니를 따진 것이 아니라, 흑을 잡고 이긴 삼년 전 그날을, 즉 날짜를 따진 것이다.

 

쉽지 않은 공교로움이 棋士가 쉽지 않은 선택을 하게 만든다.

 

(대회 장소 얘기로 돌아가서)

응창기는 또 한 번 대회 장소를 바꾸었다. 한국인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는 듯했다. 응창기가 어떤 사람인지 그들도 맛을 제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

 

이때, 응창기선생은 웃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는 듯 웃었다. 만사 구비, 동풍만 불어오면 된다.(역주 :삼국지 제갈량-적벽대전) 그럼, 이때 한국인의 임전 심리는 어떠했나?

 

한국 棋士는 일본 棋士와 마찬가지로 소파에 책상다리로 앉아 대국하는 데 익숙하다. 항주 전투에서 조훈현은 등받이 의자가 (책상다리 하기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응창기에게 의자를 바꿔줄 것을 요구했다. 선생은 신경을 바짝 도사리며 고집을 풀지 않았다. 그런 응창기가 가혹한가, 3자들의 논쟁이 벌어졌다. 다만 그들이 모르는 건, 이 응씨배 결전을 벌이는 바둑판, 탁자 그리고 의자는 응창기선생이 직접 설계 제조한 것으로서, 각각이 가치가 1000달러 이상 간다는 사실이다. 당신 말해보라, 그가 아무렇게나 바꿔줄 수 있었겠는지?


 

                              결승1국 장면      -사진 삽입:번역자-



당연히 한국인은 중국인처럼 이런 사정을 납득할 수 없었고, 답답하고 못마땅했으며, 억압 당하는 기분이 드는 듯했다. 그들은 시시때때를 막론하고 기회를 노렸으며, 결국 보복을 했다. 이 한 는 응창기선생도 미처 예상치 못했다.

 

사자의 도시에서 바둑판에 돌이 놓이기 전, 조훈현은 승리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하여, 한국바둑계는 그를 위하여 정성을 들여 대형 기획물 하나를 준비한다.

 

92, 섭위평과 조훈현이 격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주 앉아서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러나 섭위평은 조훈현의 소매 속에 감춰진 그 애완동물’, 보검을 전혀 알지 못했다. (역주 :‘애완동물은 이상한 표현 같지만 원문 그대로이다. ‘반려동물 아니다. ‘애완이란 표현은 일종의 장난감 같은 어감을 준다. 바로 이 표현에, 이 글의 필자 양평이, 아래에 나올 그 무엇-한국 측의 동양증권배 기획-을 바라보는 視(시각)이 담겨져 있다. 원문의 같은 단어를 아래에선 장난감으로 번역하겠다.)

 

이 이야기는 제1회 슈퍼대항전 결전 중의 이야기의 재연이었다. 지금 그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매우 적다.

 

당시, 섭위평과 후지사와는 결사일전을 벌였고, 중앙TV가 전국에 실황으로 방송했다. 경기 시작 몇 시간 전, 중국바둑협회 명예주석 방의가 섭위평에게 ‘法寶(법보)하나를 보내는데, 겹겹이 포장을 해놓았기에 그게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오직 섭위평만이 그 안의 비밀을 알았는데, 그건 드높은 기세의 소나무를 그린 동양화로서, 방의 동지가 전심전력 몰두하여 창작한 작품이었다.

 

어쩌면 소나무의 기상이 섭위평에게 전달되어, 대찬 웅지와 불굴의 의지로, 후지사와를 기세에서 압도하여 격파하였을지도 모른다. 그 판 바둑은 마치 붓놀림을 즐기는 화가의 그림처럼 精妙(정묘)했다.

 

중국의 각종 예술은 변화 속의 함축, 함축적인 변화무쌍함을 중시한다. 그림은 그림 밖의 정경을 중시하고, 거문고는 현 밖의 음을 구하고, 바둑은 판 속의 기묘함을 찾는다. 무릇 고수 바둑에서는 화가가 붓을 휘두를 때의 그 호쾌함을 모색한다.

 

방의는 바둑을 잘 알고, 를 깊이 깨달았다. 임전 순간의 그림 선물은 틀림없이,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땔감 보내듯, 적시의 손길이었다.

 

잠시, 당시 한국인들이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 살펴보자.

 

첫 판 승리, 조훈현은 진중했다.

 

결승판 승리, 조훈현은 뜻밖의 기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폐막식에서, 조훈현은 이 장난감을 선보인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한국인들의 나름 고심작을 구경하게 되었다.

 

, 그들은 이듬해에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를 개최할 작정이었다. 한국기원 대표가 말하기를, 일본은 해마다 후지쯔배 세계대회를 연다, 중국은 4년마다 응씨배 세계대회를 연다. 그들은 절충을 하여 두 해마다 세계대회를 열겠다. 차이점은, 규모와 상금에서 후지쯔배와 응씨배를 크게 초과한다, 각국의 고수들이 왕림해주셨으면 한다.

 

장내 박수가 터졌다.

