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바둑

19703333 [펌譯]「Emanuel Lasker 박사와 바둑」(Bruno Rüger 作)

 

「엠마뉴엘 라스커(Emanuel Lasker) 박사와 바둑1」(Bruno Rüger 作)


Tom.com에 09-12-31 16:34:04 게재  






譯註;독일어=>네덜란드어=>영어=>중국어=>한국어
근데, 저 빨간색 부분을 옮긴, '즈질 번역자'가 고생은 젤로 심허게 했다는,
그니까 다 읽구 추천 한 방씩 쌔려야겠죠잉?..



중국인 게재자
多九公의 설명 :인생 여정 최후 몇 년에 브루노 루거(Bruno Rüger 1886—1972)는 다섯 편의 바둑 관련 회고문을 써서, 1965~1972년간에 각각 같은 혹은 다른 잡지에 발표했다. 이 편 글은 그중의 한 편 혹은 일부분이다.


Rüger는 유럽 작가 중 바둑 관련 글을 가장 많이 썼다. 그의 作風작풍은 독특한데, 익살스러운 재미가 있으며 그 독창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Rüger의 원문은 독일어로 써졌는데, 그것의 네덜란드어로의 번역문이 1995년에 네덜란드의 바둑 잡지에 실렸다. 2000년 가을에 AGA(미국 바둑 협회)를 주관하는 협회장 John Goon이 이걸 보고는 Barthold Lichtenbelt를 찾아가 영어로 重譯중역케 했고, John Kessenich가 校閱교열을 보았다. 이후 AGA 會報회보에 발표하였다.


나는 2001년 여름에 John Goon으로부터 英譯영역 원고를 얻었고 당시 일부분을 번역하여 공개하였다. 2005년 원고를 재차 끄집어내었고, 다만 번역완료 후 줄곧 보관 중이었다. 번역문을 최근에 조금 더 손을 보아 웹 上 여러분들에게 올린다.


多九公


2009年12月30日





엠마뉴엘 라스커(Emanuel Lasker) 박사와 바둑1」(Bruno Rüger 作)


Bruno Rüger 作 :전쟁 때인 1918년, 나는 엠마뉴엘(Emanuel Lasker, 1868—1941) 박사로부터 바둑이 재미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 나는 Grez(譯註 ;Grez는 프랑스나 벨기에의 어느 地名일 가능성이 높으며 어쩌면 대학 이름일지도 모른다.)의 한 물리학 교수인 레오폴드(Leopold Pfaundler, 1839—1920) 선생과 통신 왕래를 수단 삼아 1908년 출판된 한 권 바둑 교재에 대한 토론 중이었다. 나는 또한 그(譯註 ;Leopold)가 1909년에 바둑 잡지 하나를 출판하였다는 얘기도 들었다. [注1 -「獨語독어바둑誌」(Deutsche Go-Zeitung]
그렇지만, 정기구독자가 적어서 이 잡지는 발행 10회를 넘지 못하고 폐간되었다. 레오폴드(Leopold) 선생은 1년 분 잡지를 나에게 보내주었는데, 나는 이 소포를 기다리느라 눈이 빠질 지경이었다. 바둑 교재를 제외하고는 바둑 자료를 얻는 수단이라곤 이것이 사실상, 나의 첫 방도였다. 그리고, 잡지의 독자 주소란에서 엠마뉴엘 라스커 박사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2년 후, 산타로부터 책 「100개 기적」을 얻었다. 책에는 많은 근사한 내용 외에, 체스에 관한 章 하나도 있었는데, 출판자는 세계 챔피언에게 문제 몇 개를 낸다. [注2 -엠마뉴엘 라스커는 당시에 체스 세계챔피언이었다.]

그 중 하나:‘인간 지혜의 총명함 정도를 측정하는 수단으로서의 모든 선결 조건을, 체스가 만족하였을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혹 미래에, 규칙이 더욱 정밀 명확하며 또한 더 美적인 게임이 체스 자리를 대신할까요?]

