譯註 ;중국 누리꾼 聽琴論劍[lookheart@sohu]이 2009.06.25 중국 인터넷 사이트 搜狐(수호) 內의 커뮤니티>논단>바둑살롱(club.sports.sohu.com)에 게재 ☜
여러 개의 섭위평 인터뷰 중에서 발췌하여 게재한 것으로 짐작.
반말체는 편의상 그렇게 한 것임.
섭위평 인터뷰 발췌文
A
기자 :저번에 여도(余姚)에서 중앙방송(CCTV) 제작물 '예술인생'을 찍을 적에 당신은 제작현장에서 잠이 들었다. 여파가 크다.
聶 :그 무슨 ‘잠보 家門’이니 뭐니 하고 매체들이 떠들었다. 이건 다 오락신문 연예신문들이 날 끌어다 지면을 메우려는 짓이다. 사람이 피곤하면 졸리고, 이건 매우 정상적 일 아닌가? 강인한 사람이나 견디지. 내가 자는 것엔 규칙이 있다. 피곤해야 잔다. 다 정상적 일이다.
기자 :당신은 블로그에서 그들을 비판했다.
내가, 중앙방송이 ‘아주 껍질째 벗긴다’, 인정머리 없다 고 썼다. 아침 9시에 녹화 예정이면 사람을 보내 재촉하는데, 새벽 너대여섯시부터 와서 부른다. 한 시간마다 한 번씩 부른다. 정말 미쳤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녹화에 참가하는 모든 귀빈들에게 그런다. 이런 짓은 참으로 못돼먹었다.
기자 :근데 당신만 잤다.
聶 :그들은 중앙방송에 밉보이기 싫어서 감히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난 이런 거가 눈꼴사납다. 만약에 중앙방송에 무슨 큰 일이 생겨 그들이 오히려 나한테 와서 아쉬운 소리 하면 난 오히려 그들에게 뭐라 한다. 그럼 그들도 아무 소리 못 한다.
기자 :보도에 의하면 6월 14일 「生活家배 바둑 쟁패戰」 항주 대회 시합 전 기자회견에서 당신은 또 잤다.
聶 :아니아니. 난 항주 대회에서 자지 않았다. 사실이 아니다.
기자 :인터넷에는 당신이 꾸벅꾸벅 조는 사진이 아직 있다. 보도에 의하면 누군가 헛기침 소리로 깨워놓았더니 ‘찻물이 채 식기도 전에’또 잤다더라.
聶 :헛소리. 난 늦지 않았다.(이상한 동문서답. ?? ;譯註) 이런 악독한 보도를 한 기자가 누군지 모르겠다. 내가 만약 안다면 최소, 최소 버럭 꾸짖어주겠다.
기자 :사진으로는 당신이 바둑 팀 대장 華學明(화학명) 옆에 앉아 있다.
聶 :여요(여요)도 항주에 있었나?(또 동문서답. 기자가 일부러 聶의 동문서답(습관)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건지.. ;譯註) 내가 정확히 모르거든. 하긴 내가 자고 싶었던 거라면 정말로 내가 잤을 수도 있겠지.
기자 :당신 블로그에 남겨진 소리를 보았나? 누군가 당신을 비평하기를, 당신에게 魏晋名士(위진명사) 면모가 엿보인다던데.
譯註 ;魏晋이란 중국 삼국시대에 뒤이은 「위진남북조시대」의 그 魏晋을 말한다. 중국 現代 서적인 宁稼雨(령가우) 著 「魏晋名士風流」는 ‘魏晋名士는 중국 역사 上 공전절후의, 독특한 문화현상이었다. 魏晋名士는 예법을 멸시하고 자유분방하여 속박을 싫어하며 정신적 자유를 강조하여, 매력적인 개성을 과시하였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竹林七賢이 그 대표 격인데, 네이버 백과는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죽림칠현 [竹林七賢]
요약
중국 위(魏)·진(晉)의 정권교체기에 부패한 정치권력에는 등을 돌리고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선비.
본문
중국 위나라 말기 실세였던 사마씨 일족들이 국정을 장악하고 전횡을 일삼자 이에 등을 돌리고 老莊의 무위자연 사상을 심취했던 지식인들을 일컫는다. 당시 사회를 풍자하고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하였으며 정치와는 무관하였다. 그중 유명한 7인을 죽림칠현으로 부르는데 그들의 이름은 완적(阮籍)·혜강(嵆康)·산도(山濤)·향수(向秀)·유영(劉伶)·완함(阮咸)·왕융(王戎) 이다. 그들은 개인주의적·무정부주의적인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신봉하여 지배권력이 강요하는 유가적 질서나 형식적 예교(禮敎)를 조소하고 그 위선을 폭로하기 위하여 상식에 벗어난 언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하 생략)
聶 :흠 그거 재미있군. 근데 난 그런 걸 들은 적이 없는데? 아, 워쩌라고? 내가 그런 친구들과 같이 놀면 수준 떨어진다.
