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바둑

100206 [펌譯] 長江사건이 내 인생을 바꿔버렸다 -芮乃偉 (南國都市報)

 

三峽사건으로 인생 달라져, 芮乃偉 중국 대표로 아시안게임 나가길 갈망


출처 :南國都市報  2010.02.06 sports.sohu.com으로 轉載




譯註 :三峽사건=長江사건
  

예내위가 특별히 말 주변이 있는 사람이 아니며, 게다가 그녀와 남편 강주구가 겪은 특수한 경력 때문인지 그녀는 기자에게 어떤 위화감이 있는 듯했다. 다행인 점은 인터뷰 시작 때의 이런 불신감이, 얘기를 한참동안 해나가는 과정에서 조금씩 사라졌다는 것, 마지막에는 심지어 그녀 자기 입으로 사투리 몇 마디를 뱉고는 즐겁게 웃기까지 했다. 마음이 매우 자연스럽고 가벼워 보였다.


예내위 광주(廣州)에서의 요 며칠은 흐린 날이 많았고 맑은 날은 드물었다. 허나 그녀의 내심에서는 적극적 변화가 발생 중임을 우린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곳곳을 유랑하던, 바둑계의 이 기이한 여자가 정식으로 조국으로 돌아올 날이 정말로 머지않은지도 모른다.



도시에 남기 위해 바둑을 배웠다


記 :듣자니 니 아버지는 니가 시내에 남을 수 있게 만들 목적으로 니가 바둑을 배우도록 했다는데?


芮 :그 당시 청년들은 모두 上山下鄕(상산하향)을 겪었을 거다. (譯註 ;上山下鄕-중화인민공화국 문화혁명 당시, 기관의 간부나 청년 지식인들이 지방으로 내려가 노동자, 농민과 함께 하고, 이것을 통하여 사상성을 높이고자 한 운동, 이 문구를 표어를 내걸어 실제로 청년들을 지방으로 보냈다.)

운이 나쁘면 시내로 돌아오지 못하기 십상이었잖나. 단 니가 한 가지 재주가 있다면, 예를 들어 바둑을 잘 둔다면 省팀이나 국가팀에 들어갔을 테고, 상산하향 할 필요가 없었을 테고, 쌀밥 먹고 살 수 있었을 거다. 당시 우리 아버지가 나로 하여금 바둑을 배우도록 한 목적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어따.

  

記 :니 직업 생애 초기에 니는 연속 세 번을 전국 대회 준우승을 하여, ‘만년2등’이란 별명을 얻었다....

  

芮 :당시 몇몇 별 거 아닌 시합에서는 늘 그녀들을 이겼다, 다만 중요한 시합에만 가면 늘 졌다. 運이란 요소도 있고 내 바둑이 아직 모자랐다는 이유도 있고.

  

記 :1986년 너는 전국 대회 첫 우승을 하였다.


芮 :그해 「전국개인전」 직전에 난 中日승발전을 막 끝낸 참이었다. 연속 2승 후에 今村俊也(금촌준야)에게 졌다. 이 패배로 난 모든 부담을 털어버릴 수 있었다. 전국개인전을 둘 당시에, ‘今村과의 그 중요한 시합을 졌는데 기타 시합의 승패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결과 난 전국개인전에서 12연승을 하였다. 이거이 나의 가벼운 심리상태와 무관하지 않겠지.

  

記 :이후 니는 전국개인전을 연속 3회 우승한다. 쥐구멍에 볕들 날 온다, 뭐 그런 느낌이 안 들었나?

  

芮 :니가 어떤 관문 하나를 뛰어넘었다 치자, 앞이 탁 트이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지 않겠나.


  

‘三峽사건’이 내 인생을 바꿔버렸다

  

記 :1986년부터, 니는 남자 기사에게도 승률이 퍽 높았다.

