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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펌譯] 술 한 잔 들어간 이세돌, "내가 세계제일" (Lucifer,新浪體育) -120601


古力 :나는 감히 못 하는 말을 이세돌은 한다 / ‘제2의 봄’ 곧 오리라


출처 :路西法(
Lucifer루시퍼) 新浪體育(새물결체육) 2012年06月01日



신랑체육보도
6월1일, 『龍淵(룡연) -古力/이세돌 28번 격전 詳解(상해)』발간기념식 겸 기자회견이 북경(北京) 신강(新疆)빌딩에서 거행되었다. 국가바둑대 隊長(대장) 화학명(華學明), 저자인 고력/장대용(張大勇), 그리고 각계 언론 및 중국문련(文聯)출판사 등이 이 기자회견에 참가하였다. 고력이 기자들의 공동인터뷰에 응했다.

(譯註;‘중국文聯’-‘중국문학예술계연합회’의 약칭)

  


 

記者 :이세돌과의 交遊(교유)를 돌이켜본다면?

古力 :이 얘기는 말하자면 좀 길다. 이세돌이 유명해지던 당시에 나의 수준은 좀 떨어졌다. 이세돌과 이창호가 LG배 우승을 다투던 때가 2001년, 그는 세계대회준우승을 했다. 당시에 나는, 같은 나이로서 출발선上에서 졌다(
출발이 뒤졌다)고 생각했다.

2004년 이세돌과 처음 두게 되었을 당시에, 그는 세계대회 우승을 이미 몇 개씩이나 거머쥔 상태였다. 그런데 당시에 甲조리그에서였는데, 이세돌은 갓 甲조리그 출전이라, 익숙하지 못했고, 그 결과 나에게 패배했다. 듣기로 그는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갑조리그에서 실력발휘를 못해서였는지 아니면 동년배에게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譯註 ;이 판, 對고력戰은 갑조리그 세 번째 판이었고, 이 판을 짐으로써 이세돌은 시작바람에 3連敗(연패)를 당하게 된다. 이 해 2004년 갑조리그 통산 성적은 3승4패)

2004년 삼성배 준결승, 그 당시 중국의 전체적인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고, 시합 전에 화(華)선생님께서 특별히 응원대회를 열어주셨다. 결과는 모두들 알다시피 1:2로 내가 졌다. 패배 확정 후 나는 두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 나온 첫마디가 이랬다:“그는 확실히 나보다 위다(比我高).”나는 상당히 자신있어하는 사람인데, 그 시합은 말하자면 나에게 크나큰 타격이었다. 어쨌거나, 그때부터 우리들 마음속에서는 경쟁이라는 심리가 싹트기 시작했다.

나는 05년 LG배 준결승에서 그를 격파했고, 그때부터 나는, 내 수준이 그에게 근접했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당시 우린 이미 꽤 친숙한 사이가 된 상태였는데, 밤에 술을 마시다 누군가가 이세돌에게 , 누가 세계제일인가? 하고 물었다. 이세돌의 대답:이창호 제일, 나 제3, 고력 제4. 그게 두 兩(냥) 먹었을 때였는데, 한 斤(근) 정도 마실 무렵이 되자, 이세돌 () 왈 :이창호 (요샌) 영 아냐, 제2, 내가 제일, 고력 제3.
(
譯註 ;2兩=100그램, 1斤=500그램)

기자 :이세돌의 주량은 어떠한가?

古力 :이세돌의 술마시기는 돌격형으로서, 시원시원하다. 단, 將軍(장군)을 맡기에는 적합지 않고, 선봉이 딱이다. 단순히 주량만 놓고 말한다면 아마 그가 나보다 좀 나을 듯하다.

기자 :이세돌은 세계제일 그 얘기를 나중에 기억하던가?

古力 :내 생각에 그는 인터뷰할 때면 아마도 선택적 망각이 가능한 듯하다. 2005년 무렵에 이세돌의 기세는 줄곧 맹렬했는데, 棋士라면 누구나 세계제일이 되고픈 마음이 있다. 그런데 작년(2011)에 그는 사혁(謝赫)에 대한 승률이 40%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아마도 얼마간 겸손해졌다. (譯註 ;‘선택적 망각’이란 심리학적 용어인 ‘선택적 기억상실’과 같다고 보면 된다. 고력은 ^^ 하며 저 단어를 들먹였을 것이고, 순간 장내에도 웃음이 터졌을 것이다. 그리고, 위 네 개 문장의 문맥이 부드럽지 못하고 어색하긴 한데, 번역자가 보기엔 고력의 말뜻은, ‘이세돌이 겸손해짐으로서, 예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상실‘ 해버렸다’는 정도의 반농담반진담 같다.) 요 몇 년 이세돌의 변화는 매우 뚜렷한데, 이전에 바둑은 매우 박력이 있었고, 현재는 더욱 원숙해지는 추세이다. 나의 棋風(기풍) 또한 많이 鎭重(진중)해졌다.