라스커는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드는 대답을 하였다:‘나는 체스가 궁극의 盤上반상 게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나 자신은 바둑의 전망을 밝게 본다.]


라스커 박사의 결론은, 그가 이미 바둑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하였음을 드러낸다. 1920년 내가 재차 「독일어 바둑 잡지」를 창간하였을 때 라스커는 또 정기구독자가 되었다. 시간만 있다면 이런 중량급 棋士와 한판 대국을 하게 되기를 나는 진심으로 희망하였다.

드레스덴(Dresden)에는 나의 추종자 겸 초보자들 소집단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들 나에게 몇점을 깔아야 했다. 그때 당시 나는 드레스덴 체스 구락부의 왕성한 활동가여서, 그 長(譯註 ;위에서 AGA 이야기에서도 나왔지만 중국어 원문은 모두‘秘書’로 지칭, 협회든 구락부든 간에 어떤 한 단체의 長이나 총무로 짐작) 직무도 맡고 있었다.


라스커에게 장차 드레스덴으로 와서 무한도전(譯註 ;원문은 車輪戰차륜전:여러 사람이 번갈아 한 사람의 강자에게 끊임없이 도전하는 형식의 승부. 여기서는 체스 차륜전. 앞에서도 나왔지만 라스커는 체스 세계챔피언.)을 벌이자고 요청하는 일에, 내가 일처리와 그와의 서신 교환을 맡았다. 생각 하나가 번쩍 떠올랐다. 무한도전 이전이든 이후든 특급 大사부에게, 나와 바둑 한판을 두자고 청한다면? 그런데 얼마간 대국료를 주어야겠지? 이리저리 여러 번 생각 끝에 내 스스로에게 말했다.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이런 기회는 결코 다시는 가능하지 않아.’나는 그에게 20마르크의 대국료를 보냈다. 이런 사치스러운 지출이라니, 이건 나의 첫 파천황破天荒이야. 라스커의 즉답은 없었다.


어느덧 일요일이 되어  무한도전을 하오에 시작하기로 정해졌다. 내가 戰場전장에 가서 준비를 위한 정리를 할 필요가 없었기에 나는 오전에 집 지하실에서 마무리 못한 雜事잡사에 바빴다. 내가 지저분한 두 손으로 석탄 한 통을 들고 계단을 올라오는 순간, 문 앞에 선 신사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뒷모습으로 보아 라스커라는 느낌이 팍 들었다. 그가 내쪽으로 몸을 돌리니, 바로 라스커 본인이었다.
이런 식의 첫 만남에 나는 약간 당혹스러워졌고 내 아내는 더 곤란해했다. 아내가 낯선 남자 면전에서 부끄러워하는 여자는 아니었지만, 마침 통화팽창 직전의 어려운 시기라, 평소 딱 2인분만 제대로 준비해서 먹곤 했고 일요일 정찬正餐이 어려울 때가 가끔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오전 열한 시에 ‘통보 없는 손님’이 왔어! 게다가 名人이야!
다행히 솥에는 채소와 삶은 소고기 덩어리가 있었으나, 양이 적어서 나눠 먹을 정도는 못 되었다. 그래도 물이야 있어서 걸쭉한 탕에 부어넣기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당연히, 탕에 더 넣을 건 버터와 절인 고기뿐이었고 그래서 탕 표면에 기름 방물이 왕창 뜨게 되었다. 이런 한 끼 간단한 점심이 우리 손님으로 하여금 맛나게 먹게 하는구나, 이것이 우리가 받은 인상이었다.
후식이 나올 때까지 바둑을 두었다. 내가 처음 대하는 上手 앞에서 어찌 흥분되지 않으랴. 바둑은 곧바로 내가 분명히 조금은 아는 국면
(譯註 ;초반 정석 얘기인 듯)으로 흘러갔다. 그리하여 결국 내가 승리했다. 대사부께서 미소를 머금으며 20마르크를 내쪽으로 밀었다.


