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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영웅 오자서(伍子胥)


楚나라 사람 오자서(伍子胥)는 한바탕 치열하고 시원한 인생을 살은 인물이다. 3년 不蜚不鳴(불비불명)의 故事로 초장왕(楚莊王)에게 간한 사람이 그의 先祖이고, 충언을 받아들인 초장왕은 春秋5覇(춘추5패) 중의 하나가 되었다. 오자서의 집안은 초나라에서 대대로 名門이고 역대로 충신으로서 오자서의 아버지인 오사(伍奢)는 초평왕(楚平王) 시절에 벼슬이 태부(太傅) 즉, 太子의 스승이었다. 태자의 작은 스승(少傅소부)이 비무기(費无忌)란 자였는데, 태자를 모심에 정성을 다하지 않았다.

어느날, 초평왕이 비무기에게 진(秦)나라에 가서 태자의 부인을 청해오라고 시켰다. 비무기가 진나라로 가서 장래 태자빈이 될 진나라 공주를 보니 마침 천하의 절색이라, 미리 달려와 초평왕에게 고하고 그를 꼬드겨, 며느리 될 여인을 시아버지 될 자가 가로채게 만들었다.

비무기는 태자가 장래에 왕으로 등극한 후 닥쳐올 자신의 운명을 두려워하여 초평왕에게 태자를 讒訴(참소)하였다. 초평왕은 자신이 한 짓도 있고 비무기의 말도 그럴 듯한 지라, 먼저 태자의 사부 오사를 잡아 가둔 후, 변방에 내쳐져 있던 태자를 잡아들이려 하였다. 다행히 태자는 국외로 도망쳤다.

오사는 결국 죽게 되었는데, 오사에게 두 아들 오상(伍尙)과 오원(伍員=오자서)이 있음을 비무기와 초평왕이 알고 훗날의 화근을 뿌리째 뽑기 위하여 아버지 오사의 이름을 사칭하여 먼 곳에 있는 두 아들을 왕궁으로 불렀다.

가면 죽을 판국에서 큰 아들 오상은, ‘도망쳐서 훗날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는데 외면하고 목숨을 구한 아들이란 汚名(오명)을 얻을 뿐이다’며 ‘너는 능히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도망쳐라. 나는 아버지의 곁으로 가서 같이 죽겠다’

이리하여 아버지와 형은 죽고 오자서는 도망쳤다.

오자서는 태자가 있는 정(鄭)나라로 갔다. 그런데 태자는 그곳에서 일을 획책하다 정나라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오자서는 태자의 아들을 모시고 오(吳)나라로 넘어갔는데, 국경의 관문에서 지내던 하룻밤 사이에 눈썹과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오나라에 들어가서 피리를 불며 걸식을 하는 등 고생 끝에 오나라 公子인 광(光)의 사람인 피리(被離)의 눈에 띄어 드디어 오나라에 出仕(출사;벼슬길에 나아감)하게 된다.

한편 오나라의 왕위는 그 승계의 과정에 모순이 있었고 그 당사자인 公子광은 왕위를 뺏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오자서의 능력을 알아본 公子광은 은밀히 오자서를 포섭하게 되고, 오자서는 효자 자객 전저(專諸)를 公子광에게 천거한다. 이 무렵 초평왕이 죽는다. 오자서는 초평왕을 직접 죽이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 가슴을 치며 하루종일 울고 사흘밤낮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오자서는 智謀(지모)를 짜내어 자객 전저가 오나라 왕을 살해하고 公子광이 왕위를 강탈하여 오왕 합려(闔閭)로 등극하도록 성공시키고 그 제1공신이 된다. 그리고 병법의 대가 손무(孫武)를 천거하여 군사를 훈련시킨다.

마침내 오자서는 손무와 함께 정벌전쟁을 일으켜, 자신이 초나라에서 도망친 지 16년 만에 초나라의 수도를 함락한다. 초왕은 도망쳤고, 비무기는 이미 죗값을 받고 초나라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오자서는 이미 죽은 원수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체를 꺼내어 채찍으로 3백회 내려쳐 복수한다.

일찍이 오자서가 도망길에 오를 때 ‘반드시 초나라를 멸망시키겠다’고 맹세하였다. 오자서와 교분이 있던 신포서(申包胥)는 벗인 오자서의 도망을 묵인하면서, ‘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보존시키겠다’고 말한다.