 

조훈현은 웃었다. 진솔하게, 느긋하게, 편안하게 웃었다.

 

섭위평은 웃었다. 태연스레, 조심스레, 단단한 의지로 웃었다.

 

응창기 또한 웃었다. 마지못한 웃음, 완전 예의상의 웃음이었다. 그는, 그리고 섭위평은 더, 한국인이 창끝을 돌려 이쪽을 찌를 줄이야 생각도 못했다. (反戈一擊:[성어] 창끝을 돌려 원래 자기편을 공격하다 ;배신 때리다 ;역주)

 

오래 오래 전에, 노년에 접어든 응창기가 바둑 세계대회를 개최할 뜻을 품었다. 다만 당시엔 일본 棋士가 너무 강해서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 섭위평이 슈퍼대항전에서 걸출한 활약을 하니, 그는 드디어 때가 왔다 일각도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과, 섭위평이 왕좌에 앉지 못했다. 응창기는 속상함에 눈썹이 꿈틀, 가슴속에서 오래 오래도록 출렁이던 설렘이 점차 사라져갔다. 그는 눈길을 폐막식 발언을 하는 섭위평에게 돌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다급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섭위평이 말했다 :“이번에 잘 못두었다. 많은 분들을 실망시켰다. 그래서 괴롭다. 패배는, 기술적 측면에서 내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이는 또한 나의 새로운 출발이 시작되었다는 걸 예고하는 것이다. 앞으로 배로 노력하여 이 대회 우승을 쟁취하겠다. 만약 건강 때문에 기회가 사라진다면, 그러면, 나를 잇는 사람이 필사적으로 분투토록 돕겠다. 앞선이 고꾸라지면 뒷선이 잇고 계속하여 돌진한다.”

 

응창기는 감동했다. 거의 식었던 피가 다시 끓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흘렀다. 학극강 또한 감동, 고개를 들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섭위평을 인터뷰하던 그날 밤, 공상명이 나에게 물씬 향기가 나는 차를 두 번을 따라 주었다. 하지만 나는 차를 음미할 새도 없이 섭위평의 느끼는 바, 생각하는 바, 깨우친 바를 바쁘게 기록했다.

 

섭위평의 말 :“내가 바둑을 지고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勝敗 兵家常事(승패 병가의 상사)라고 말했다. 공항에서 만났던 바둑팬들 또한 그렇게 위로했다. 바둑인들의 마음속에서 내가 그들의 우상이고, 때문에 그들은 내가 언제나 이기기를 바라고 나의 실패를 참지 못한다는 걸 나는 잘 안다. 나는 勝敗 兵家常事라고 어물쩍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다. 승패 중에 역시 승리가 낫다. 이번 패배는 나의 고질병이 말썽을 부린 것이다. 나는 내가 이겼다 싶은 순간이면 꼭 경계심이 풀어진다. 이런 상황은 작년에 슈퍼대항전에서 하네에게 진 그 바둑과 비슷하다.”

 

생사결전에서 완전한 몸으로 생환하기란 불가능하다. , 관건은 사지에 몰렸을 때 상처를 잘 추슬러 돌아올 수 있는가이다. 섭위평의 말 “”패배가 일종의 좌절이지만, 치명적 좌절은 아니다. 난 아직 배로 노력하여 분투해나갈 수 있다.

  

 


평론가들의 高見

 

응씨배 항주 교전 이후 사람들은 기쁨에 차 논하기 시작했다. 화제는 응씨배의 거액 상금. “섭위평이 이긴다면 그에게 얼마가 돌아가는가?”, “그는 세금을 얼마나 내야 하지?”

 

확실히 응씨배의 상금은 유혹적이었다. 우승자 40만 달러, 준우승자 10만 달러, 설령 꼴등도 5000 달러를 가질 수 있다.

 

사람들이 돈을 화제로 삼는 걸 원치 않던 섭위평도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확 흥미가 당겼다. 기자를 맞아 의외로 자기 수입에 대해 시원하게 얘기해주었다. :“규정이 있다. 국제대회 결승에 올라갈 경우, 우승을 포함해서, 국가는 상금의 최고한도를 2000 달러로 정했다.”, “응씨배 결승에서 만약 내가 이긴다면 내가 국가 수입을 398천 달러를 증가시키는 셈이다.” 92, 중국청년보가 실질을 구함편에서 섭위평과 모아민(毛阿敏) 비교라는 기명칼럼을 발표, 국위 선양에 나서는 섭위평의 숭고한 정신을 크게 칭찬했다. (역주 :모아민, 중국의 유명 대중가수)

 

바로 그날, 타국에 있던 섭위평은 당연 그를 격려하는 그 글을 못 보고 불타는 의지로 조훈현을 사지로 몰아넣고자 하던 참이었다.

 

94, 중국체육보가 제1면 준 머리기사로 위의 글 비교를 옮겨 실었다. 그런데 하필 머리기사가 섭위평 조훈현에게 패배라는 뉴스였다.