이후 몇 년에 라스커는 베를린 최강 棋士 동아리에 가입했고 그의 棋力은 빠르게 강해졌다. 나는 내가 주관하는 바둑 잡지에 매년 별도로 표명하기를, 장래에 휴가를 그곳으로 가겠다, 같은 생각인 棋友들이 있다면 그때에 거기 다 같이 모이도록 하자 고 제안하였다. 이리하여 거행된 제1회 바둑대회(Go Congress)가 1927년 Ilmenau(譯註 ;독일의 어느 지방. iLm~임.)대회였다.
대회에 참가한 사람 수는 한 눈으로도 쉽게 셀 수 있을 정도, 만약 한 다스를 단위로 친다면 딱 떨어지는 절반이었다.
(譯註 ;전체 6명?). 라스커도 그 중 일원이었으며, 우리들의 특급 대사부에게 단지 두세 점만 깔았다. [注3 -여기서의 ‘특급 大사부’는 Felix Dueball(1880—1970)을 말한다.]


하나 얘기꺼리가, Ilmenau 주민 한 사람이 우리가 바둑 두는 바람에 하마터면 돌아가실 뻔하였다. 어느 날 저녁에 우리는 어느 술집에서 바둑을 두었다. 곧 밤이 깊어졌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재미에 푹 빠져 바둑을 두고 있었다. 당일 근무인 현지의 사복경찰 하나가 우리를 찾아와 성가시게 했다. 우리가 미리 준비한 괜찮은 뇌물마저 그는 거절했고, 더욱이 패도佩刀로 위압하며 꽥꽥 소리를 질렀다. 결국, 우린 할 수 없이 법에 굴복해야 했다.


Dueball 선생이라고, 우리들 중 가장 환영받는 一人이, 자신이 묵는 곳으로 가서 계속 두자고 제의했다. 모두들 열렬히 호응했다. 여주인이 아직 취침 전이었고 필요한 것들을 내어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의자가 각양각색이었다. 기색을 보니 심야의 손님 초대가 달갑지 않은 듯했다.
그때 Dueball 선생이 부탁했다. “수고스럽지만 커피 한 주전자 끓여주실 수 있을까요?”그녀는 흥분하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지금요?”“이 밤에 커피를 마셔요?”그녀는 간신히 평정을 잃지 않긴 했지만, 까무라치기 거의 일보 직전이었다.Dueball 선생이 설명했다. 요 며~칠 여주인은 경악 상태라고, 그리고 Dueball 自身이 없을 때 여주인이 분명하게 선언했다더라, 앞으로 여름에는 영원히 바둑 두는 손님을 받지 않겠다 고. 그녀는 약속은 철저히 지킨다 고, 약속은 살아있다 고.


라스커는 Rathen 바둑 대회에 참가한다.[注4 -1930년의 일] 쉬는 짬에 그는 참가 기우들에게 농담 삼아 말했다.

“당신네들 알아요? 나랑 바둑 한판 두려고 Rüger 선생이 나에게 20마르크를 지불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이와 동시에, 독일 바둑 애호가 내에서의 라스커의 棋力 순위가 올라갔다.
현재 그는 더욱 열성적으로 바둑을 연구하여, 새로이 출판된 접바둑 관련 바둑서적에 대한 뛰어난 평론 하나를 썼다. 1931년에는 모든 盤上반상 게임 애호가들이 고개를 빼고 기다린 지 오래인 그의 신작 「대중 반상게임」을 출간했다. 책에서 그는 바둑이 심지어 체스보다 훨씬 細細세세 철저하다고 설파했다. 만약 온 세상이 그의 책을 기다리는 중이라면, 나는 온 세상보다 더 애타게 기다린다. 나 자신은 이미 얼마간의 小책자 및 전단지 및 상세한 바둑 입문서를 한데 뒤섞어 모아놓은 상태이다. 반상 게임 왕국의 大사부는 또 어떻게 그 임무를 완성할까?


마치 어제 일어난 일인 듯하다.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우편배달부로부터 책을 건네받는 순간, 공교롭게도 마누라가 소리쳤다.“목욕물 받아놨어욧!“ 당연히 나는 책 먼저 보고 싶었지만,.. 마누라는 나보고 목욕하라고 분부했다. 난 당연히 저항했다. 그래서 한바탕 가정비극이 일어났을까? 또는 역시나 항복이었을까?