이 신포서가 초나라 서울에서 도망쳐 산중에 있다가 사람을 시켜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 아들이 비록 그 부친의 원수를 갚는다고는 하나 그 정도가 너무 심하지 않는가? 나는 ‘사람이 많으면 일시적으로 하늘을 이길 수 있다고 하나 일단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사람을 물리칠 수가 있다’고 알고 있네! 지금 그대는 옛날 평왕의 신하로써 北面(북면)하여 받들었으면서 지금에 와서는 그 시신까지 욕보이니 어찌 이보다 더 天道(천도)에 어긋날 일을 행할 수 있단 말인가? ”

오자서가 신포서의 말에 대답하며 전하게 했다.

“ 나를 위하여 신포서에게 사죄하는 말을 전하라! ‘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머니(日暮途遠) 내가 어쩔 수 없이 일을 거꾸로 행하며 하늘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네!”

여기까지가 영웅 오자서의 삶 전반부이다. 옛사람들은 君臣간의 관계를 ‘철칙’으로 여겨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명분을 어길 수 없다 여긴 모양이다. 신포서가 天道 운운한 것을 보면 그들이 생각한 군신관계의 엄중함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인 나의 눈에는 오자서의 행위가 그 무슨 ‘天道에 어긋나는 행위’라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평왕의 죽음에 원통해하며 하루 내내 울고 사흘 밤낮을 뜬 눈으로 세웠던 오자서가 고작 시체에 3백대 매질을 한 것으로 분이 풀렸을까 그것이 더 안타까울 뿐이다.

사실 오자서의 이 ‘시체매질’은 그 진위에 의문이 있으며 이에 대해 일찍이 쟁론이 있다 한다. (이하 중국 百度백과) 즉,

하나, 시체매질 긍정說. 사마천의 史記 중 吳太伯世家(오태백세가)에 ‘오자서와 백비(伯嚭)가 시체에 3백대 매질을 하여 부친 살해에 대한 앙갚음을 했다’는 記述(기술)이 있고, 오자서列傳에 ‘평왕의 묘를 파서 그 시체를 꺼내어 매질 3백대를 친 후에 그쳤다’는 기술이 있다. 즉, 사마천이 그렇게 썼잖아 이런 주장이다.

하나, 무덤매질 긍정說, 呂氏春秋(여씨춘추) 등에 ‘무덤에 대고 매질 3백회를 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하나, 부정설, 春秋시대를 기록한 책 春秋 등은 그 시대를 기록한 가장 오래된 책이고 가장 권위 있는 책이다. 이 책들에는 시체매질에 대한 기술이 없다. 게다가 孔子는 오자서와 동시대의 인물인데, 공자는 亂臣賊子(난신적자)를 가장 용납하지 않을 인물이다. 오자서가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시체매질을 한 행위는 난신적자 행위 중에 가장 악독한 짓이라 할 것인데, 동시대 인물인 공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사람들은 시체매질說을 뒷사람들의 오자서에 대한 中傷(중상)이라 본다. 즉, 오자서의 복수 자체를 君臣이라는 名分에 어긋나는 행위로 보아 그에게 더 ‘악독’이라는 딱지를 붙이려 했고 그게 시체매질이라는 거짓 딱지를 굳이 붙인 이유이다, 이런 말이다. 나 원 참, 그럼 왕이 날 죽이면 불문곡직 네 하고 그냥 죽어야 하나. 아버지와 형이 죽임을 당했는데, 그게 王이라서 복수도 못하나.

어쨌거나 사람 간의 관계를 틀에 가두려는 유교적 명분론은 역사가 흐를수록 강화되었고 明末 淸初 사람인 풍몽룡((馮夢龍)이 기존의 역사책을 각색하여 역사소설인 列國誌(열국지)를 지으면서 오자서에게는 몇 개의 ‘딱지’가 더 붙게 되는데, 바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다음은 사마천의 史記와 풍몽룡 판 열국지를 비교하였을 때, 史記에는 없는 내용들이다.

얘기 처음으로 돌아가서, 오자서가 도망치는 순간에 그에게 아내가 있었다. 오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제 부인을 돌볼 수가 없게 되었소.”즉 父兄의 복수를 위해 도망쳐야 하는데 당신까지 데리고 다닐 수 없다는 얘기다. 부인 가(賈)씨는 조금도 원망 않고,“첩은 신경 쓰지 마시고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한마디 하고 방으로 들어가 목을 매어 죽었다. 오자서는 통곡하고 시체를 묻고 길을 떠났다. 이리하여 오자서 어깨에 非倫(비륜) 하나가 얹히게 되었다.