 

이치대로라면, 당시에 사람들은 냉정해야 했다. 그러나 딱 반대로 사람들은 왜 섭위평이 40만 달러 중에 눈곱만큼도 안 되는 2000 달러밖에 받을 수 없느냐에 몰두하여 논쟁했다. 섭위평이 진다는 가정은 아예 상상 밖이었다. 중국체육보가 옮겨 실은 중국청년보의 그 글은, 바로 사람들이 돈보다는 대회 자체의 중대한 의의에 더 관심을 기울이도록 유도하고자 하는 글이었다.

 

곰곰이 따져보면, 모든 글이 섭위평 승리의 측면에서 써진 글이었고, ‘만약 진다면하는 착상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사람들은, 설령 지더라도 10만 달러를 쥔다, 그것도 중국 스포츠 역사상 신기원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결국 섭위평이 이길 수 없었고, 온갖 시끄럽던 논의들은 죄다 웃음거리, 헛짓거리가 되었다. 당시 여론 동향을 더 살펴보면 또 하나의 구경거리가 있다.

 

97일 싱가포르 결전 후 고작 이틀이 지난 시점, 상해의 한 신문이 침체기로 들어서는 중국바둑이란 글을 발표했다. 섭위평이 절정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현대의 빠른 전파 수단으로, 이 글은 당일 저녁 북경 중국체육대본부로 전해졌고, 바둑계 고위층을 경악케 했다.

 

98일 저녁, 북경 어느 호텔. 중국장기왕 시상식이 진행된다.

 

호영화(胡榮華)가 힘이 부친 끝에 이래군(李來群)의 어지러운 화살 아래 참패, ‘기왕우승을 바쳤다. 이와 섭위평의 세계바둑왕상실이 상당히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나 이는 우연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시상식에는 중국바둑계 인사들도 빼곡히 모였다. 그런데 수뇌부인 진조덕 학극강의 굳은 얼굴은 시상식의 들뜬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이 그토록 걱정하던 상황이 현실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한 사람의 패배가 국가 전체의 실력을 대표하진 않는다는 점입니다.” 진조덕과 중국체육보 책임편집 로광(魯光)은 얘기가 아주 잘 통했다. 그들은 많은 부분 의견을 같이 했다.

 

학극강의 말 :“일본 초일류棋士들이 죄다 응씨배 결승에 못 들어갔다. 그럼 일본의 바둑도 침체기에 들어선 건가?”

 

진조덕의 말 :“만약 이번에 섭위평이 이겼다면 평론가 동지들은 중국바둑이 절정에 올랐다고, 섭위평의 실력이 절정에 올랐다고 말했겠지? 섭위평의 바둑에 대한 공헌은 매우 크다. 비록 이번에는 졌지만 그는 여전히 중국의 가장 걸출한, 가장 뛰어난 棋士이다. 프로棋士로서 기복이 없을 순 없다. 일시적인 불만족스러운 결과, 좋지 않은 컨디션을 절대로 침체라 말할 수 없다. 섭위평에게 너무 뭐라 해선 안 된다.”

 

10일 오전 여덟시, 나는 총총 진조덕의 집무실로 갔다. 그곳은 벌써부터 전화통에 불이 날 지경이었다. 화이강 왕여남(王汝南) 등 바둑계 인사들이 침체이 글에 대해 서로들 의견을 내놓는 중이었다.

 

진조덕이 나에게 자리를 내주고서 거무스름한 핏줄이 비치는 두 손을 내밀었다. 그때서야 나는, 그가 중국의 바둑 사업을 위해 그득 열정을 쏟는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갑자기 튀어나온 침체론에 진조덕은 이치를 들어가며 반박했다 :“요 몇 년 전국에서 바둑 열기가 일어났다. 중앙TV의 어느 동지 말에 의하면, 바둑대회 실황과 바둑 강좌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모든 프로그램 중에서 상위권이라 한다. 바둑 활동이 갈수록 활발해지고 바둑대회 입장권 가격이 상해에선 20위안 광주에선 30위안에 팔린다. 그리고 다수의 부모들이 애들이 바둑을 배우게 한다. 바둑이 침체기에 들어섰다고?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나? 바둑의 생명력은 대단히 질기고 또한 흡인력이 매우 세다. 바둑이 무슨 침체한다느니 이런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최소한 지금은 아니다.”

 

세계적인 희곡 작품을 죽 살펴보면, 대부분이 비극으로 끝난다. 비극은 종종 정통극보다 더 호소력이 있기 때문이다. 헌데, 중국인의 전통적 심리는 비극적 결말이 아닌, 두루 만족스러운 해피엔딩을 좋아한다. 이런 전통 관념의 영향으로, 섭위평이 비록 준우승을 했지만 사람들 마음은 만족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화이강은 도무지 납득이 안 됐다. 중국인은 왜 이다지도 감정적인가? 며칠 전엔 일체가 닐리리맘보였다. 마치 棋聖 머리 위에 짙푸른 창공이 펼쳐진 듯. 며칠 후, 일체가 썰렁해졌다. 마치 棋聖이 늪에 빠진 듯. 이런 식의, 인심의 냄비 같은 돌변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감격 후의 걱정

 

북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는 몇몇 바둑팬들이 섭위평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어떤 사람이 섭위평의 응씨배 패배를 나폴레옹의 패전에 비유했다. “이것은 몇 세기 동안 중국인이 가지지 못했던 자랑스러운, 독보적인 영웅의 패배이다.”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섭위평은 이번에 병을 안고 전투에 나섰다. 만약 몸 상태가 좋았다면 결과가 달랐을 수 있다.