돌연 기막힌 생각이 솟아올랐다. 나는 순순히 씻으러 갔다. 단, 목욕옷 안에다 책을 숨기고서. 가슴이 쿵덕쿵덕 두근거렸다. 나는 전에 없던 쾌속으로 옷을 벗었다. 그런데 욕조 안에서 책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책을 적실 수는 없지 않은가. 때문에 팔을 줄곧 높이 쳐들어야 했고, 자연히 불편했다. 더 중요한 건 욕실에서 아무 소리가 안 나서 마누라의 의심을 살 수 없다는 점이고, 그러니 자연히 소리를 내어야 하고! 그리하여, 그것이 결혼 이십 년 만의, 마누라를 속인 첫 시도였다. 나는 그런 몇 手를 남겨두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단지 몸은 최소한으로만 깨끗하도록 아주 간단히 씻었다. 나중에 들어온 마누라는 욕조 속의 물이 여태 그렇게나 깨끗한 걸 확인하고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나도 짐짓 놀라는 척하면서, 설명은 생략했다.






중국인 게재자 多九公의 보충설명


Rüger의 글 중 등장하는 Leopold, Lasker, Dueball은 모두 유럽바둑의 선구자로서 유명.


Leopold는 오스트리아인. 유럽바둑에 공헌 두 가지. 하나는 유럽 최초로 초급 바둑교재 편집. 둘은 독어바둑지 창간, Lasker와 Dueball은 졸작에서 약간 소개


근 30년 동안 유럽 바둑 최강자는 Dueball이라고. 유럽에는 바둑 자료가 부족, 더욱이 아시아 바둑 名家와의 접촉 곤란, 유럽 애호가의 바둑 공부는 암흑 속에서의 모색과 마찬가지, 그래서 기력 발전 더디다.


Dueball 본인 말로는 1907년 전후 바둑 학습 시작, 1930년 大倉喜七郞 七단 자금 지원으로 渡日하여 일본기원에서 공부 1년. 秀哉 명인에게 8점으로 불계승, 瀨越憲作 七단(당시)에게 7점으로 배우기도. 1931년 귀국 시에 일본기원 수여 아마 초단 증서를 받다. 바둑 입문 23년만에, 이걸 보고 유럽 애호가 왈, 자기학습은 역시나 매우 어렵군.


라스커와 Rüger 간의 기력은 차이가 크지 않고, Dueball과는 차이가 조금 더 있으리라. 처음에 라스커는 Dueball에게 두세 점. 1930년 Dueball 일본 가기 전에 라스커는 정선으로 1집 승. Dueball이 돌아왔을 때는 차이가 다시 벌어져.


Rüger은 1911년 Leopold의 바둑 교재로 바둑을 배웠다. 4인 중 가장 늦다. 그는 줄곧 독일 바둑 중심지인 베를린에서 비교적 먼 드레스덴에서 살아서, 강자와 붙어볼 기회가 적었다. 그래서 진보에 한계가 있었다.


사진은 라스커와 Dueball이 바둑 두는 장면. 1930년 3월 7일 Dueball 집에서 촬영. 왼쪽 대국자가 Lasker. 오른쪽 대국자가 Dueball. 중간 앉아 관전하는 이가 Kurt Rosenwald 박사, 뒤에 서서 보는 이가 Dueball의 큰 아들 Fritz Dueball, 미래의 유럽 바둑 챔피언.


위 Emanuel Lasker에 17살 연하이며, 그러나 Emanuel의 바둑 입문 스승이며, 또한 일본인 유학생에게 2년을 '동문수학'한, 그리고 나서 일본인 프로에게 9점 깔고 둘이 의논하여 '최선의 수'를 찾아 두었으나 참패한, 후에 미국 바둑협회를 창설한 Edward Lasker 이야기 및 두 사람의 바둑과 관련한 일화에 대한 글은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