정나라로 갔다가 오나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초나라 군사의 추격을 받게 되는데, 어느 강변에서 거의 잡힐 위기에 처했다. 이때 어느 어부가 강을 건네주는데 오자서가 감사의 뜻으로 갖고 있던 寶劍(보검)을 주려고 하였으나 어부는 받지 않았다, 헤어질 때 오자서는 어부에게 초나라 병사에게 이 일을 발설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보검조차 거절한 어부인데,.. 어부는 모욕감에 마음속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배를 뒤집어 물에 빠져 자살한다. 이리하여 오자서의 어깨에 非倫 하나가 더 얹히게 된다.

오나라로 들어간 오자서는 배가 고파 구걸을 하게 되는데, 어느 물가에 빨래를 하던 처녀를 만나 밥을 얻을 수 있겠냐고 청한다. 이슥한 나이의 이 처녀는 남녀 간의 예의를 과감히 넘어 생면부지의 오자서에게 밥을 준다. 근데 밥 잘 먹고 헤어지는 순간에 또 오자서의 병이 도진다. “은혜에 감사하오며, 저는 망명객이니 다른 사람에게 절대 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여인은 오자서의 박절함을 탄식하며 돌을 껴안고 물에 빠져 죽는다. 이리하여 오자서의 어깨에 非倫 보따리가 또 하나 늘었다.

도대체 어부를 죽인 것도 모자라 멀쩡한 처녀 하나를 또 죽이기에 이르니, 어부와 처녀가 오자서가 말하지 말라 하면 말고 그런 말 안 하고 떠나면 말할 사람이더란 말인가. 오자서는 그럼, 아무리 복수에 눈이 어두워 이성이 마비됐기로서니, 실수로 이미 하나 죽게 만들었는데 똑같은 방법으로 또 죽이는 백치 짓을 한단 말인가.

오나라에서 오자서는 우연히 孝子(효자) 전저를 만나 의형제를 맺는다. 오자서는 결국 이 의동생을 公子광에게 바쳤음(소개)을 우린 이미 알고 있다. 후세 사람들 누구는 이를 두고 '오자서가 의동생을 바쳐 公子광에게 아첨했다'고 평했다. 그리고 전저가 자객 일을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효자’전저의 老母가 자살한다. 오자서의 어깨에 보따리가 하나 늘었다.

公子광이 王 합려가 되었으나 자객 전저에게 죽은 이전 왕의 아들 천하장사 경기(慶忌)가 나라 밖에서 힘을 기르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왕 합려는 오자서에게 ‘내가 음식을 먹어도 맛있는 줄을 모른다’며 또 한번의 ‘수고’를 부탁한다. 오자서는 전 왕의 아들까지 죽이는 데 대해 가책을 느끼고 거절하였으나 거듭된 합려의 요구에 결국 자객 요리(要離)를 추천한다.

요리는 거짓으로 합려에게 죄를 받아 팔 하나를 잘리고 온 가족이 몰살당하고 그 시체를 거리에서 불태우는 고육지계를 동원하여 경기에게 접근할 명분을 만들고, 경기는 이에 속아 넘어가 요리를 심복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하여 요리는 천하장사 경기를 암습하여 간단히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 목적을 위해서 自身은 그렇다 치고, 가족까지 해하는 수단을 동원하는 비정한 자객이 받아야 할 힐난은 또한 오자서의 몫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보따리가 하나 더 는다.

영웅 오자서의 운명은 그의 삶 후반부에 드러나게 되는데, 그의 운명은 그 스스로 뿌린 씨에 의해 결정된다. 그가 뿌린 씨란 간신 백비(伯嚭), 그리고 합려를 이어 오나라 왕이 되는 부차(夫差)이다. 백비는 오자서의 나라였던 초나라 사람으로 그 역시 간신 비무기의 해침을 당해 아버지를 잃고 오나라로 온다. 동병상련이라, 오자서는 그를 합려에게 추천하는데, 이전에 오자서를 公子광 시절의 합려에게 소개했던 ‘관상가’ 피리가 백비를 보고 이렇게 평한다.