 

맞다. 섭위평의 신체가 보기엔 건장해보이지만, 사실은 겉으로만 그렇고 속은 허하다. 그는 심장병이 있다. 바둑에 계속 집중할 수도 없고 두뇌를 혹사해서도 안 되고 무슨 힘든 일도 할 수 없다. 뭐든 죄다 안 돼, 때문에 어떤 사람은 그를 두고 말하길 부귀병이라고 말한다. 이번에 싱가포르로 갈 당시 섭위평이 탄 비행기는 북경에서 태국으로 날아가서 다시 싱가포르로 가는 항공편이었다. 그런데 섭위평은 싱가포르 직항편이라고 오해하였고, 비행기가 태국공항에 내려앉자 짐을 챙겨 비행기에서 내렸다. 그리곤 세관으로 가서 입국수속을 받으려 들었고, 그때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고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부랴부랴 돌아갔다. 이날은 찬바람이 거셌다. 그는 한기가 들었고 독감에 걸렸다. 게다가 심장도 불편한 느낌이 왔다. 나중에 결전에서 한편 약을 먹고 한편 산소를 마셔야 했으니, 그야말로 불운이었다.

 

섭위평이 심장병이 있음은 누구나 아는 바다. 그런데 그해 21, 북경의 어느 신문이 (미혹)’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 ‘섭위평의 선천성 심장병이란 그가 어릴 때 의사가 증세를 오진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글은 또, 섭위평의 경기 중 산소 흡입은 신체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심리적 필요 때문이다운운했다. 27일 출간된 週刊발췌(週刊文摘)가 이 뉴스를 옮겨 실었고 광범위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섭위평은 이에 크게 상처를 받았다.

 

섭위평의 말 :“내게 병이 있나 없나는 내가 제일 잘 안다. 오래전부터 내 심장병에 대해 적잖은 뜬소문이 있었다. 설령 어떤 부정확한 설들이 있기도 하지만, 내 심장에 병이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섭위평이 나에게 한 말, 소학교 다닐 당시 심장이 불편했고, 체육시간은 늘 열외였다. 1964년 북경 어느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고 당시의 증세를 정확히 기재하였다. 1986, 또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의사가 그의 심장에 문제가 있다며 한 달 입원하여 관찰 치료하자고 권했다. 다만 대회 때문에 입원할 수 없었다. 이후에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못했다. 사실, 누가 자기 건강을 바라지 않겠는가, 누가 없는 병을 찾아가서 걸리겠는가, 설마 병에 걸리면 영광인가?

 

1989215, 섭위평은 남녕(南寧)에 가게 되는데 그때 심장에 한 차례 위험한 순간이 있었다. 그날, 섭위평은 묵던 호텔에서 아들 운총(聶雲驄)과 숨바꼭질을 하며 하하 껄껄 연방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다 흥분이 지나쳐 갑자기 숨이 답답해지며 머리가 어질어질해졌고, 심지어 숨조차 쉬기 어려워졌다. 즉각 침상에 누워 대략 3시간 정도 지나서야 머리가 맑아졌다. 다만 식은땀은 멈추지 않았고 여러 사람이 놀라게 됐다. 이후부터 섭위평은 심장병을 막는 질산글리세린을 항상 휴대하게 되었다.

 

섭위평은 글 미혹에서 그의 산소 흡입을 심리적 필요로 간주하는 논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말, 정상인이 순수 산소를 너무 마시게 되면 어지럼증 및 기타 거부반응이 온다. , ‘경기 전 잘 먹고 잘 잔다는 것은 몸 상태가 좋다는 의미란 말은 더욱 견강부회이다. 섭위평의 말, “나더러 경기 전 잘 먹고 잘 잔다? 나는 늘 그랬을 뿐, 단지 내 심리가 비교적 안정적이란 말에 지나지 않는다.”

 

섭위평의 심장병 문제는, 관련당국의 수뇌도 중시했는데, 다만 어느 정도로 중시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수도 북경에는 명의가 구름처럼 몰려 있다. 심장병, 심혈관 전문가가 지천이다. 전문가들의 섭위평 진단 결과는 百人百色, 저마다 전문가들이 저마다의 견해로 다들 자기 판단이 맞는다 하니, 때문에 치료 방안을 정할 수가 없을 손, 그냥 듣고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역주 :술 이야기)

棋聖의 고충을 말하자면, 감격 후 무조건 위안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걱정이 생긴다. 이런 말을 믿기가 어렵겠지만.