B 이세돌의 휴직은 전장이탈, 天理거역
기자 :최근에 이세돌이 휴직을 신청하여 한국 기전 참가를 1년 반 동안 포기했다. 이 일을 어케 보는지?
聶 :이세돌의 휴직은 분명한 큰 실수이다. 大局을 고려치 않고 남들은 안중에 없고, 이래서는 안 된다. 프로기사는 곧 戰士다. 이세돌이 그렇게 하는 것은 전장이탈이라 본다. 이런 일이 만약 중국에서 발생했다면 당연히 그는 한평생 출전이 금지되어야 한다.
기자 :마효춘이 블로그에서 이 일을 평가하여 말하기를, 棋士가 각종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권리냐 아니냐 여부에 따라 징계 여부가 결정된다고 하였다. 당신들 둘의 관점이 백팔십도 다른데 당신은 마효춘의 관점을 어떻게 보는지?
聶 :정말 마효춘의 관점인지 모르겠다. 만약 그의 관점이 그렇다면, 그건 완전한 착각이라고 본다. 棋士는 자기의 권리와 의무가 있지만 프로기사에게 대회 참가는 의무이지 권리가 아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기자 :평소에도 의무를 말하길 좋아하는가?
聶 :현재의 棋士들은, 80년대生 棋士이든 90년대生 棋士이든 맨날 자기들 권리만 강조한다. 맨날 ‘권리’ 두 자를 입에 걸고선 온갖 곳에서 영문도 모르고 영향을 받는다. 이건 교육의 비애다. 나란 사람을 젤 짜증나게 하는 것이 바로 권리이다. 실제로 나는 내가 무슨무슨 권리를 가졌다 생각해본 적 없다. 중국바둑의 발전시키는 것이 나의 의무였고 과거 중일대항전에서 일본을 격파한 것 또한 의무였다.
기자 :중국바둑계에 이전에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
聶 :당년에 우리들 중에 錢宇平(전우평)이 출전을 거부(注 : 1991년 富士通(후지쯔)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 결승 직전에 병 때문에 퇴출. 조치훈 九단에게 不戰 우승을 허용했다. 섭위평은 당시 중국 바둑隊 총감독이었다.)고 그 때문에 평생 출전금지를 당했다. 당시 우리들은 전우평과 얘기하기를 ‘니가 시합에 안 나가면 이후에도 나오지 마라’라고 했다. 전우평의 행위와 이세돌의 행위, 둘 모두 프로기사로서 있을 수 없는 행위이다. 天理거역이다.
기자 :그렇지만 당신도 예전에 시합을 거부한 적이 있는데.(注 : 섭위평은 이전에 시합 규칙에 대한 불만 문제로 제3회 응씨배 및 제4회 중국프로기사 남녀혼성 바둑대회 참가를 거부한 적이 있다.)
聶 :(화를 내며, 그러나 목소리는 높이지 않고) 시합 거부? 누가? 난 시합 거부한 적 없다. 절대로 없다. 뭣이 시합 거부인가? 시합 거부 意思란 거를 니는 제대로 알지도 못 하고선. 국어부터 제대로 배워라. 당시 나의 상황과 이세돌 일은 완전 다르다.
기자 :평소에 常昊(상호) 古力(고력) 얘네들을 어떻게 가르치나?
聶 :그들에게 늘 말한다. 좋은 바둑을 두려면 좋은 사람이 되라고. 몇 년 전에 그들을 데리고 연안(延安)에 간 적이 있다. 우리네 棋院에서는 그 어떤 애국주의 교육이 없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애국 의식을) 가르친다. 현재 延安에 가면 그들이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볼 수 있다.
기자 :당신의 애국주의를 두고 狹隘(협애)라 하는 사람도 있는데.
聶 :내가 애국했나? 애국해야 함은 상식이 아닌가. 나의 애국주의가 협애하다? 애국에 무슨 놈의 협애 非협애의 구분이 있다던가?
기자 :이번에 당신이 참가한 生活家배에서 王汝南(왕여남)은 성적 順으로, 당신을 4人 중에 맨 뒤에 놓았다.
聶 :아무 문제가 없다. 그의 방식에 동의한다. 다른 모든 항목과 마찬가지로 바둑 또한 長江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 젊은 棋士들이 내 앞에 놓이는 데에 난 어떤 억하심정도 없다. 내 나이라면 열 몇 살짜리 아이에게도 질 수 있다. 그렇다고 내가 걔보다 못하다는 증명이 될 순 없다.
기자 :그런데 마효춘은 이 명단에 이의가 있었다. 그는 유빈이 ‘棋王’의 자격이 없다고 본다. (生活家배는 역대 가장 뛰어난 棋士 4人을 棋王이라 칭하며 초청해 벌인 대회였는데, 그 네 사람은 聶, 馬, 유빈, 고력이었다. 당시 마효춘은, ‘유빈이 여기 왜 끼냐’그런 말을 했었다. ;譯註)
聶 :그 얘기는 나도 들었다. 그는 늘 시대에 안 어울리는 소리를 해서는 단결을 깨곤 한다. 나는, 사회가 조화롭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마찰을 일어나지 말았으면 한다. 화합을 깨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긴 하다, 그러나 결국 그런 소리는 소수이다. 일부 부정적인 측면을 매체들이 보도를 적게 했으면 좋겠다.