 

芮 :1985년 신체육배에서 난 섭위평을 이겼다. 하지만 막상 남자를 이기기 시작했을 때 오히려 ‘이거 간단하지 않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후에 남자들과 많이 두고 나서는 승과 패가 습관이 되었다.


記 :한창 욱일승천의 기세를 타는 중에 ‘三峽사건’이 발생했다.

  

芮 :‘三峽사건’은 내 인생 행로를 크게 바꾸었다 고 말할 수 있다.

 

記 :당시 협회의 처벌이 수긍되더나? 불복되더나?


芮 :내 생각엔 기껏 규정을 어겼을 뿐이다. 근데 ‘품행 不方正’이라 규정되었다. 어린 여자로서 그런 딱지붙임을 당하고 보니, 오갈 데 없다는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譯註 ;行間을 살피면 ‘풍기문란’이 떠오른다.)

  

記 :후에 羅建文(나건문) 老선생이 글 한 편을 발표하여 이 사건을 언급하기를, ‘예내위와 張璇(장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그때 행한 일들을 밝힐 수는 없다. 말이 나오면 그들의 명예를 훼손하게 된다.’라고 했다.

 

芮 :羅 老선생의 이런 문법은 얼핏 우리를 보호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거야말로 딱 우리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본 남자 기사의 방에서 바둑 두는 거 말고는 다른 어떤 짓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記 :‘三峽사건’후 니는 전국승단전에서 孔祥明(공상명)을 이기고 세계바둑계 첫 여자 九단이 되었다. 혹 위안이 된다거나 고무된다거나 하던가?

  

芮 :특별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승단을 하려면 한판 한판을 이겨나가서 승률이 일정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현재의 승단시합 역시 마찬가지이고.

  

記 ;니는 후에 국가隊 탈퇴를 자진하여 신청했다. 결정이 경솔하지 않았나?

  

芮 :결정하기 전에 나의 처지는 모순 상태였다. 바둑을 버릴 수도 없고 국가隊 환경 또한 버릴 수도 없고. 단 ‘三峽사건’은 확실히 나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 당시 나의 심정은 절망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좋은 바둑을 둘 수 없었다. 탈퇴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당시 수준이 나와 비슷하던 남자 기사가 세계대회에 나갈 기회가 나보다  많았다. 나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했고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프로로의 회귀는 知靑返城과 마찬가지


※知靑 :지식청년의 줄임, 중국에서는, 특히 문화혁명 당시인 1960년대~1970년대에 강요로 인해 농촌이나 국경 지역으로 가서 농업 생산에 참가하며 생고생을 해야 했던 도시의 젊은 지식인을 가리킴. 返城(반성) :도시로 돌아오다.

따라서 知靑返城이란 표현은 중국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譯註


記 :일본으로 건너갈 생각은 왜 하게 되었나?

 

芮 :당시 일본바둑은 수준이 높고 대회 또한 많았다. 일본으로 가면 바둑 둘 기회가 더 많으리라 생각했다.

 

記 :애석하게도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넌 일본기원 客員棋士가 되지 못했고, 때문에 일본 국내 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芮 :프로기사로 말하자면, 시합이 없음은 고통이다. 때문에 나는 차민수 大兄에게 감사하고 한국기원에 감사한다. 그들 덕분에 내가 프로기사로 돌아올 수 있었고 방랑을 끝낼 수 있었다.

  

記 :일본 생활 몇 년에 소득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최소한 오청원 老선생의 關門제자(마지막 제자)가 되지 않았나.

 

芮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오청원이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그는 이미 아득히 먼 신성한 경지에 있었다. 어쩌면 내 평생에 그를 단 한 번 만나보지도 못할 지도 몰랐다. 吳 老선생을 사부로 모신다, 그건 나에겐 이룰 수 없는 꿈일 뿐이었을 뿐, 그런데 후에 꿈이 현실이 되었다.

  

記 :오청원을 스승으로 모신 후에 棋力이 늘었단 생각이 들던가?