“그 성격이 원래 탐욕스럽고 아첨을 잘하며 공은 혼자서 가로채고 사람을 가볍게 죽이니 가까이 지내면 안 될 것입니다. 만약 그를 중용했다가는 후에 공에게 필시 큰 화가 미칠 것입니다.”

그러나 오원은 피리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후세의 사람이 피리가 오원의 현명함을 알아보고 다시 백비의 사람됨을 갈파한 것은, 그가 진실로 귀신 같이 관상을 보았다고 논했다. 오원이 피리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은 어찌 하늘의 뜻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뒤의 말은 열국지 저자 풍몽룡의 평이다. 풍몽룡이 말하는 ‘하늘의 뜻’은 내게는 명백히 오자서를 두고 한 힐난이라 여겨진다. 운명이긴 하지만 즉, 자업자득이라는 것이다.

오나라는 훗날 월(越)나라와 생사를 건 다툼을 벌이게 되고 오자서의 삶 후반부는 그가 새롭게 충성한 對象(대상)인 오나라를 지켜내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합려의 아들 부차는 분명히 월나라를 멸망시킬 기회가 있었음에도 뇌물에 넘어간 백비의 꼬드김에 빠져 仁慈(인자)라는 허명만 좇아 월왕 구천(句踐)을 죽일 기회를 놓치고 만다. 이 과정에 오자서가 기회 있을 때마다 간해도 소용이 없었다.

부차에게 간하고 간하다 미움을 산 오자서는, 결국 부차에게 죽음을 당하고 오나라는 월나라에 멸망당하고 마는데, 이 허영심에 찬 부차라는 인물을 君主(군주)로 만든 인물이 바로 오자서였다. 합려가 후계자 문제로 고심할 때 바로 오자서가 합려에게 힘껏 간하여 부차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후계자 문제에 대한 언급은 史記에도 있다)

후세 사람들은 오자서의 '天道를 거스른 죄'를 이런 식으로 힐난했는데,

사람은 어차피 죽는다. 오자서가 살아간 인생은 비록 그의 말년이 불운하였다 하나 한바탕 통쾌하게 산 삶이었다. 아버지와 형이 왕에게 살해당하는 순간에 오자서의 운명은 결정되었고, 그는 주어진 운명이 규정한 삶을 살다 죽었다. 천지를 한순간 환하게 밝히고 스러지는 불꽃같은 삶이었다. 인간이 지닌 情, 감정, 복수라는 인간적 감정에 가장 충실한 삶이었다. 우리네 보통사람들은 능력이 못 미쳐서 그렇게 못함을 탄식할 뿐, 기회가 닿지 않아 고작 시체를 때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오자서의 운명을 탄식할 뿐, 이를 두고 그 누가 그를 비난하겠는가.

이 얘기의 시작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오사에게 하필 아들이 둘이라, 하나는 아버지와 함께하는 죽음을 택했고 하나는 복수를 위해 삶의 길을 택했다. 큰아들 오상의 효심을 그의 아버지가 아닌 이상 탓할 수는 없지만, 나약한 우리는 강인한 오원의 선택 쪽으로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기운다.

사마천은 오자서열전 말미에 오자서를 이렇게 평했다.

“사람에게 악랄한 짓을 하여 그로 인하여 맺힌 원한은 참으로 뿌리가 깊도다! 왕이라 한들 어찌 그 신하된 자에게 원한을 사면 안 되거늘 하물며 동렬의 사람들에게는 말해야 무엇하겠는가? 옛날 오자서가 그 부친 오사(伍奢)의 부름에 응하여 같이 죽었더라면 그것은 한낱 땅강아지나 개미에 불과했을 것이다. 小義(소의)를 버리고 커다란 치욕을 갚아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해졌다. 슬프도다! 오자서가 長江을 건널 때나 걸식을 하며 길을 갈 때나 어찌 잠시라도 초나라의 서울을 잊었겠는가? 그는 온갖 어려움을 참고 견뎌 결국은 功名(공명)을 이룰 수 있었으니 그와 같은 열혈장부가 아니었다면 그 누가 그와 같은 일을 이루어 낼 수 있었겠는가?”

사마천의 학문을 儒家(유가) 쪽이라 보아야겠지만, 사마천은 결코 儒家의 도덕 명분에 얽매인 인물은 아니었다.

‘小義를 버리고 커다란 치욕을 갚았다’참으로 통쾌하다.



(이글은 사마천의 史記 및 풍몽룡-列國誌 /양승국님 번역판을 기반으로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