C 나는 엄한 선생, 古力과 常昊는 相互보완되어야
기자 :중국바둑 현재 상황을 어떻게 보는지?
聶 :바둑을 배우는 사람 수, 바둑을 두는 사람 수는 늘었을 수 있다. 그러나 바둑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크게 못해졌다. 지난 세기 팔, 구십 년대에 바둑열기가 대단했는데, 국가가 중화민족의 진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당시 바둑의 영향력은 체육의 범위를 넘어섰었다.
기자 :현재 바둑 대회가 갈수록 많아진다.
聶 :내가 젊었을 당시에 내가 보기에, 바둑을 패배한다 하는 건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현재는 다르다. 시합이 많고 거의 하 루 걸러 한판을 두어야 한다. 그런 바둑이 좋을 바둑일 될 리가 없고, 다만 신체 건강한 젊은 기사들에게는 유리한 점이 있다. 현재 사십 몇 살이 삼십 몇 살을 못 당하고 삼십 몇 살이 이십 몇 살을 못 당하고 이십 몇 상이 십 몇 살을 못 당한다.
기자 :古力의 인기가 매우 높은 듯하다.
聶 :듣자니 중경 市가 「都市 이미지 大使」인가 뭔가를 뽑는다고 하는데, 고력이 세계대회 우승을 6개를 했는데도 사람들이 微動(미동)도 않는다. 듣자니 완전 無名인 사람조차 득표가 고력보다 몇 만 표나 많다더라. 세계대회 몇 개 우승이 무슨 소용이 되었나? 당신이 함 말해봐라.
기자 :당신은 1988년에 ‘棋聖’칭호를 받았다. 현재라면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일인데.
聶 :당시에 무엇 때문에 이 ‘棋聖’이라는 칭호를 나에게 주었는지 그 정확한 내막까지는 모른다. 나는 盤古(반고)가 天地를 연 이래 국가정부가 수여한 첫 ‘聖’이었다. 거기에 무슨 원인이 있는지 나는 지금까지도 모른다. 당신은 나더러 당신의 성적이 좋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성적이) ‘聖人’급까지는 아니었다. 결국 거 참 이상한 일이라는 얘기인데, 아마도 바둑이라는 종목 때문이 아니었을까.
기자 :孔子는 성인이라 불리었다. 당시에 당신은 孔子가 도달한 그런 高度에 이르렀다는 느낌이었나?
聶 :공자님(孔子를 聶은 ‘孔夫子’라고 경칭을 썼다. ;譯註)의 ‘聖’은 일반 백성들이 붙인 것이고 내 경우는 국가가 붙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로서는 일반백성들이 부여한 영예를 더 중시한다. 앞으로는 중국 정부가 ‘聖 ’을 수여할 일은 없을 것이다. 설사 劉翔(류상 -운동 스타. 아마 100미터 허들 세게 선수권자 ;譯註)이나 姚明(요명-농구 스타 ;譯註) 이런 운동선수의 성적이 이전의 나만큼 뛰어나더라도 ‘聖’이라는 칭호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기자 :상호나 고력 모두 당신의 제자이다. 그들이 어느 정도 高度에까지 달하리라고 보는가?
聶 :상호, 고력은 나를 무서워하는 정도를 넘어 매우 무서워한다. 내가 엄한 스승이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 두 사람에게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 내가 늘 그들에게, 니네들의 기풍은 相互 보완되면 더 좋아진다, 상호보완만 된다면 누구라도 중국 바둑의 영도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상호의 기풍은 지나치게 부드럽고 고력은 너무 강경하다. 게다가 그들은 각자의 길로 너무 멀리 가버렸다. 고력이 현재 세계대회 우승을 제법 자주 하여 주목을 많이 받는 처지이지만, 영도자를 논하자면 함량에 있어 약간 모자라는 부분이 있다.
기자 :어떤 재능이 중국바둑을 더욱 발전시킬까?
聶 :바둑을 초등학교 교과목에 넣자고 내가 옛날부터 건의했다. 재차 말하지만 어디메 학교가 바둑을 가르치면 내가 가서 그들에게 힘을 보태겠다. 본래부터 모든 초등학교에 바둑 과목이 있어야 했다. 고대부터 ‘琴’‘棋’‘書’‘畵’를 중시했는데 현대에 다른 세 가지는 초등학교 교실에 들어갔다. 당신도 어릴 때 분명히 음악, 서예, 미술을 배웠을 거다. 그런데 바둑만 안 배웠을 거다. 바둑은 게다가 두뇌 개발에 분명한 이점이 있어 다른 세 가지가 갖지 못한 장점이 있다. 국가가 이러한 점을 나서서 알려야 하는데 불구, 현재 우리 초등학교 교육은 그렇지 못하다. 요 몇 년 나는 이 일에 매달렸다. 중국바둑 발전에 기여함은 내 평생의 의무이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