기자 :이세돌의 성격에 어떤 점이 널 끌어당기나?

古力 :이세돌의 그런 오만함은, 무슨 말이냐면, 아마도 나는 내심의 그런 생각을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데, 그는 능히 입 밖에 낸다, 그런 점을 나는 좋아한다. 아마도 국가와 개인의 성격이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근데 지금의 이세돌은 처세술이 많이 좋아져서, 마치 小華老()처럼 말한다. (이세돌의 이런 변화를 보라) 우리는 설익은(미숙한 젊은) 시절은 지났다.

(羊城晩報양성석간)국가바둑팀에서 화학명(華學明),양휘(楊暉),풍운(豊蕓),장선(張璇) 등이 예전에 ‘四朶金花’라고 불리었다.(사타금화;네송이귀중한꽃) 이들 넷 중에 화학명이 가장 큰 ‘花’라(나이 많은 꽃이라), 때문에 이후에 젊은 棋士들이 그녀를 친근하게 ‘小華老(소화로)’라 불렀다.(華=花, 같은 발음) 앞에 ‘小’자를 붙인 주된 이유는 ‘華老’(華以剛화이강)와의 구분을 위해서였다. 하물며 우리 중국인들 전통 관습에, ‘小華’는 그녀가 아직도 젊다는 의미가 아닌가?
-2002.05.18 

  

기자 :너의 棋風(기풍) 또한 변했나?

古力 :날카로움은 떨어졌지만 사실 전체적 실력은 향상되었다. 현재의 어린 棋士들과 맞섰을 때, 우리는 경험上 우세 말고는, 다른 모든 부문에서 사실 열세이다.

기자 :이후에 인터넷 연습바둑을 둘 것인가?

古力 :인터넷연습은 어린 棋士들 성장의 지름길이다. 바둑과 인터넷은 천생연분인데, 우리 세대는 정보가 부족하다. 현재의 어린 棋士들, 95後(후) 棋士들은, 웹사이트에서 많이 단련한다. 나는 평소 컴퓨터를 오래 보게 되면 감각이 둔해진다, 바둑을 두면 축머리 뭐 이런 것에서 한줄을 잘못 보는 일이 다반사다.

기자 :이세돌과 10초 칠번기, 자신 있는가?

古力 :좋은 승부겠지. 근데 사람들이 둘러싸고 구경한다면, (내가) 위험하다고 본다, (왜냐 하면) 나의 심리적 資質(자질)은 좀 떨어지는 듯하다. 근데 만약 한국에서 둔다면, 아마도 결과는 정반대일 수 있다.

기자 ;최근에 받은 타격이 큰가?

古力 :2010년부터 현재까지 사람들은 아마도 내 컨디션이 떨어졌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중국바둑의 전반적 수준이 올라온 것이다. 나의 절정기, 혹은 당신들이 말하는 ‘제2의봄’은 곧 올 것이다.

기자 :이세돌과의 바둑 중에 인상적인 몇 판을 든다면?

古力 :재작년 삼성배 8강전이 매우 멋졌다, 보아도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다만 후반에 나의 실수가 좀 있었다. 가장 인상 깊은 판은 2009년 LG배 2국이다. 한국 매체들이 어쨌든간에 ‘4000년전쟁’이라 칭했고, 또한 시합 전에 모두들 상당히 비관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가장 기뻤던 것은 05년 LG배에서 이세돌에게 이긴 그때였다. 왜냐하면 그날, 10월19일이 바로 어머니의 50세 생신이었기 때문이다.


路西法(
Lucifer루시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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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淵劍(룡연검) :七星龍淵劍(칠성룡연검). 중국 春秋 시대 명검. 구야자(歐冶子-越나라 사람)와 간장(干將-吳나라 사람)이 협력하여 鑄造(주조).

...검을 다 만든 후에 내려다보니, 마치 높은 산에 올라 深淵(심연)을 내려다보듯이, 아련하며 그윽한 것이 마치 거대한 룡이 또아리를 틀고 누운 듯하여, 이름을 룡연(룡연)이라 했다. -百度백과