 

섭위평은 聖人이기도 하고 동시에 보통사람이기도 하다. 보통사람의 약점이 당연 그에게도 있다 생활에서 그가 즐기는 것은 담배와 술이다. 공상명이 나에게 말하기를 :“술은 그의 몸에 제일 나쁜 물건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자신까지 포함해서, 이것을 까먹는다. 어떤 때 나는 정말 속이 상한다.”

 

섭위평이 매우 유명한 까닭에 평소 그를 부르는 지방이 많다. 사람들은 그를 매우 존중한다. 그가 조국의 자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귀빈을 환영하는 전통 방식은 잔치이다. 이리하여 섭위평은 재앙에서 도망가지 못할 팔자가 돼버렸다. 주인은 항상 성심성의에 손 대접을 좋아하고, 연회에서 그가 몇 잔 더 마시기를 원함은 인지상정이다. 그가 안 마실 수 있을까? 일이 십 년 전 건장하던 섭위평이 동북 지방으로 하향을 갔는데 당시 한 번에 반근 이상을 마실 수 있었고 지금도 반근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다. 그런데도 그가 안 마실 수 있겠는가! 다만 공상명이 끼어 있기만 하면 그녀는 단호하게 막아버리니, 어떤 땐 대접 좋아하는 주인들을 그다지 유쾌하지 않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下鄕(하향) :문화혁명 때, 간부나 학생이 농촌으로 내려가서 일/단련을 하다 ;역주)

 

세상사는 어떤 경우 도저히 예측할 수 없다. 누군가 공상명이 남편을 너무 단속한다고 비난했다. 공상명의 말, 당신들 뜻을 내가 안다, 근데 당신들은 어째 그의 몸은 생각지 않는가? 연회에서 사람들 간 어지럽게 잔이 오고 가고 통쾌하게 마실 때, 그의 몸엔 고통이 쌓여간다. 사람이 눈앞의 일만 봐서야 쓰겠는가!

 

한때, 섭위평도 술과는 세불양립이라고 아주 엄숙한 결심을 했으나, 일단 연회장에 들어가는 순간 자기 몸이 자기 몸이 아닌게, 주인이 일단 한 번, 한 번이 두 번, 두 번이 세 번 :‘! 걱정 마시고, 한 번 취해봅시다!’ 여기서 안면상 도저히..... 지방은 지방마다 비장의 무기가 있고, 사람은 사람마다 이유가 있으니, 그야말로 양산박 호걸들이 죄다 모인 곳임에랴. 어떤 때는, 공상명이 마음이 시시때때 쓰라려서 얼굴을 가리며 장탄식을 했다 :그를 헤아려줘요. 바둑판 위에선 천군만마를 부리는 기개지만 술자리에선 약골이에요. 이렇게 몇 년 살다 말게 할 순 없어요. 그는 더 오래 살아야 해요!

 

공상명은 현모양처라고, 그녀를 아는 사람은 다 그렇게 말한다. 아내의 관심 자상함에 섭위평은 이를 데 없이 감격한다. 공상명의 말 :“늘 생각한다. 남을 너무 원망해선 안 된다고.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그가 술을 탐하는 습성을 못 버리기 때문이다.”

 

섭위평과 주량에 대한 이야기를, 옛날에 내가 남경의 주말지에 발표한 바 있다. 內地와 홍콩의 신문들이 옮겨 실었고, 섭위평 또한 상당히 느낀 바가 있었다. 그래서 그도 술의 유혹을 위험시하게 되었다. 허나 세월이 흐르고 형편이 달라지고..., 섭위평은 변함없이 술잔을 쥐고 그 무궁무진한 낙에 취해...

 

공상명은 늘 달팽이 뚜껑 덮듯 입을 잘 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그 사람은 설령 자기 생각은 안 한다 하더라도, 일을 생각해서라도 금주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만약 다른 각도로 말해서, 고상한 구호나 네 생명은 조국의 것이다 이런 말을 안 한다 치더라도, 최소한 우리 가정의 것이고 당신 개인의 것 아닌가! 당신은 우리 가정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렇지 않나?”

이런 공상명의 말은 생각할 여지가 있는 말인데.

 

섭위평과 섭위평에 관심 가진 사람들은 깊이 생각해보았을까?

 

바둑판 위에서의 섭위평은 명불허전, 용을 항복시키고 호랑이를 제압한다. 사람들은 그 늠름함을 동경한다. 생활 속의 섭위평 역시 바둑을 두듯이 엄격하고 신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神仙도 아니다, 황제도 아니다

 

만약에, 4회 슈퍼대항전에서의 실패를, 그전 세 대회에서 바위에 화살을 꽂는 절륜한 무예로 얻은 영예를 들어 두둔할 수 있다면, 응씨배에서의 실패는 전혀 기댈 구석이 없고 여지없이 글자 그대로의 실패였다.

 

섭위평은 결국 名人도 어찌할 수 없는 쓴 맛을 체감한다. 그는 자기가 지극히 보통사람이라고, 자기 앞의 곤란에 늘 속수무책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 사회의 어떤 사람들은 名人에게 늘 그렇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가? 마치 우린 정당한 권리도, 자기의 의지도, 자기만의 고민도 가질 수 없는 것 같다.