 

芮 :역시 그랬다. 내가 얻은 최대의 선물은 경계를 넓혔다는 것이다. 이전에 국내(중국)에 있을 때 나의 포석은 매우 나빴다. 어떤 사람이 나더러 힘이 세다고 했는데, 뒤집어 말하면 초반에 형세가 나빠서 후반에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바둑을 이겨간다는 의미이다. 힘센 건 좋지만 늘 힘이 세어야만 한다는 건 초반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吳 老선생의 포석 이론과 大局觀으로부터 작지 않은 것을 배웠다.

  

記 :한국기원 객원기사가 됨을 알고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芮 :말할 수 없이 감격스러웠다. 그야말로 知靑回城(위에 나온 知靑返城 참조, 같은 의미 ;譯註)이 따로 없었다. 만약 한국기원이 날 받아들여주지 않았다면 내 바둑 생애는 마치 전화기 내려놓듯 내려놓아야 했을 거다.(웃음)

 

記 :한국으로 건너간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놀랍게도 한국 최고 권위의 남자 棋戰 우승을 거머쥐었다. 게다가 승리한 상대가 조훈현-이창호 師弟였다.

  

芮 :우선은 오청원 老선생이 닦아준 기초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한국으로 건너가 바둑을 두게 된 후, 나의 심리가 그전과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바둑을 질 경우 세상 末日이라는 느낌이었고 그야말로 못 살 거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오랜 세월을 바둑을 두고는 싶은데 바둑을 못 두는 고통을 겪고 나니, 승부를 대면하여 더 이상 大喜大悲하지 않게 되었다. 이 이외에 과거와 다른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이전에는 바둑을 졌을 때 그 아픔이 바로 잊어지지가 않았다. 현재에는 패배를 꺼려함이 없이 반드시 원인을 찾으려 한다. 이 점은 이창호에게 배운 것이다. 이창호가 중요시합을 지면 반드시 진지하게 복기를 한다는 사실을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중국대표로 출전하고 싶다

  

記 :1993년 중국이 첫 세계 여자바둑 대회를 했다. 그 대회에 니가 우승했는데 신분이 일본체류棋士였다.

  

芮 :그 대회는 내 自費로 참가했다. 대회 안내서 내 이름 뒤에 ‘旅日’ (‘일본 체류 중’정도의 의미 ;譯註) 두 자가 附記(부기)된 걸 보고 입맛이 참 썼다. 楊暉(양휘)나 豊蕓(풍운)처럼 이름 뒤에 중국이 附記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디에 있느냐에 상관없이 나는 반드시 중국인이고 반드시 중국 기사이다. 중국 대표로 출전하기를 제일로 바랬었다.

 

記 :이렇게도 여러 해가 지나갔다. 너와 중국바둑협회 간의 恩怨(은원)은 당연히 해소되었다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둑협회가 너더라 광주 아시안게임 중국 바둑팀 선발전에 참가하라고 요청하지 않았을 거다.


芮 :특정 시대에 발생한 특정 사연은 이미 과거다. 설령 당시에 날 괴롭게 만든 몇 사람이라 할지라도, 현재의 내 시각으로 보자면 그들은 역시 나의 인생 선배이고 老선생이다.

 

記 :금년에 처음으로 바둑이 아시안게임 종목으로 포함되었다. 만약 니가 참가한다면 반드시 특별한 의의가 있다.

 

芮 :만약 중국바둑협회가 정말 나에게 아시안게임 선발전 참가를 요청한다면 매우 기쁘겠다. 하지만 현재 중국 여자바둑 수준은 매우 높아서 설사 선발전에 나간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뽑힌다는 확신은 없다.

  

記 :니가 보기에 현재 中日韓 삼국의 여자바둑 판국은 어떠한가?

  

芮 :일본은 조금 약하다. 중국과 한국의 수준은 당연히 비슷하다. 그래도 한국에 비해서 중국 여자바둑은 나이 측면에서 우세가 있다.         끝