한편, 『吳越春秋(오월춘추)』에는, ‘초나라 사람 오자서(伍子胥)가 초나라 병사를 피하여 오나라로 도망칠 때, 어떤 漁翁(어옹)이 長江(장강)을 건네주었고, 오자서는 감사의 뜻으로 집안 三代를 전해온 검을 건네며 비밀 준수를 당부하였고, 이에 모욕을 느낀 어옹이 건네받은 그 검으로 목을 베어 자결하였다. 그 검이 바로 룡연검이다.’는 약간 신빙성이 떨어지는 記述(기술)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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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환李環 at 弈城바둑성)
...책
이름 龍淵,중국 고대 十大명검 중의 하나, 많은 이름을 떠올렸는데, 古-李 두 사람 간의 바둑이 매우 좋은 材質(재질)로서, 천하에 唯一無二(유일무이)라, 마치 검을 鑄造(주조)하는 것처럼, 매우 뛰어난 검을 만들 수 있다. 다음번에 나올 책의 이름은 赤霄(적소), 漢高祖(한고조) 유방(劉邦)이 뱀을 베고 의거를 일으킨 바로 그 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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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出深淵 重劍无鋒(룡출심연 중검무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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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頑石 번역, at 옛 이세돌홈피)

- 이세돌의 눈물 -

2004년 처음 중국 갑대회에 참가한 이세돌 9단, 구리 7단과의 대국 전 진한 커피를 연이어 두잔 마셨다.

통역은 이세돌이 처음 안순에 온데다 긴장해서 잠을 잘 자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세돌은 한국 기사들의 명예를 대표해 이번 대회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세돌은 대국에서 완패했고, 대국이 끝난 후 구리와 오랜시간 복기를 한 후 연구실에서 아마추어 기사와도 복기를 했는데, 복기를 한다기보다는 고통스러운 반성을 하는 것 같았다.

왕레이 8단이 연구실에서 구리와 다시 복기를 하고 있는데 어느새 이세돌이 뒤에 서있더라는 것이다. 이건 약과다.

만찬 전에 이세돌은 바둑판을 찾아와서 혼자서 다시 복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복기를 하다가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왕레이 등은 너무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한참을 달래서야 이세돌과 밥을 먹으러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세돌의 기분은 계속 좋지 않아 보였다. 안순에서 베이징으로 와서 이세돌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5일이나 머물렀는데, 이 5일 동안 방에 틀어박혀 바둑만 놓았다.

5일 후 후야오위 7단과의 경기 전 이세돌은 중국 팀 단장에게 정중하게 "안심하세요. 많이 좋아졌어요."라고 말했고, 이 대국에서 승리했다.

이긴 후에도 이세돌은 특별히 기쁜 표정은 보이지 않고 후야오위와 장시간 복기를 했다.

그러고 나서야 이세돌은 평소의 진솔하고 귀여운 웃음을 보여주었다.

-頑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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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과의 관계를 놓고 보았을 때, 아니 그 범위를 넘어선다 해도, 요 근래에 고력에게 가장 뼈아픈 판은 작년 BC배 결승 5번기 제3국이 아닌가 싶다. 왜 그렇게 보게 되었나면, 그 판 자체로 5번기 승부의 分水嶺(분수령)이었는 데다가, 그 판을 지는 과정이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그 판은, 소위 '病入膏肓(병입고황), 화타편작이 와도‘치료’가 곤란할 정도로 '병세'가 깊었다 하겠는데(이세돌이 초장에 꼬여서 돌들이 걸레조각처럼 흩어졌고, 이 걸레들을 수습하려 판 내내 고생했다), 종반에 고력이가 결정타를 날린답시고 상대 집에 끝내기용 수를 내러 갔고, 맛이 매우 고약해보이던 그곳에서 수는 안 나고 오히려 두집을 손해만 봤다. 그러고 결과는 고약하게도 딱 반집이었으니, 하이고오~, '바로 이거씨 결정타요' 하고 달려가서 원펀치를 멕였는데, 오히려 시체에 숨을 불어 벌떡 일으켜준 격 아니더냐, 거 참, 화타편작이 와도 못 살린다는데 왜 니가 사서 보살질이나고, 나무관셈~.., 이렇게 눈물 나게 지고, 이 패배가 결국 빌미가 되어 5번기를 세돌에게 넘겨줬으니, 고력에게 어찌 통탄할 한판이 아닐 소냐. 고력이가 04년 삼성배 준결승 3번기를 지고 ‘확실히 그가 나보다 위다’, 05년 LG배 준결승을 이기고 ‘가장 기뻤다’, ‘이제 그에게 근접했다’, 09년 초 LG배 결승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11년 BC배를 두고 이번 출판기념식에서 한 말이,‘그 대결은 아마 내 인생의 전환점이다, 왜냐면 그 전 나의 세계대회 결승 승률은 백퍼센트였는데, 그 대결에서 不敗金身(불패금신)이 平生적수에 의해 깨뜨려진 이후로, 작년말에 한국 원성진에게 또 패배하여, 현재의 컨디션 하강을 불러왔다.(-리환李環)’고 말한다. 그래도 고력은 이 회고에 덧붙여 특유의 자신감을 보이며, 나의 지금 이런 말은 나의 士氣振作(사기진작)을 위해서다, 라고 하긴 했다, 어떻든 간에 그에게 극도로 뼈아픈 기억임은 두 말 하면 잔소리라.   
  
   -맹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