섭위평은 신선이 아니다, 황제도 아니다. 보통사람 가정에서 생기는 곤란을 그 또한 면할 수 없고 시고 맵고 괴롭고 쓴, 이런 것도 보통사람과 마찬가지로 많다. 어떤 경우엔 오히려 더 괴롭다.

 

섭위평은 자기가 조훈현에게 진 것은 풀어졌기 때문이라 인정했다. 그럼 당시 그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생활상의 번뇌가 싸그리 덮쳐왔을까? 우리의 棋聖, 환희도 있고 번뇌도 있다, 이 번뇌는 바둑판 위의 지고 이김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신체에만 그치지도 않는다. 바로 자신의 그 에 번뇌가 있다. 기성의 환한 얼굴 뒤안에는 오래도록 많은 씁쓸함이 숨어 있다.

 

사람들은, 섭위평 같은 바둑계 거물은 당연히 좋은 곳에서 살 것이고 그래서 바둑 연구에만 몰두할 것이라고 말한다. 웬걸. 내가 섭위평의 집에 갈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너저분한데다가 미어터지는 집안이었다. 설레던 나는 그냥 멍청해져버렸다.

 

섭위평의 집은 북경 체육관로 근처이다. 5층 건물의 한 층으로서 방 세 개에 거실이 딸렸다. 건물 앞뒤로 간격이 좁아서 통풍이 잘 안 되고, 창밖이 바로 차고 건물이고 현관 정면 쪽은 골목길이다. 매일 사람이 오가고 어지러이 떠들썩하다. 안방은 이웃한 고층 빌딩 때문에 볕이 들지 않는다.

 

방 셋 및 거실은 알뜰히 사용된다. 섭위평 부부와 아이가 한 칸, 공상명의 아버지가 한 칸, 나머지 한 칸은 섭위평의 연구실 겸 접대실 겸 서재 겸 상패류 보관소이다. 일 도우는 아줌마에겐 거실 식탁 옆에 놓인 침상이 다다. 이게 바로 棋聖네 다섯 식구의 거처이다.

 

실내를 둘러보면, 큰 탁자 작은 탁자 세트가 있고 침상 아래 종이상자는 새것이라 할 수 없고, 새것은 오갈 데 없어서 놓인 듯한 수많은 우승컵만 새것이요, 그런데 둘둘 한데 묶인 채 침상 아래 처량하게 잠잔다. 이런 광경은, 힘들게 분투한 棋聖으로선 그야말로 속 썩는 일이다. 헌데 사정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 보자면 또, 아라비안나이트 뺨치는 터무니없는 일이다.

 

공상명의 말, 그녀와 섭위평은 고민을 정말 털어놓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일은 그들 능력 밖의 일이다. 평상시에, 찾아오는 사람이 꼬리를 무는데,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고, 예의상 빠짐없이 응접해야 한다. 그런데 매번 그녀와 남편은 얼굴을 붉힌 채 손님을 배웅한다. ? 집이 너무 좁아서. 어떨 때는 들어오는 사람이 많아서 줄을 서서들어온다. 한번은 손님들이 식사를 하는데, 탁자를 펴고 나니까 집안이 바로 통행금지가 돼버렸다. 게다가 上席 자리엔 남편 한 사람 자리밖에 안 나고 나머지는 옆자리에 앉아야 한다. 속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는지? (역주 :중국 손 대접 예절에, 귀빈은 주인과 나란히 上席에 모셔져야 한다.)

 

공상명의 말은 엄살이 아니다. 어떤 외신기자가 섭위평 취재 기사를 썼는데, 첫마디가 뭐냐면, ‘놀라 뒤집어졌다. 이런 코딱지 같은 집이 棋聖의 집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런 묘사가 棋聖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역사 유구한 나라라는 체면을 지키기 위해, 취재 오는 사람에게 중국의 棋聖이란 영예에 어울리는 장면을 보이기 위해, 동시에 조금 더 편안한 환경에서 살고 싶다 하는 요인도 없지는 않고, 두 사람은 관련당국이 자기들의 주거조건을 개선해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싹텄다.

 

현실은 참으로 복잡다단하다. 棋聖 면전에 놓인 것은 곳곳에 숨은 장애요 온갖 사리에 안 맞는 울타리였다. 섭위평의 주거 문제는 관련당국의 관심을 불렀다. 그러나 관심뿐이었다.

 

일 년, 또 일 년. 세월은 화살처럼 흘렀다. 섭위평이 또 혁혁한 전공을 세웠지만, 그와 동료들이 국가를 위해 일본돈으로 여덟 자리 수의 상금을 획득하였지만, 집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모든 것이 반비례의 연속이었다.

  

참지 못하고 공상명이 섭위평에게 화를 냈다 :“당신, 가서 말 좀 하지 그래요!”섭위평은 얼굴을 찡그리며 담배만 뻑뻑,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시 그의 예견력이 공상명보다 조금 더 노련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섭위평도 한번은 속이 타서 공상명에게 말했다 :“이 문은 어째서 늘 반쯤만 열리는 거요. 문 뒤 물건 좀 치우지.” 공상명 :“보기 싫으면 보기 싫은 사람이 치우든지..., 집이나 좀 구해보지 그래요!" 장군이요당해버린 섭위평, 이후론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공상명이 말로는 쏘아붙였지만 그래도 내심은 섭위평을 이해한다. 그녀는 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처로 다니며 부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일본에 연수 가 있을 때 한 수뇌인사가 섭위평에게 말했다 :“당신 주택이 바뀌게 될 것이오.” 이 말을 듣는 순간 섭위평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그날 밤 잠을 못 이룬 채 도무지 오금이 쑤시던 섭위평, 등불 밑에 엎드려 공상명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는 편지를 썼다. “더 큰 집이 생기게 됐소. 바둑 친구들을 더 많이 부를 수 있소. 그 문도 활짝 열어 놓을 수 있게 됐소.” 이 백전노장, 일본 초일류棋士들을 격파하던 때도 이렇게 흥분하진 않았다.

 

멀리 일본에 있던 공상명도 이 소식을 듣고 흥분해 마지않았다. 두 사람은 경건하게 기다렸다. 누가 알았을까, 그들의 기대를 맞이한 건 실망이었다.

 

해결방안은 이랬다. 관련당국이 공상명에게 알려왔다. 세 칸 일 거실인 집에서 네 칸 일 거실인 집으로 옮긴다고. 위치는 교외이며, 추가로 20만 위안을 준다고. 황당,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제안이었다

(역주 :성에 차지 않는다는 소리인 듯, 이 글에 구체적인 記述(기술)은 없지만 부부는 이 제안을 못 받아들인 듯하다.)

 

공상명의 두 뺨이 실룩거렸다. 마음이 쓰라렸다. 섭위평은 다시 한 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결국 아내의 고초를 실감했다. 공상명이 신경질을 부릴 때마다 그는 그녀가 단순하고 거칠다고 생각했다. 아니, 왜 바둑 둘 때처럼 차분하지를 못하나. 그런데 직접 겪고 보니 이제야 그 고충을 알겠다. 그의 말, 사람 기분이 한결같을 수 없다. 기분이 안 좋아서 짜증이 날 수도 있다. 내가 이해를 해야 한다. 우리와 접촉했던 동지 또한 우리를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棋聖, 바둑판 위에서 대국관 강하고 깊게 꿰뚫어보고 형세판단 정확하고 임기응변에 능하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좋은 집이라는 바둑판위에서는 엉터리에 지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 눈에, 섭위평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화려한 인생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섭위평 부부는 월급으로 산다. 섭위평의 월급은 140위안, 공상명은 180위안(군인대우), 생활비론 넉넉하겠는데. 평소 집에 오가는 손님들에 들어가는 돈이 엄청나다, 보조금은 한 푼도 없다.

 

누군가, 만약에 공상명의 부친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형편이 좀 나아지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 일을 섭위평 부부 또한 생각해본 적 있지만, 이런 저런 고려 결과 역시 노인을 계속 모시기로 했다. 왜냐면 공상명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버렸기에 차마 75살의 늙은 아버지가 혼자 살게 할 수가 없고, 게다가 어르신이 그렇게 정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할아버지가 집에 있으면서 애들을 보살펴줄 수도 있다.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인지상정이다.

 

집안에 통풍이 잘 안 되고 그렇다고 에어콘 설치도 허락되지 않고, 그래서 해마다 여름이면, 바둑판 위에서는 썩은 나무에 싹을 트게 하는 섭위평조차도 대책이 없었고, 하루를 일 년처럼 보냈다. 그의 몸은 비교적 뚱뚱해서 땀이 잘 난다. 그래서 집에서 잘 때면 소파에서 새우잠을 잤다. 공상명도 뭐라 하지 않았다. 어느 해 817, 그날은 섭위평의 생일이었다. 그게 또 마침 응씨배 개막 며칠 전이었는데, 응창기선생이 섭위평 집을 방문했다. 선생은 섭위평 집이 그렇게나 비좁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이들은 아주 단순하다. 집이 그렇기 때문에 섭위평은 아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아내보다 훨씬 적다. 그래서 아들 운총의 어린 눈에 아빠의 인상은 그다지 좋지가 못하게 되었다.

 

내가 운총에게 물었다. 누가 좋아? 운총의 말 :“할아버지랑, 엄마랑 아줌마, ~~” 순간 내 얼굴을 쳐다보며 또르르 눈알을 굴리더니 한 마디를 보탠다 :“아빠도요!” 이런 빠꼼이 같으니라고.

  

1987, 섭위평은 인민일보에 투고하여 바둑 國手의 신맛 단맛 쓴맛 매운맛을 까놓고 말한다. :“인재 무시가 수많은 문제를 부른다. 많은 뛰어난 인재가 국외로 나갔지 않았나? 나처럼 멍청하게 어디로도 가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나? 체육계에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떠나버렸나. 만약 통계를 낸다면 명단이 한 묶음이 될 것이다. 많은 나라가 높은 몸값으로 나를 유혹했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 민족 자존심 때문이 아닌가 말이다.”

 

棋聖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나의 수중에는 이런 자료가 있다 :저명한 수학자 진경윤(陳景潤)이 지난 세기 80년대 초에 집 때문에 속을 썩였다. 등소평(鄧小平) 동지가 이를 알고 사람을 시켜 일주일 안에 처리하도록 시켰고, 일을 맡은 사람은 나흘 만에 진경윤을 방 다섯에 거실 딸린 집으로 옮기고 전화까지 달아주었다.

  

과학자 한 사람의 집 문제 해결 때문에 중앙의 지도자 동지를 놀라게 하다니, 이게 정상적인 상황인가? 설마 중국의 유일한 棋聖의 집 문제 해결을 위해 또 한 번 이래야 한단 말인가?

 

학극강이 나에게 밝히기를 :“섭위평의 집 문제에 대해 우리도 관련당국에 해결해달라고 두 차례 보고를 했다. 다른 건 접어두고서라도, 섭위평 이런 棋士조차 집안에 연구실이 없다면 천하의 웃음거리 아닌가. 국가체육위원회의 국장급이 사는 그런 집을 보자, 설마 그들의 공로가 섭위평보다 크단 말인가? 이번에 섭위평이 어쨌든 10만 달러의 상금을 받는데, 이 상금 중 일부를 사용해서 섭위평의 집을 개선하면 안 되냐 말이지.”

  

사실, 섭위평 같은 얻기 힘든 인재에게 생활상 좀 특수한 배려를 한다고 해서 그게 너무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가 다른 걱정 없이 오로지 바둑에 전심전력하지 않겠는가!

 

섭위평이 패배하자 누군가 말했다 :지는 것도 괜찮아. 더 심한 자는, 섭위평이 조훈현과의 첫 판에서 졌을 때 소리치기를 :“얼른 질수록 좋아!” 이게 무슨 소리인가? 설마 중국인의 팔은 밖으로 굽는단 말인가?

 

그건 아니다. 누군가의 이런 말에는 오래도록 눌려온 갈망이 담겼다. 만약 섭위평이 지지 않았다면 문제점 또한 그렇게 급박하게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섭위평의 패배가 완전히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섭위평은 결국 신선이 아니다, 황제도 아니다, 모아민 또한 아니다. 섭위평은 정원도 없고 양옥집도 없고 승용차 또한 없다. 그가 가진 것은, 단지 조국과 인민이 그에게 준 숭고한 영예와 수천 만 사람들의 그를 향한 존경과 선망뿐이다. 이것으로 섭위평은 영광스럽다. 충분히.

 

바둑은 중국에서 발원되었다. 중국의 棋聖으로 말하자면, 그 실력은 물론 우주 같고, 공간적으로 한도 끝도 없고, 시간적으로 시작도 마침도 없다.

  

당시의 중국은 바로 과학과 문명의 새로운 길을 향해 한 발 한 발 한창 내딛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힘차게 피어오르기 시작한 바둑이라는 스포츠엔, 그 어느 때보다도 섭위평이 필요했다. 나무를 키우는 데는 십 년, 사람을 키우는 데는 백 년이라 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만사가 틀어진다. 어찌 끈 떨어진 연과 나란히 논할 수 있으랴.

  

섭위평의 말 :“우리는 스스로를 사회에 바쳤다. 바라는 건 단지, 사회가 우리를 이해하고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지나친 요구가 아니지 않은가!”

 

이전에 섭위평은 용을 항복시키고 호랑이를 제압했다. 다만 이제는 이전만큼 여의치가 않다. 그러나 그는 인심의 온탕 냉탕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단지 부처의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볼 뿐이다. 행여 그러지를 못한다면, 단지 모든 것을 탄식하며 억울함은 속 깊숙이 묻어둔 채, 자신의 떳떳함을 시간이 증명하도록 맡길 뿐이다.

 

30, 휙 하고 지나갔다.

 

경쟁 치열한 이 시대, 혼돈의 시대, 사람들은 각자 열심히 자기 자리를 찾는다. 오직 돌출한 인재만이 군웅들을 호령하리라.

 

요 몇 년, 섭위평은 조용히 소탈하게 살아왔다. 심경 또한 편안해졌다. 각종 까다로운 일들을 지혜껏 처리하며, 혹은 단조로운 생활 속에서 낙을 찾으며 생활 속의 선물을 즐긴다.

 

요 몇 년, 섭위평은 그다지 순조롭지 않았다. 좌절을 겪었고, 실의에 분쟁에 분노에 고통 그리고 방황도 있었다. 이런 일체는 과거가 되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향해 오는 순간 웃는 얼굴엔 애한이 서렸고, 생사를 넘어섰다.

 

섭위평이 세계에 남긴 것과,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는 뒷모습이, 경의를 자아낸다.

 

 

 

 

作者 소개

 

南京의 저명 언론인, 기획자, 작가.

다수 언론사 주임/편집인 역임, 다수 다큐멘타리 저서 저술. 총 집필 분량 500여 만 글자.

문예/오락 부문, 중국10記者 경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